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
저 사내와 내 동선이 처음으로 겹친 것은 바로 일주일 전의 일이다.
양조장 술 찌꺼기 사건!
아, 사건명도 굉장히 하찮다. 하여튼 그 하찮은 사건 이후 일주일째였다. 페녹스가 내 근처에서 얼쩡거리기 시작한 것이!
페녹스는 심하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첫날은 아주 멀리서, 둘째 날은 조금 더 가까이, 셋째 날은 그보다 더 가까이.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진짜 나에게 말이라도 걸 모양인가 보다.
‘술 냄새…….’
저벅저벅. 뒤에서 술 냄새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멈췄는데도 페녹스는 계속 날 향해 걸어왔다.
당연히 사이가 천천히 좁혀진다. 스무 걸음, 열 걸음, 다섯 걸음, 그리고 마지막 한 보.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술 취한 채 돌아다니는 양반이라니.’
고개를 돌려 위를 보자, 가까이에서 날 내려다보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
“…….”
“페녹스 님.”
“응?”
“……할 말 있으신가요?”
페녹스는 한참 조용히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니.”
“에휴!”
난 저쪽 들으라고 한숨을 크게 쉬고, 주머니에서 돗자리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 있는 장신의 술주정뱅이를 그 위에 앉혔다.
앉으란답시고 주섬주섬 앉는 꼴을 보니 속이 터지네.
앉으란답시고 주섬주섬 앉는 꼴을 보니 속이 터지네.
내 대지를 다루는 능력은 섭리를 거스르는 초월적인 힘이지만, 작동 방식상 어쩔 수 없는 한계 또한 존재한다.
변신 마법이나 감시 마법이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겐 바로 들키듯.
내 힘의 작용도 눈치챌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신체의 한계를 넘고, 또 넘은 초인들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초인들은 강철을 슬라임처럼 주무르고, 백 미터 바깥의 사람이 한숨 쉬는 소리를 듣고, 삽으로 동산을 가르는 존재들이다.
물론 그들도 개인마다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그만큼 오감이 발달한 괴물들이란 말이다.
그래서 내 흙사람들은 초인들 앞에서 기운을 못 펼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들은 자기 뒤에서 흙 두 개가 조용히 움직이는 걸 절대 눈치채지 못할 테지.
그러나 페녹스 같은 인간들은 다르다.
시끄러운 주점 안에서 위아래로 쌓아 올린 흙 알갱이 두 개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어도 그걸 눈치챌 수 있는 괴물이니까.
그러니 이 녀석이 날 계속 따라오면…….
‘내 힘 절반에 제약이 생기는 셈이라고!’
“페녹스 님. 혹시 제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
“자는 척하지 마시고요!”
난 눈 감으면 자는 거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주정뱅이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네가 두 살짜리 애기냐!
물론 나는 페녹스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지.
하지만 이 일주일간 페녹스의 태도를 보고 웬만한 무례는 상관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왜 자꾸 절 따라오세요?”
“구경하려고 그러지.”
“제가 동생분 닮아서 이러시는 거죠?”
잠깐 주변을 살핀 뒤 대답이 없어 돌아보니, 페녹스는 이미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고 태평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기껏 돗자리 깔아 줬더니 상체랑 다리 다 풀밭에 나왔다.
좀 이따 일으켜 세웠을 때 이 인간 상의랑 하의에 풀물이 잔뜩 들어 있을 것이 벌써 훤히 보이는 듯했다.
“페리안 님한테 가시면 되잖아요. 오빠가 여동생 찾아가는데 누가 뭐라 하지도 않을 테고.”
사실 그동안 이 술주정뱅이가 따라다니도록 내버려 둔 것은, 혹시 이놈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있을까 봐 그랬던 거였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이놈은 그냥 멋대로 내 얼굴이나 관찰하기만 할 뿐이고.
페녹스는 가끔 기행을 부리며 내가 공작가 사용인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막아 주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기회가 더 절실했다.
그런데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평소에 보이던 느물느물하고 우울한 낯이 아니었다. 발음도 평소와는 달리 또렷했다.
“못 가.”
“왜 못 가요. 페리안 님이 술 냄새 싫대요?”
“양심이 있으면 가면 안 되지.”
평소의 그 주정뱅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서늘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페녹스는 다시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표정도 펴지고, 입매도 풀어진다. 그리고 계속 중얼거렸다. ‘안 되는 거지, 암.’ 그렇게.
‘……답이 없군.’
“난 만만한 너나 구경해야지.”
“만만해서 참 영광이네요.”
***
엑저 공작성 제5 수련장.
한 여자가 구석에 서 있었다. 수많은 기사가 검술 연마에 매진하고 있는 주변 모습과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살랑거리는 분홍색 단발에 채도 높은 분홍 눈동자.
드문 색 조합만으로도 어딜 가도 눈에 띌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누가 봐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 귀여운 미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잊곤 했다. 그녀, 옐베리가 오직 순수한 검술 실력으로 공녀의 시녀 및 공녀 산하 기사단 관리 보좌에 오른 강자라는 사실을.
옐베리는 한 층 밑에서 걷고 있는 동료의 기척을 눈치채자마자 그녀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련장 밑 복도를 걷고 있던 공녀의 시녀, 루시안 이스텔베르가 생글거리며 다가오는 옐베리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 안 그래도 물어볼 거 있었는데.”
“무슨 일이에요?”
“루시안은 새로 온 그 시녀 얼굴 봤지?”
“그렇죠. 입성 첫날에 제가 안내했으니까요.”
“그 애가 그렇게나 공녀님을 닮았어?”
“…….”
루시안이 잠시 답을 망설였다.
검사들은 무정한 성정을 가졌다는 편견과 달리, 사실 옐베리는 외관만큼이나 순하고 착한 동료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단점이 하나 있었다면…….
“……페녹스 경이 그렇게 따라다닐 정도로 닮았다고 들었단 말이야. 그럼 나도 그 애 얼굴 보면서 힐링하고 싶어.”
공녀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팬이라는 사실.
루시안은 분홍색으로 물든 옐베리의 뺨을 보면서 속으로 고민하다 대답했다.
“……닮긴 닮았어요.”
“와! 진짜? 너무 좋아라!”
옐베리는 루시안에게 달려들어 포옹했다.
***
“……너, 정말. 정말 사랑스럽게 생겼구나……! 천사 같아!”
“예?”
나는 잠깐 고민했다. 이게 시비를 거는 걸까? 이 사람이 왜 왔지?
물론 말에 담긴 내용 자체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진짜 사랑스러움의 화신같이 생긴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의심부터 하게 되는 법이다.
“옐베리 양이신가요?”
“아, 응. 반말해도 돼. 기본적으로 시녀 사이는 서로 동등하여 말을 놓는 것이 권장되는……. 어쩜! 피부도 너무 고와.”
‘왠지 몰라도 진심인 것 같은데.’
발그레하게 붉어진 뺨이며, 내 얼굴에서 눈을 못 떼는 모습 하며.
“음. 고마워.”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상대는 내가 ‘고마워’라고 한 게 감격인 듯, 입을 틀어막았다.
“저기, 브라운 양. 공식적으로 맡은 일은 없다고 들었는데 혹시 오늘은 나랑 같이 놀래?”
“응? 그러지 뭐.”
수락하자마자 옐베리는 내가 집이라도 사준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조잘조잘 떠들며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시녀란 것은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인재를 붙여 주려는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첫 번째는, 귀족 가문에서 고르고 골라 적합한 여식을 어릴 때부터 시녀로 내정하는 것.
그건 저번에 입성 첫날에 날 접견실로 안내했던 루시안 같은 경우다.
이 경우는 보통 가문과 가문의 정치적 결합을 의미한다.
동맹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음 세대에서도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붙여 놓은 두 아이는 친구처럼 지내며 같이 배우고 자란다.
그리고 성장한 후에는 가문의 중요 사업도 맡길 수 있는 보좌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훌륭한 인재를 시녀로 삼고 후원하며 충성을 약속받는 경우.
시녀란 것은 정말 명예로운 자리다.
그러니 그 귀한 자리를 보장하며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이 경우는 제각각 나라에 이름 날리는 천재들이 많았다.
가문 같은 선천적인 특혜를 배제하고 결정하는 만큼, 더 까다롭게 사람을 평가하여 고르니까.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바로 이 옐베리다.
지금 본인 개인 식사실에 날 끌고 와 아이스크림을 골라 주는…….
옐베리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무슨 맛 먹고 싶어?”
“너는 평소에 뭐 좋아하는데? 그거 먹을게.”
“……헉!”
방금 내 말 어디에서 감격할 구석이 있었던 걸까.
근데 아이스크림은 맛있긴 했다.
옐베리는 아이스크림도 양조실처럼 마법으로 제조하는 작업실이 있다고 내게 알려 주었다.
‘나중엔 거기 가서 일해 보고 싶다.’
난 슬쩍 옐베리의 눈치를 살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육신에서 티가 나기 마련이다.
말을 할 때의 시선 처리, 맥박, 호흡의 간격까지.
장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옐베리는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로 나를 소중한 것 보듯이 구경했다.
뭐, 이유는 뻔하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과 닮아서.
그래, 바로 가짜 페리안 공녀를 닮았단 이유로.
‘공녀를 굉장히 좋아한단 건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대하거나 같이 놀 수 없는 공녀 대신, 공녀를 연상시키는 내게 호의를 베푸는 것.
어떻게 보면 날 대체재처럼 취급하는 셈이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그동안 공작성 고용인들과 꽤 많이 친해졌다.
하지만 그들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들 보란 듯이 날 챙겨 주진 않는다.
물론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서운할 일도 아니고.
내 신분과 입지는 애매하고, 난 공녀에게 일을 받지 못한 시녀일 뿐이다.
그런 날 챙겨 주는 모습은 건방지다고 욕먹을 수도 있는 일인지라.
물론 옐베리처럼 높은 위치에 있으면 남들 시선에 크게 구애되진 않지.
그래도 먼저 다가와서 호감 있다는 신호를 보내 주는 거니까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옐베리가 이렇게 공녀를 좋아하는 건 이상한데.’
좋아하긴커녕 조금의 반감을 품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뭐, 일단은 주는 거나 열심히 받아먹자.
나는 옐베리랑 이것저것 사소한 잡담을 계속하며 수다를 떨었다.
처음에 공작성에서 고생했다는 하소연부터, 최근엔 페녹스 경이 날 따라다니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옐베리가 꺼내는 화제는 주로 공녀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풀면 안 되는 정보를 푸는 게 아니고, ‘공녀님은 분홍색 옷이 귀여우셔.’ 같은 내용이었지만.
의외로 옐베리는 자기가 공녀 팬이라는 사실을 감추지도 않았다.
대화는 끊길 새가 없었다.
저쪽은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집중해서 들어 주고 정성을 다해 맞장구쳐 줬으니.
그리고 나도 말을 못 해서 우물쭈물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사실 뭣보다, 대화가 잘 맞았다.
옐베리는 울상을 지으며 내 건강을 걱정했다.
“양조실 주조량이 어마어마할 텐데. 몸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 내 업무 돕는다는 명목으로 내 쪽으로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에이, 괜찮아. 나도 꽤 튼튼해. 나 아카데미 서제국에서 졸업했는데 무슨 학과였는 줄 알아?”
“천사 과?”
“……기사학과 나왔어!”
“꺅! 대단해!”
이건 진짜였다. 꾸며낸 이력도 아니었고.
원래 이 신분 자체가 서제국에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만들었던 신분이었으니.
‘사실, 이 신분에 본얼굴과 페리란 이름을 쓴 것도 학교 때문이었지.’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사용했던 다른 신분들은 ‘페리안’ 공녀를 연상시킬 부분이 조금도 없다.
난 언제나 항상 남의 신분과 남의 얼굴로 살아야 했다.
67살 남, 40살 여, 35살 남, 21살 남 등.
근데 멜로와 폐하는 그게 안타까웠나 보다.
서제국과 동제국은 냉전 중이고, 모든 증거를 지웠으니 서제국에서 아카데미를 다닐 땐 본얼굴로 다녀도 될 거라면서 페리 이름을 쓰길 바랐던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 본얼굴로 살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그게 내가 이 신분에 허술하게 본명과 흡사한 이름을 쓴 이유였다.
옐베리는 한참이나 나를 멋지다고 치켜세웠다.
본인은 현직 기사들을 통솔하는 위치면서, 고작 기사학과 나왔다는 나를. 머쓱하군.
그러다 화제가 뜬금없는 곳으로 튀었다.
“그럼 페녹스 경에게 검 가르쳐 달라고 해 보는 건 어때? 페녹스 경에게 지도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력이니까. 이왕이면 일없이 따라다니는 그분을 이용하자.”
“으으음. 그건 좀…….”
배우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거 해 달라고 했다간 불경죄로 잡혀갈 것 같은데.
나는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페녹스 경은 부담스러워.”
말을 뱉은 직후, 나는 소름 돋아 비명을 질렀다.
어디에선가 들어와 우울한 낯짝으로 우리 수다를 구경하던 페녹스가 있었기 때문에.
“꽥!”
“…”
깜짝이야! 이 인간이,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나는 파드득 기겁하며 테이블을 건드렸다. 식기가 요동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옐베리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포크며 그릇이며 떨어지던 것들을 완벽하게 잡아냈다.
하지만 그걸 보고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식탁 저 멀리 앉아 있던 페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용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