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01)
유리스는 ‘잘들 논다.’란 표정으로 우리의 포옹을 지켜봤다.
그 와중에도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선물이…….”
선물아, 제발 맥 좀 끊지 마라!
“……고마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인사했다.
옐베리가 내 인사를 듣고 꺅꺅거렸다. 이번엔 유리스도 같이 꺅꺅거렸다.
내 능력이 사라졌어도, 어떻게든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왜냐면 친구들이 있으니까!
진중한 분위기로 회의 중인 사내들이 있었다.
“아버지와 형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 게지. 가엾게도…… 안타까운 페리.”
페녹스가 슬픈 얼굴로 중얼거리자 나머지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가득 찼다.
본인은 선택됐다고 우쭐거리는 꼴이란.
심지어 지금의 그가 아주 약간의 우월감까지 느끼고 있는 것이 나머지에게 충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
“…….”
공식적으로 오지 말라고 인증당한 둘은 침묵했다. 할 말이 없었다. 오빠랑 아빠한테 죽으라 했어도 죽었을 텐데, 그냥 접근하지 말라니.
우리 페리안은 어찌나 상냥하고 다정한지.
레리온은 페리가 그냥 왔다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레서와 레리온이 점점 눈을 가늘게 떴다. 계속 자랑 중인 페녹스가 꼴 보기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와 형이 처질까 봐 일부러 혼자서라도 들뜬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마음은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랬다.
페리안이 가벼운 마음으로 와 준 것이 아닌데 저놈은 왜 저렇게 가볍나.
페녹스가 마침 또 페리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어쩐지. 처음부터 끌린 이유가 있었어. 페리가 시녀일 적에도 나와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니다. 형님과 아버지께 말해 봤자 뭐 해. 나와 그 애만의 이야기…….”
-찰싹.
결국 판데르니안이 페녹스의 뒤통수를 때렸다.
“셋째야. 또 왜 그래?”
“분위기 좀 봐라.”
그리고 판데르니안이 내심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고, 퉁명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내 언급은?”
페녹스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물론 판데르니안이 원하던 답변은 아니었다.
“없었지. 페리에겐 나밖에…….”
-찰싹!
페녹스 외의 세 남자는 우중충한 심리를 감추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하지만 장난으로라도 페리가 페녹스를 홀대하길 바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페리안과의 하나뿐인 끈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아빠와 오빠를 보기 싫어하는 것도 이해한다.
살아만 있어 주면 그것만으로도 하늘에게 감사드릴 일이었다.
물론 그 무엇보다, 지금까지 혼자 버텨 준 그 아이에게 더욱 감사했다.
여태껏 무슨 생각을 하며 버텼을까.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페리안은 지금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집무실에서 내보내면 엉엉 울던 애기였던 것이 눈에 생생한데.
아빠 생각에 그 어린 게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지금도 얼마나 가슴 아픈 속앓이를 하고 있을까…….
레서의 눈이 미련과 후회로 가득 찼다.
지금은 페녹스뿐만이라도, 접근을 허락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어찌 되었든 이제는 가 보자. 마주할 시간이 되었다.”
***
“선공작님과 레리온 공은 뵙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속은 당황스러웠다.
지금 저걸 따라온답시고 따라온 건가?
우리가 밖으로 나와 페녹스를 마주한 직후. 옐베리가 바로 소곤거렸다.
‘페리야. 저어기 선공작님이랑 레리온 공이 계셔. 네 얼굴 보려고 왔나 봐! 치사하다. 시력으로 안 보이는 거리에 서서…….’
‘……어디에?’
‘사 키로미터 정도 바깥에. 저 방향이야.’
‘……?’
미친놈들이. 거기 있으면 내 뭔가가 느껴지기라도 하니?
그래도 따지기까지 하는 것은 좀 그랬다. 사 키로미터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난 도도하게 말했다.
“레서 선공작님이랑 레리온 공은 앞으로 저 거리에서 한 발자국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페…… 페리안!”
“사 키로미터 정도는 허락해 드리죠.”
페녹스가 당황하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역시, 자기 아빠랑 형 무시한다고 그러는…….’
“……내게 존대는 너무 거리감 있어 보이잖아.”
“……싫습니다.”
“아냐, 아니다. 방금도 상냥해 보이고 다정하고 듣기 좋다. 응?”
“일단 들어오세요.”
***
아직까진 생각대로다.
일단 할 말이 많겠지.
무슨 말부터 꺼낼지 궁금해서 쳐다보는데, 응접실로 온 페녹스가 바로 울상을 짓는 것이 보였다.
속으로 ‘우리 페리가 이런 허름한 곳에 있다니…….’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한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유리스가 차를 내오고 도청 방지 마법을 다시 꼼꼼히 점검해 준 후 종이 하나를 건네고 사라졌다.
그리고 응접실엔 나와 페녹스만 남았다.
페녹스는 한참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뭘 먼저 물어볼지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너 어떻게 살아 있었냐, 혹은 너 정체가 뭐냐 등등.
민감하지만 당연히 선행되어야 하는 그런 물음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날씨가…… 참 좋다. 그렇지?”
“그래요?”
나를 배려해 준답시고 그러는 건가?
우리는 별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나는 대답하는 쪽이었고 필사적으로 화제를 더 이끌어 나가려 하는 쪽은 페녹스였다.
하지만 그런 잡담에도 한계는 있는 법.
페녹스가 치고 들어왔다.
“페리야. 왜 시녀일 적에 내게 말하지 않았니?”
“제가 말한다고 믿기나 하셨을까요.”
그도 할 말이 없는지 씁쓸하게 애꿎은 테이블 위만 쳐다봤다.
“……그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건지 내게만 말해 줄 수 없을까?”
“…….”
“형님과 아버지에게도 말하는 일 없을 거야. 페리안, 난 네 편이란다.”
의외로 그의 말은 진심 같았지만, 그런 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아빠랑 오빠들이 또 버리면 저도 살 방법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걸 어떻게 말해 드리겠어요.”
스파이로 살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냐? 진짜 힘들었는데 난 최고였어! ……라고 솔직하게 자랑할 순 없으니 괜히 뾰로통한 척한 것이었다. 페녹스가 아닌 척 표정을 가다듬지만 굉장히 상처받은 것이 느껴졌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챙겨줄 순 없으니 넘어가자.
“……그래도, 어떻게 몸이 여러 개가 되었는지는 알려 줘야지, 응?”
“괴물이란 것도 알고 버린 거면서.”
정말로 아직까지 앙금이 남거나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패를 까발릴 수 없으니 나오는 태도였다.
근데 그렇게 상처받으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원래 목적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건 넘어가기로 하죠. 제가 페녹스 경을 부른 이유는 하나예요. 이제 와서 엑저 가문과 접촉한 것도,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셨으면 해서 그런 거였어요.”
“……그럼. 무엇이든 다 해 줘야지.”
“그렇지만, 제 요구를 들어주신다고 해서 뭘 보답할 수는 없어요. 제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오빠 재산 다 증여해 줄까? 라고 묻는 페녹스의 말을 무시하고, 난 아까 유리스에게 부탁해 만든 특수 마법 처리가 된 종이를 꺼냈다.
성국 연극로 생활에서 익숙할 정도로 자주 본 장면들이 있다.
바로, 계약서 쓰기!
“……물론, 제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레서 선공작님이나 레리온 공과도 잘 해 볼 의향이 있어요. 이런 요구가 건방져서 싫으면 지금이라도 거절하시고요. 그럼 다시 죽어 버리면 되니까.”
페녹스의 인상이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화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죽는다’ 소리는 그냥 허세였다.
‘아마 지금 이 상태로 죽으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고.’
몸에 이능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그리고 내가 왜 죽나!
이렇게 멋진 스파이가 죽으면 성국과 세상에 손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기에 자꾸 죽음이나 사라짐을 언급하며 까칠하고 방어적인 척 나갈 수밖에 없다.
언제든 죽어서 사라지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정보를 교란시켜야만 했고.
그리고 이 정도로 깨질 화합이라면, 얼른 다른 방법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
페녹스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 아까 전부터 계속 보였던 장난스러운 태도가 다 꾸며 낸 것이었던 것처럼.
그러던 그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허허허 웃었다.
“동생이랑 같이 앉으니까 좋다, 페리야. 그치?”
난 무시하고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페리안 엑저와 동제국의 엑저 공작가 일동은 다음과 같은 계약을 체결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로 시작하는 흔한 계약서 문구를.
그리고 숫자와 함께 첫 번째 조건을 작성했다.
[제 1조.1. 본 계약서의 내용을 계약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누설하는 것을 금합니다.
2. 페리안 엑저에게는 그동안의 행적이나 발언 등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엑저 공작가 일동은 페리안 엑저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3. 페리안 엑저에게는 레서 엑저와 레리온 엑저의 동의 없는 접근에 대해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신대륙으로 가자고 우겨야 하는데.’
여기서 내가 그 조항을 추가하기 위해 선택한 최강 무적의 전략이 무엇이냐면…….
그때, 페녹스가 내 손을 톡톡 건드리더니 펜을 받아 가서 종이에 뭐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페리안 엑저를 갑, 그 외 나머지 엑저 가문 일동을 이하 을이라고 함.]그리고 멋대로 ‘제 2조’를 쓰더니 그 밑에도 숫자를 적고 항목을 적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기 싸움인가! 연극에서 이런 거 많이 봤다. 좋아, 받아 주마!
그러나 그가 쓴 것은 이런 것이었다.
[4. 을은 갑이 행복하도록 성심성의껏 도울 의무가 있으며 갑이 바라는 요구를 하루에 하나 이상 수용하고 금전적 여력이 허용하는 한 반드시 이루어 주어야 한다.5. 을은 갑에게 매일 일정한 금액을 증여한다.]
“…….”
난 페녹스 손등을 안 아프게 찰싹 때려서 펜을 뺏어 왔다.
내 무적최강의 ‘신대륙 가자고 우기기 계획’이 꼬이는 순간이었다.
‘이거, 의외로 돌려서 공략하는 것보다는 바로 직진하는 것이…….’
나는 은근슬쩍 페녹스의 눈치를 살폈다.
페녹스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뭘 써도 된다는 듯이.
나는 페녹스가 써 놓은 2조 밑에 3조를 쓰고 우물쭈물했다.
“……여행…… 같은…… 음.”
에라 모르겠다. 난 6항을 쓱쓱 썼다.
[6. 을은 갑의 신대륙 항해를 1회 도와줄 의무가 있습니다.]“……우리랑 여행 가고 싶었어, 페리?”
페녹스가 이제 숫제 감격에 질식사하는 게 걱정될 정도의 격양된 얼굴로 물었다.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에라,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계약서 쓰기니 뭐니를 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도 심적인 부담이 가득했다. 벌써 잔뜩 지쳐 있었고.
“이걸로 끝이에요.”
“정말 이 정도만으로도 아버지와 잘 해 볼 수도 있다고?”
“……네. 뭐, 항해에는 선공작님도 레리온 공도 같이 가도 돼요.”
사실 용을 상대해야 하니까 걔네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심 쓰는 척 허락해 주는 것이었다.
“……길이 4키로짜리 선박은 구할 수가 없을 텐데.”
아까 내가 말한 거리 유지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배 안에서는 그렇게 멀리 있을 필요 없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멍청아.
내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오히려 페녹스는 감동한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자비롭다면서.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페녹스가 밑에 또 특약 사항을 적었다. 그리고 나온 글귀는 내 예상외의 글이었다.
[죽는다는 말 하지 않기.]그리고 페녹스가 일어나서 내 의자 뒤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의자째로 날 껴안았다.
“무얼 원하든 간에 다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오빠가 딱 하나 부탁하자. 응? 죽는다는 말은 하지 않기.”
“놔 봐요!”
“그 소리만큼은 하지 않기야. 오빠랑 아빠가 다 잘못했으니까…….”
페녹스가 날 토닥거렸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판데르니안이 심드렁한 태도와 반짝거리는 보석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