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03)
레서는 아들들이 없을 때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할 때 손을 떨었다. 남들이 엿봤다면 알코올 중독자라 생각할 모습이었다.
***
레서와 레리온이,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는 거리로 페녹스의 뒤를 따라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들은 질식해 죽어 버렸을 테니까. 페리안이 고파서.
사 키로는 그 둘의 시력으로도 잘 보이지 않을 거리였다.
그나마 형체만 언뜻 보이는데, 심지어 페녹스는 그 각도에서 훔쳐보지 못하게 일부러 제 몸으로 가려지는 각도로 서기까지 했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몸은 페녹스가 다 가리고.
그 와중에 멀리서도 그 아이의 머리카락만큼은 눈에 띄었다.
정말 그 검은 머리를 두 눈으로 다시 보고 나니, 가슴이 홧홧했다.
누가 제 머리를 잡고 이대로 죽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가짜 공녀가 왔던 과거.
그때 레서는 딸인 줄 알았던 그 여자를 보며, 이제 머리색 따위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혈육이란 것은 어쩌면 별 볼 일 없는 굴레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가족 그 자체였고, 레서는 페리안이 심지어 앨리스의 자식이 아니라 해도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가 누구의 친딸이고 아닌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제 인생에 아기 페리안이 씩씩하게 왔다 갔다는 것이었고, 되돌아보니 머리카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뿐.
그러나…….
까만 페리안의 머리카락을 보고, 레서는 돌아가는 길에 계속 눈가를 쓸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눈물을 못 본 척했다. 정말 척해 준 것인지, 본인도 정황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태도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불안해한 적이 없다. 우리의 딸이란 이야기는 진짜였으니까.
머저리 천치였던 자신은 이제 무엇을 누구에게 갚아야 한단 말인가.
앨리스의 편도 제대로 들어 주지 못했었는데.
끝내 그날 잠자리에 들 때는 늑골이 부러질 때까지 제 가슴을 때려야 했다. 안쪽에서 뼈가 살을 찌르고 핏물이 튀어도 소리 없이 펑펑 내리쳤다.
그걸 내가 버렸지 뭐야.
그러고 나니 또 다른 것들이 생각났다.
페녹스와 레리온보다 먼저였다. 딸을 재회한 것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딸의 시녀가 되어 주게.’
잘 살고 있던 애를 납치했던 것이 자신 아니었나.
그 독한 약을 연거푸 마시게 하고, 애 뒷배가 아무것도 없단 걸 알고 농락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고서 그 애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딸아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인간 말종도 될 수 있다고.
어떻게 이런 쓰레기가 있을 수 있을까!
페리안이 계속 거절했던 것이 떠올랐다.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그 어린 것이. 그 연약한 것이.
저를 흉내 낸 미친 것의 수발을 들라고 강요하는 아비 앞에서, 얼마나 속이 탔을까.
레서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 바깥에서는 성녀 페리안이 공식적으로 성녀직을 수여받는다는 소식에 소란이었다.
사람들은 머저리 같은 자신과는 달리, 사랑해야 할 것을 바로 사랑할 줄 아는 것 같았다.
페리안의 모든 것이 세상에 이슈고 화제였다. 그 애의 이름을 딴 물건들이 성국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지고, 얼굴 사진이 붙은 물건이 원가의 몇십 배로 폭리를 붙여서 팔리는데도 수량이 없다 했다.
그러니까 페리안의 가치를 몰라본 것은 제 오빠와 아빠뿐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축제 분위기였는데, 레서의 인생은 구름 대신 거머리가 낀 것처럼 어둡고 불행했다.
레서는 멍하니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헌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옛 충신이었던 림로드 자작이 노크를 하고 물건을 전해다 주었다.
분명 일주일 뒤에 있다던 성녀 즉위식이 어제 열렸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딸 생각만 하니 벌어진 일이었다.
원통스러운 일이었다. 딸의 중요한 행사도 한 번 못 가 보고.
애 학교 입학도 졸업도, 그 어떤 인생에도 얼굴 한 번 못 비추는구나.
“그래. 즉위식은…… 잘 끝났던가?”
“송구하지만 비공개로 진행되어…… 본식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퍼레이드에서 뵙기론 무탈하고 건강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충신이 나간 뒤.
림로드 자작이 쥐여 준 물건이 레서의 손안에서 반짝였다.
부하는 일부러 성녀님의 얼굴이 담긴 상품은 가져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자극적인 물건은 레서나 레리온에게 내상을 입힐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림로드가 가져온 것은 곰돌이 티스푼 세트였다.
정말, 성녀와는 하등 관계도 없으면서 팔아먹으려고 ‘성녀 상품’이라는 타이틀을 아무 데나 갖다 붙인 그런 물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레서에겐 충분했다. 레서는 그 티스푼 하나를 붙잡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어찌나 서럽고 큰 눈물방울이었는지, 티스푼이 눈물로 꽉 찼다.
아무 상품에나 ‘성녀’를 갖다 붙이는 것이 멜로의 상술이었고,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딸과 연관 지어 보는 것은 아버지의 시각이었다.
작은 티스푼을 보면 애기한테 이유식을 먹일 때가 생각이 난다.
세모나게 부리처럼 튀어나와 이유식을 밀어내던 입술까지.
그럼 레서는 수저라도 귀엽게 생긴 걸 쥐여 주곤 했었다.
이유식이 맛없어 포악해진 아기 공녀님은 그 어떤 귀여운 수저라도 꼭 한 번씩은 밀어서 떨어뜨렸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그때도 곰 계열의 동물 수저를 몇 번씩 사용했던 적이 있다.
하늘의 구름을 봐도 페리안 생각이 나고, 흙을 보면 그때 믿어 주지 못한 자신이 생각나 가슴이 미어진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죽은 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있기도 했다.
당신은 항상 나보다 더 똑똑하지 않았나.
앨리스, 보고 있다면 답을 줘.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적막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레서가 도착한 것은 딸아이들의 몸이 있는 곳이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관 안에 누워 있는 두 개의 몸.
“…….”
페리는 그 두 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회수도 잠정적으로 미루고 있단 것을 페녹스에게 전해 들었다.
아마 여러 몸으로 나타날 수 있는 만큼, 몸 하나하나에 대한 각별함은 그만큼 줄어드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건 레서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페리가 이 몸을 회수해 가지 않았다는 것은, 레서가 합법적으로 딸아이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레서는 한참 동안이나 두 페리의 뺨을 번갈아 쓸었다.
그리고 마치 이 모습이 미친 사람 같다 자조하며 웃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미쳐 있는 자신이 생각해 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분수에 맞지 않게 행복한 상황이란 말인가.
다 큰 아이와, 그 시절 그 아기의 모습 사이에서 혼자 위안을 느끼는 모습이라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신이 지금 이렇게 팔자 좋게 딸 사이에서 위안받고 있다니.
그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졌다. 갑자기 자신에게 치밀어 오른 역겨움 때문이었다.
딸을 죽음으로 내몰아 놓고 그 잔해 사이에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레서는 마지막으로 아기를 안아 주었다.
이것이 아가를 보러 오는 마지막이라고 맹세하면서.
***
그리고 그날 밤.
엑저가 보관하고 있던 페리안의 몸 두체 중 성인인 쪽이 살짝 빛났다.
그리고 아기가 하품하는 소리가 한 번 작게 들렸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변화였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