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0)
그러니 지금 당장은 만나 주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테다. 심리적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질 테니까.
하지만…….
저 부자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
쟤네는 마주하기 무서운 문제를 계속 회피했다는 것이고,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먼저 가서 참견한다는 점이다.
지금으로선 무시하는 게 더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는 거라 해도, 그렇게 덮고 넘어가진 않을 거야.
최강 스파이 출격이다!
난 페녹스의 종아리를 툭 차고 출발했다.
페녹스가 활짝 웃었다.
***
탑의 메인 홀.
딸을 보낸 아버지의 모습은 세상에서 다시 없을 만큼 초라했다.
레서가 힘없이 계단을 내려와, 메인 홀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사각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곳. 기둥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타난 상대의 얼굴을 보자 레서는 모든 경계를 내려놓았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가 거기에 서 있었다.
모질게 욕을 하러 온 것일까.
레서는 사실 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같이 지내 본 세월이 없으니 당연하다.
어떻게 컸는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이럴 때엔 아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 텐데.
그러나 페리가 한 발짝 더 빨랐다.
기둥에 자연스럽게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고 아빠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적개심이 보이거나 방어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페리가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다시 가족이라든가 하는 게 아니에요.”
“…….”
레서가 말을 맺지 못하자, 페리는 바로 발언권을 빼앗아 왔다.
“용서하겠단 식의 말도 안 할 거예요. 애초에 해야 할 사람도 내가 아니니까.”
사랑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건과 그로 인한 오해만 아니었더라도 단란하게 살 수 있는 가족이었단 사실도.
악의를 가지고 내버려 둔 것도 아니었고,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그들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까지.
페리는 냉정한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돌아볼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그러니 결정했다.
“이제 와서 평범한 부녀 사이는 될 수 없어요.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레서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차마 딸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귓가에 들린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차마 바랄 수도 없었던.
“……그래도 화해는 해 드릴게요.”
아버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빠랑 딸의 입장으로 화해하자는 거 아니에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얘기예요.”
이제 와서 그 세월의 차를 어떻게 극복하랴.
그러니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냥 평범히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남 정도로 돌아가자고.
나는 미련도 증오도 다 버렸으니까, 그쪽도 과거에서 걸어 나오라고.
그렇게 새로이 시작한다 해서 가족의 정이 움트거나 하는 극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언젠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어쩌면 꽤 제법 친해질 수도 있는. 딱 그 정도의.
페리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나 합시다.”
레서는 한 손으로 악수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눈가를 짚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
둘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두 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했다.
두서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이웃집 아저씨랑도 나눌 수 있을 만한 잡담을.
중요한 이야기는 둘 중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에구 졸려.”
그리고 먼저 일어난 것은 페리였다.
페리는 레리온의 위치를 캐물은 뒤, 곧장 방으로 찾아가서 방어하지 않는 사람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특별히 차별하려는 것은 아니고, 레서와의 만남만으로도 기운이 빠져서 레리온을 챙겨 줄 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레리온은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고 목에 잠긴 한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이십 년 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