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77
77화 마왕 (2)
칼리우드 호수 주위에는 작은 마을이 몇 개 있다.
호수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사는 어부나 관광업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다.
흔하진 않으나 늦은 밤까지 불이 켜진 주점이 있었고, 카를은 그곳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쇼~!”
불그스름한 수염을 기른 주인장은 나란히 들어온 카를과 이시엘을 반겼다.
크로우 가문의 공작과, 마족들의 왕이라는 그들의 정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메뉴판을 내어 줄 뿐.
“…술은, 먹나?”
“……하.”
“주인장, 두 잔 부탁하지. 가능하면 메뉴에 있는 생선 요리까지.”
카를의 물음에 이시엘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 반응을 흘려 넘긴 카를은 메뉴판을 흘긋 보고 주문했다.
“알~ 겠습니다요!”
흥이 넘치는 목소리로 답한 주인장은 금세 커다란 나무 잔 두 개를 내밀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잔을 보고 인상을 찌푸린 이시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놈, 무슨 생각으로 나를 여기에 데려온 것이냐.”
“감사의 표시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군. 그대 덕분에 고민하던 것이 해결됐거든.”
“하…?”
쾅! 주먹을 쥔 손이 카운터를 내리쳤다.
“공작 까마귀, 네놈.”
“왜 그러지?”
“그 대갈통이 장식이 아니라면 그 문서를 몽땅 지키라고 보낸 것은 아니렷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까드드득.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카를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싼값을 하는 술이었다. 목 넘김이 영 거슬렸다.
“그럼 정녕 그 모든 것을 이행하라고 보낸 것이냐.”
“그건 그대에게 달렸지.”
“네놈은 뭘 바라는 거냐!”
이시엘에게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주방으로 들어간 주인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언성이 높아졌을 뿐임을 확인한 그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이시엘은 손이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것을 자각한 그녀는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냐.”
“두 가지. 내가 제시하는 조건 딱 두 가지만 이행한다면 없는 것으로 해 줄 수 있다.”
카를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이면서 말했다.
마왕은 미간을 일그러뜨렸고,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은 질문을 던졌다.
“먼저 하나, 이건 단순한 질문이다. 문서로 보낸 조건들을 이행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나?”
“……네놈, 다 알고 있어서 그런 조건을 건 게 아니었나.”
“나는 어디까지나 간략하게 알고 있을 뿐, 정확한 상황은 모른다. 이미 드라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돈가?”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인간들 뿐,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놈은 하나도 없다.
왜 이런 곳에서, 인간 놈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든 마왕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를 가능하면 숨기면서 대화를 이어 나갈 뿐.
“…없다.”
“흠.”
“나를 지지하는 놈들보다, 연합 놈들의 규모가 훨씬 커. 지금 당장이라면 모가지를 날릴 수 있겠지만….”
그때 마침 주인장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을 가지고 나왔다.
붉은 소스를 발라서 구운 생선 요리였다. 카를은 포크를 들었고, 그녀는 미간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모가지를 날릴 명분이 없다.”
“조금도 없지는 않을 텐데.”
“납득할 만한 명분이 아니면 놈의 부하들이 들고일어날 거다. 그러면 놈이 살아 있는 것보다 상황이 안 좋아질 뿐이다.”
카를은 평범한 고민을 들어 주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 탓에 이시엘은 저도 모르게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게다가, 물리적으로 어렵다. 놈은 서쪽 변두리에 자리를 잡았어. 내 말은 닿지도 않으며, 내가 직접 가기도 어렵다. 놈은 내가 그곳에 방문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대에게는 말 그대로 잡졸 아닌가.”
“그렇다고 그놈들을 쓸어버리면 내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지금도 수많은 마족은 연합에 가입하거나, 힘을 보태고 있다.
그런 와중에 마족들의 왕이라는 지위를 가진 마왕이 정적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죄 없는 동족을 학살하면 만민이 연합의 편이 될 것이다.
“그대들에게 논리란 곧 힘이 아니었나?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되는 문제 아닌가.”
“그게 가능했으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주점을 가득 채웠다.
한여름의 사막을 방불케 하는 열기에 이상함을 느낀 취객들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입술을 짓깨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제국을 적으로 돌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카를은 알고 있지만, 평범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마왕의 이름은, 곧 악몽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니.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들 중에는 그녀처럼 진한 녹색 머리카락을 타고 나는 사람이 없다.
까딱하다가 의심이라도 받으면 정체가 쉽게 들킬 것이다.
이미 그녀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다. 몇십 년 전 일이기는 하나, 아직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설정으로 존재한다.
그가 이시엘을 사람 많은 주점으로 데려온 이유였다.
“개떡 같은….”
욕을 씹어뱉은 그녀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네놈을 찾아 왔겠느냐.”
이시엘은 달리 방법이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뿐, 공포는 조금도 없다.
자신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는 적을 상대로, 그녀의 힘은 현저히 약해진다.
힘과 힘으로 맞붙었을 때 확실히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당장은 숙여야 했다.
“산 채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단 말이다.”
“…….”
“그런데도 네놈은 애송이 황제를 시켜서 정녕 내 목을 날리려고 하는 것이냐. 지금 이 자리에서, 선전 포고를 해 주랴?”
카를은 피식 웃으면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위협은 어디까지나 으름장을 놓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나는 해결이 됐고… 이제 두 번째다.”
“…….”
“그대는 ‘강림’에 대비하고 있을 터.”
그녀는 몸을 움찔 떨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카를을 보았다.
“그게 언제, 어디서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나?”
“…남부. 국경 지대 근처.”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역병 이벤트를 제외하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도.
플레이어에게 사도의 존재를 알리는 이벤트인 동시에, 시나리오의 첫 번째 난관이다.
‘여기까진 예상대로야.’
정현이 게임을 시작할 때, 북부를 버리고 시작하려고 한 가장 큰 이유.
첫 번째 사도가 강림하는 지역이 바로 북부였다.
얼핏 보면 마족들의 영토로 가는가 싶다가 갑작스럽게 진로를 틀어 플레이어를 공격한다.
“……그런데, 네놈.”
그때 이시엘이 목소리를 낮추고 카를을 노려보았다.
“강림에 대해 어떻게 아는 것이냐.”
“마법사들은….”
“인간 마법사가 알아낼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 허나, 네놈은 그걸 ‘사도’라 칭하지 않고 ‘강림’이라 지껄이지 않았나.”
호박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선이 카를을 꿰뚫어 보았다.
콱!
잔을 들고 있는 카를의 손을 낚아챈 그녀가 한참 후에 문득 중얼거렸다.
“…네놈도 사슬에 엮여 있었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이시엘이 손을 놓았다.
그 중얼거림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카를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네놈이 어떻게 아는 것인지는 이해했다. 그래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이지?”
“혹시나 사도가 국경을 넘더라도, 나를 도와서 놈을 죽여라.”
“…….”
이시엘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애초에 사도의 강림을 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걸 조건으로 삼는 것인가.
혹은, 그냥 말장난인가.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재차 물었다.
“그렇게 하면, 그 문서를 무효로 해 주겠다는 뜻인가?”
“그래.”
호박색 눈동자가 둥그레졌다.
묘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갑작스레 잔에 손을 뻗더니 입가에 대었다.
겨우 한 모금을 마신 그녀는 켁켁대며 기침을 뱉어 냈다.
“…못 먹는 줄 알았으면 다른 걸 주문했을 텐데.”
“먹을 줄 안다.”
“……정말로?”
“네놈, 내가 애새끼인줄 아느냐?”
잔을 테이블 끝까지 밀어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카를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생선 요리를 먹고 있자, 이시엘이 마법을 펼쳤다.
투명한 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주점 한구석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의 목소리가 지워졌다.
“흠.”
영창도, 매개도 없이 발동한 결계 마법의 일종.
그 완벽한 마법의 구현에 카를은 내심 감탄을 터뜨렸다.
과연, 마왕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크로우.”
“…왜 그러지?”
“나는, 네놈의 적일 텐데.”
고작 한 모금 마신 술 때문일까. 뺨이 살짝 붉어진 이시엘이 물었다.
“왜 나를 돕지?”
“적의 적은 벗이라는 말이 있거든.”
“네놈은 내 부하에게 아비를 잃고, 또 네놈의 목숨마저 잃을 뻔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이시엘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나를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그러는 그대는 나를 적이라고 여기나?”
“……네놈이 내게 칼날을 겨눈다면.”
“그대와 같은 이치다.”
마왕은 인간을, 그리고 제국을 적이라 여기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땅이 제국이고, 그녀의 양부모는 두 사람 다 인간이었으니.
“그대는 제국을 적이라 여기지 않고, 나를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내가 그대를 적으로 여길 이유가 없지.”
“…네놈들은, 복수를 절대 잊지 않는 족속일 터인데.”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는 반드시 뿌리까지 뽑을 것, 그것이 크로우 가문의 철칙이었다.
그래서 제도의 다른 귀족들은 크로우 가문을 건드리지 않는다. 아예 핏줄을 모조리 끊어 놓는 게 아니면, 황제도 감히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핏줄이 너무 쉽게 끊기긴 했지만….’
원래의 시나리오였다면, 카를은 이미 죽었고 유리아도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황제에게 버림받고 목이 날아가 결국에는 몰락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나를 적대하고 위협한다면, 뿌리까지 뽑아 놔야 안심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복수의 철칙을 굳이 지킬 필요가 있는가.
자신은 크로우 가문의 차남인 카를로스가 아닌, 정현일 뿐인데.
“허나, 필요할 때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
“아버지를 죽인 그 마족은 이미 죽였다. 끝낸 복수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 아닌가.”
시나리오의 클리어를 목표로 하는 이상, 마왕은 절대로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대상이다.
그녀가 드라일에게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살아남아서, 카를 자신의 아군이 되어 주어야 했다.
“연합이 내게 칼을 겨누면 나는 놈들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 사도가 내게 칼을 겨누면, 그 사도가 섬기는 신까지 멸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를 적이라 여기지 않는다.”
“…공작 까마귀.”
이시엘은 흔들림 없는 그의 눈을 보았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알고, 또 무엇을 노리기에 이렇게 하는가.
모든 것을 묻고 답을 듣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시엘은 다만 한 가지를 물었다.
“너의 신은 누구지?”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마법사는 오직 두 가지만 믿는다.”
이 세계에서 신이라 불리는 족속은 믿을 게 못 되었다.
그것을 아는 카를은 그리 대답했다.
“자기 자신과 또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
“하….”
그녀는 한숨을 쉬듯 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투명한 막이 걷혔다. 취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시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화한 기운이 술집 내부를 가득 채웠다.
“사도가 강림하는 날, 다시 너를 찾아오마.”
이시엘은 그 말을 남기고서 주점을 떠났다.
술이 절반 넘게 남았지만 카를 또한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할 수 있다.”
하늘에 동그랗게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면서, 정현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