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이시엘 (2)
하드라이누스는 살아 움직이는 천재지변에 가까웠다.
우선 덩치. 카를과 이시엘이 앉아 있는 아카데미의 본관 건물보다 거대하다.
당연하게도, 그런 놈은 다리를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박살 난다.
‘단순히 덩치만 크면 문제가 아니겠지.’
덩치가 크다는 건 곧 맞기도 쉽다는 뜻이었다.
원본이 되는 생명체가 거북이기에 등딱지는 단단하지만 마법이나 오러를 동원하면 충분히 깨부술 수 있다.
그저 산처럼 덩치만 크다면 마법사들이 공격용 마법을 시험해 보기에 좋은 표적일 뿐이다.
‘마물이나 마수 따위랑은 달라.’
결국 그것들은 짐승의 본능을 따른다.
하지만 사도라는 존재는 다른 이의 조종을 받는다. 지성이 있다.
더 많은 사념을 끌어모으는 것이 사도를 조종하는 것들의 특징이다.
사도에게 쥐여 주는 권능은 곧 자신을 상징하는 능력이기에, 사도들이 휘두르는 권능이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질수록 많은 사념이 모이는 것이다.
‘악몽.’
잠에서 깨어나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악몽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악의로 똘똘 뭉친 꿈. 악몽. 그것이 곧 사도를 칭하는 단어가 될 것이다.
“…공작 까마귀.”
“왜 그러지?”
“나는 이제까지 내가 꿈에서 본 사도가 강림하면 모조리 죽여 없애 놓았다.”
이시엘이 사도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카를과 비슷했다.
할퀴고 상처 입혀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새겨 놓곤 그것을 신격이라 칭하는 존재들이었다.
“…헌데, 이전의 공작 까마귀들은 거기에 깃털 하나만큼의 도움도 준 적이 없다.”
“…….”
“제국력 588년. 네놈의 조상은 사도가 도시 하나를 통째로 박살 냈음에도 방관했다. 그러고는, 기록을 지워 없애고 그 도시가 있다는 사실까지 없애 버렸다. 그런 식으로 없어진 마을이 수십에 달한다.”
설정에도, 기록에도 없는 역사였다.
정현이 모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꺼내 놓은 이시엘은 카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과 함께 방의 온도가 낮아진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제국력 611년. 네놈의 할애비 되는 놈이 공작 까마귀라 불릴 때, 상단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심부름꾼 꼬마 한 명을 빼면 살아남은 이가 없었지.”
“…….”
“수백 명이 죽었다. 그리고 공작 까마귀들 때문에 묘지도,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내가 아는 공작 까마귀란 족속은, 그런 것들이다.”
아무도 모를 이야기를 꺼내 놓은 이시엘을 카를은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진중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엘 스프링윈드가 인간이랑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자세한 과거사는 설정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직접 말을 하진 않았으나, 이쯤 되면 바보라도 그녀가 상단의 심부름꾼 꼬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추측만 해 오던 것을 이렇게 알게 되다니. 카를은 놀랐지만, 그 감정을 속으로만 삼켰다.
‘이전의 크로우 공작들을 어지간히도 불신하는 모양인데.’
아예 대응하지 않는 것도 사도에게 대항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사념을 늘려 섬기는 신의 신격을 상승시키기 위해 난장판을 치는 것이다.
아예 대응하지 않고 사도에게 당했다는 사실마저 은폐할 수 있다면 신격은 상승하지 않고, 신은 흥미를 잃고 사도를 다시 거둬들인다.
‘그걸 굳이 입으로 말해서 좋을 게 없지.’
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선 무책임한 책임자의 구차한 변명거리일 뿐이다.
하드라이누스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이시엘의 협력이 필요하다.
신뢰를 얻으려면, 그녀가 증오하는 선대의 크로우 공작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꿈에서 본 사도가 강림하는 족족 죽였다. 부하들이 나서 봤자 애먼 목숨만 날릴 뿐이니 내가 직접, 나 혼자서 죽였다. 그러는 와중에 왕성을 비우니 같잖은 놈들이 연합 따위를 만들어서 설치기 시작하더군.”
고작 몇 주 전, 이시엘은 그를 믿겠다 다짐했으나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자신이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는 사도가 설령 국경을 넘더라도 토벌에 힘을 보태라는 제안으로 이해했으나.
몇 안 되는 소중한 부하들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뀔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이젠 나를 진정으로 섬기는 부하도 몇 남지 않았다. 그 부하들을 데리고 네놈과 전장에 서야 하지. 공작 까마귀들의 피가 흐르는, 네놈과.”
카를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대답했다.
“전제부터 잘못되었군.”
“뭐라?”
“…내가 그들처럼 행동했을 거라면,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없었겠지.”
‘어차피 내 조상도 아닌데.’
카를로스의 조상이지 정현의 조상은 아니었다. 그는 덮어놓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짓거리였다. 하드라이누스처럼 통상적인 방법으로 제압할 수 없는 사도도 아닐 텐데 아예 대응을 포기하다니.”
물량을 갈아 넣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또한 그때도 마탑은 존재했고, 북부 마탑의 최대 후원자는 언제나 크로우 가문이었다.
“마법사들을 동원하든, 집행관들을 동원하든 막을 방법은 충분했을 텐데도 포기하고 은폐하는 쪽을 택했다. 골치 아픈 일에서 고개를 돌리고 회피하다니.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
“……?”
“특히,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저울질하지도 못했다. 도시 하나와 마을 수십 개, 심지어 상단이 피해를 입었다.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아 더 큰 피해를 유발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제국력 617년에 흉년이 들어 많은 이들이 아사했다. 그 상단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말들을 쏟아 낸 카를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시엘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미숙한 마왕은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네놈이 이제까지의 공작 까마귀들과 다르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하고 말을 이으며 이시엘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카를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토록 위협적인 사도라면 내가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지.”
“이미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내가 연합과 짜고 그대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군. 네놈을 완전히 믿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가 담긴 말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카를의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의문을 확인한 이시엘이 설명했다.
“아군으로 같은 전장에 선다는 건 곧 목숨을 맡길 정도로 신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네놈을 죽여 득 볼 것이 없으나, 네놈은 나를 죽여 득 볼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도.”
“그 이야기는 지난번에 하지 않았나. 나는, 내게 위협이 되는 자만 적으로 삼는다.”
“하였지. 나는 당부를 하고 싶을 뿐이다.”
이시엘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네놈을, 아니 다시 한번 인간을 믿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해라.”
“…….”
“나의 죽음은 네놈의 삶보다 길다. 절대로 잊지 말도록.”
설령 그녀가 죽더라도 이시엘을 따르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복수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마족들의 복수는 세대를 뛰어넘는 경우도 잦았다. 그만큼 증오를 오랫동안 쌓아 두는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한 번에 폭발하지….’
복수심이 오래 이어진다는 점은 피가 옅은 혼혈들에게도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당장 신생 마족 연합이 탄생한 이유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분노 때문이었으니까.
“…정 불안하다면.”
그녀의 뒤통수를 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향후에 강림할 사도, 그리고 마족 연합의 드라일에 맞서려면 이시엘의 힘이 필요하다.
드라일에게 밀려 시나리오에서 퇴장당하는 정사를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이시엘이 반드시 카를 자신을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수단이었다.
“맹약을 맺지.”
“……!”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은 정현이 아는 이름이었다.
마왕은 카를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적 없다.
“…이시엘.”
“성은?”
“이시엘 레아 스프링윈드.”
‘응?’
중간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원래 정사에서 카를로스와 마찬가지로 아덴에게 제거당하는 유리아도 ‘비앙카’라는 중간 이름이 공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네임드 캐릭터인 이시엘의 중간 이름은 전혀 처음 듣는 것이었다.
‘뭔가 다른 선택지가 있는 건가.’
플레이어는 마왕이라는 캐릭터와의 접점이 거의 없다.
내정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양성하기 시작하면 이미 신생 마족 연합이 왕좌를 찬탈한 이후가 되어, 마왕은 퇴장하니까.
만약 정현과 같은 방식으로 플레이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마왕이라는 캐릭터에 집중하는 루트로 간다면.
‘그러면 중간 이름을 밝히는 경우도 있는 건가.’
문득 자신이 그 루트를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를은 이시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손바닥을 펼쳐 그 위로 마력을 모았다.
“나, 카를로스 크로우는 이시엘 레아 스프링윈드에게 깨지지 않는 맹세를 한다. ‘결코 그대를 배신하지 않겠다.’ 이를 어기는 자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고통이 있으리.”
새하얀 마력 덩어리가 검게 물들었다. 색이 바뀌는 것을 본 이시엘 또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이시엘 레아 스프링윈드는 카를로스 크로우에게 깨지지 않는 맹세를 한다. ‘결코 그대를 배신하지 않겠다.’ 이를 어기는 자의 심장에 아물지 않는 상처가 새겨지리.”
카를의 손 위의 맹약이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맹약이 성립되었음을 뜻하는 빛이었다. 꿈틀대던 빛이 고리의 형태로 변하더니 두 사람의 손목에 묶였다.
카를은 자신의 손을 이시엘을 향해 내밀었고 그녀는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하얗고, 흉터로 가득한 손이었다.
“공작 까마귀 그대와의 동맹을 받아들이겠다.”
* * *
맹약을 나눈 이시엘은 밀크티를 잠시 음미하고는 바로 떠나갔다.
외모만 보면 머리색이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기에 문으로 나가도 된다고 했으나, 그녀는 구태여 창문으로 나갔다.
“……좋아.”
이제 자세한 계획을 수립할 차례였다.
일단, 북부 마탑이든 서부 마탑이든 마법사를 끌어모으면 어떻게든 알려지게 되어 있다.
거수의 토벌을 준비한다는 것이 시아나의 귀에 들어가면 그녀는 탑주 심사도 포기하고 카를을 도우려 할 것이 뻔했다.
“마법사들은… 어차피 충분해.”
카를 자신이 있고, 이시엘이 있으며 그녀가 이끄는 그녀의 친위대가 있다.
마족의 마법 능력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뛰어나다. 그녀가 이끄는 친위대는 어지간한 인간 마법사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마법사들은 그들로 충분하다.
‘발이 느린 마법사를 뽑으면… 자칫하다간 그 마법사가 적이 될 테니까.’
마탑의 마법사들을 동원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였다.
‘화력은 충분하다.’
이시엘이 이끌고 올 마법사를 지켜 줄 수 있는 전위만 있으면 된다.
몇 번을 생각해도 크로우 가문의 집행관들이 제격이었다.
‘넓은 평원에 미리 토벌대를 전개해 놓고 화력을 쏟아부어서 1페이즈를 뚫어 내고… 2페이즈가 시작되면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돌입하면 돼.’
유닛의 수가 충분하다면 한 손으로도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로 페이즈 자체는 간단한 놈이었다.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문제는 그 충분한 유닛의 수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왕 이시엘과 그녀의 친위대. 그리고 크로우 가문의 집행관들까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문제는 이게 현실이라는 건데.’
모니터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과 육안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당장 용만 해도, 화면에서는 그냥 커다란 유닛이지만 직접 보면 움직이는 산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으니까.
‘철저하게 공략을 숙지하는 수밖에.’
게임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니.
생각을 정리한 카를은 클레멘트 아카데미의 교직원용 기숙사로 향했다. 이사장실과 마찬가지로 꼭대기 층이 자신의 방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다시 떴다.
잠들기 전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던 시계 바늘은 어느새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일곱 시까지 책을 읽었다.
째깍.
시침이 정확히 7을 가리킨 순간, 카를은 책을 덮고 샤워를 한 뒤, 아카데미의 별관으로 향했다.
각종 물품을 보관해 두는 창고로 개조해 두었으나, 원래 설치한 워프 게이트는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간단한 조정을 거친 뒤,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크로우 저택의 지하에 위치한 워프 게이트에서 나온 그는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헛…!”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관리들의 집무실로 향하자, 당직을 서고 있었던 두 집행관이 그들을 맞이했다.
화들짝 놀란 얼굴의 카스와, 차석 집행관 테나였다.
“차석 집행관 테나.”
“예, 각하!”
“그리고 219명의 집행관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테나에게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카스 또한 얼굴에서 미소를 싹 빼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섰다.
“맡은 업무를 모조리 중단하고 10일 내로 집결하도록.”
카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