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1)
어쩌다 구원했지만, 책임은 안 집니다 16화(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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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지상으로부터 약 이백 미터 아래.
난 지금 오래간만에 땅 깊은 곳에 묻혀 있다.
‘나 걔네랑 대충 얘기했어!’
‘대충이 뭔데.’
‘나 오늘은 외박한다!’
‘뭔데.’
멜로한테도 대충 얘기하고 나온 지금.
……너무 대충이 아닌가 싶지만, 인생은 원래 쉽게 살아야 편한 법!
오늘의 나는 대충 최강 스파이다!
아니다. 어감이 이상하다. 안 할래.
나는 손깍지를 베개 삼아서 지상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누웠다.
사실 나도 레서와의 만남에 온 기운을 다 쏟은 상황이었다.
지금은 기력이 쭉 빨려 나간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래서 쉬기 위해서 땅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온 것이다.
‘이게 얼마 만이야.’
땅에서 쉬는 것은 힘을 빼앗긴 이후로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사실 아직도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어쨌든.
난 이 지역에서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다시 떠올려 봤다. 음…….
삼신기의 마지막인 신상을 찾기 위해, 본체를 찾으러 탑에 온 나.
‘다른 두 아티팩트들과는 흡수 반응도 달랐지만, 어쨌든 신상도 결국 나와 하나가 되었고.’
볼 주머니에 내 기운을 홀랑 담아 가질 않나!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다.
‘……하지만 볼에 기운을 저장하는 건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
나는 한번 아기인 나를 따라 해 보려다가 볼만 팅팅 붓고 포기해야 했다.
볼에 상당한 내구성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 듯하다.
‘자. 그럼 이제 문제는…….’
너무 많다.
첫째. 마지막 삼신기인 내 본체까지 흡수했는데도 기운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나머지 기운은 신대륙에 가면 되찾아 올 수 있을까?
둘째. 그 와중에 용은 뭔데?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일부러 묻어 두고 있었던 속내를 떠올렸다.
삼신기 하나하나를 흡수할 때마다 힘을 잃던 나.
설마 내가 마물에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아동용 연극이었으면 우여곡절 끝에 내가 대충 신인 걸로 끝날 텐데.’
……아니다.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얼얼한 볼을 만지며 눈을 꾸욱 감았다.
땅의 압력이 내 몸을 사방에서 꾹꾹 조여 오는 것이 딱 기분 좋고, 지하 열기가 뜨끈뜨끈한 것은 찜질방에 온 것 같아서 좋고.
난 그렇게 계속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답도 없이 복잡한 상황인데, 왠지 그렇게 나쁜 것만 같지도 않았다.
새 공작질을 시작하기 바로 전날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들뜬 마음에 힝힝 하고 웃고 땅 속을 굴러다니는데,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레서가 납치해 와서 약을 먹인 것이 시작이었지.’
내 사칭범한테 얻어맞질 않나, 공작성 전체한테 무시당하질 않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다사다난한 임무였어!
당시엔 마음고생은 안 한 줄 알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도 기력이 쭉쭉 빠졌던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 털어 버리기로 했다.
사실 털어 버릴 것까지도 없었다. 앙금까지는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홀가분했다. 등에 메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
아무래도 역시 새로 시작하기로 해서 그런 걸까?
난 지금 내가 편하듯, 오늘만큼은 레서나 레리온도 편안하게 침대에서 뒹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모두 행복한 날이기를.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은 결국 나 자신을 지치게 하더라.
가만 생각해 보면, 인생은 생각 없이 사는 게 최고인 것 같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원망도 미움도 없이…….
그래. 설령 내가 마물이라도 뭐 어때?
인간 최강 스파이에서 마물 최강 스파이로 바뀌는 거지, 뭐!
나는 기지개를 쭈욱 켰다.
엑저 가문과의 사이는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이제 나한텐 버려도 되는 신분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인증된 신분까지 짊어진 상태인데도 그랬다.
심지어 지금은 엑저 쪽 정신 건강 상태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직 걔네는 완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아 보이지만.’
내가 극복한 것처럼 그들도 언젠가는 각자의 상처를 이겨내는 날이 오겠지.
‘지금 이렇게 나한테 매달리는 것은 건강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지금이야 내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굴고는 있지만, 자기 삶의 주인공은 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제대로 된 꼴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그놈들도 과거를 극복해 냈다는 사실에 축하를 해 줘야겠다.
그때까진 한 번씩 만나 줄 수도 있었다. 중독자들한테 치료 목적으로 약물 사용을 허가해 주듯!
난 너무 착한 것 같아. 에헴.
새삼 나 자신이 너무 멋지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나 멋지다!
엄청 대단해.
그 와중, 신나서 나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 주는데 실수로 작은 지진을 일으킬 뻔했다.
에구 깜짝이야.
주섬주섬 근방의 지각 상태를 다시 다 점검하고 드러눕자, 노곤노곤해서 그런지 자꾸만 잠이 온다.
그래. 오늘은 침대 말고 여기서 자자.
내일은 오늘보다 더 괜찮은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나는 눈을 감았다.
***
페리가 기운 회복을 위해 땅에서 잠든 시각.
판데르니안은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지진인가.’
미약하게 땅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지진에게서 금방 신경을 껐다. 그보다는 페리안 공녀가 더 중요했으니까.
살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말로 죽은 줄 알았었다. 투신의 흔적까지 두 눈으로 다 확인했으니까.
이번에도, 어린 시절처럼 자신 따위가 쫓아갈 시간도 주지 않고 먼저 죽어 버린 것이라고.
추락의 현장을 보며 그때 얼마나 후회했던가.
그런데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페리 앞에서는 ‘기다릴 수 있다’ 소리를 했던 본인이 답지 않게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
얼핏 보면 그는 일련의 과정에서 배제된 것 같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모든 일에 관여해 있었다.
탑 철거를 두고 대립하는 부자 사이를 중재하는 것부터, 철거 소식에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집단들을 상대로 외교까지.
그가 보기에 지금 이곳에 몰려든 사람들은 연회 소식에 마구잡이로 쳐들어온 거지 떼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가 느낀 대로 대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엑저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적당히 상대할 필요가 있었다.
페녹스나 레서, 레리온이 막내라는 역린을 두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동안 그 뒷수습은 그가 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셋이 그렇게 제 맘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공작인 판데르니안이 자기 자리에서 중심을 지키고 있던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 페녹스는 중간중간 판데르니안에게 감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건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것은 맞다.
공녀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노력해야 할 이유도, 가지고 싶을 것도 없어서 남의 뒤처리나 해도 상관없었던 것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방어적이었던 그 모든 태도를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연한 갈색 머리 여자가 떠올랐다.
눈앞에 둔 것도 아닌데 얼마나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눈썹에서 코로 이어지는 라인, 귀여운 콧대, 눈썹의 결, 눈동자가 얼마나 맑은지…….
바로 눈앞에서 봐도 이만큼 또렷하게 기억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녀님이…… 아.’
상상 속 페리의 뒤.
잘생겼어도 성격은 나빠 보이는 금발의 성국 후계자가 나타났다.
성녀와 성국 후계자.
성녀임을 보증한 것도 그 남자고, 다시 가족들 앞에 나타날 때도 그와 함께하고 있지 않았나.
‘둘의 관계는…….’
“…….”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중간에 튀어나온 인물에게 사람을 빼앗기는 것은.
죽음에게서 되찾아 온 줄 알았는데 다른 남자 곁에 있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성국 후계자라도 다를 건 없다.
이제 와서 다른 놈이 끼어들 자리는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혼테인과 혼인했을 당시에도, 아무렇지 않게 불륜하자고 제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가 이번엔 그 남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라면?
청명한 바깥 공기에 와그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라스의 난간이 그의 손아귀 힘에 찌그러지는 소리였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어긋남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당신이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남자랑 행복해진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그 시각.
혼테인은 본인의 침대 위에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표정.
그러나 평온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그의 팔엔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주사 자국이며, 흉터까지.
그 고매하신 혼테인 공이 신경 안정제를 혈관에 직접 주사해야 일상생활이 겨우 가능하단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는 천천히 자기 자신에게 약을 주사했다. 아주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침대의 오른쪽 자리에 누웠다.
침대는 몇 달 전에 새로 이 침실로 옮겨진 물건이었다.
‘안 씻고 잘 거니까 가까이 오지 마요.’
출처는 크루즈 열차의 신혼 방.
그는 절대로 왼쪽 자리엔 눕지 않는다. 주인이 따로 있었으니까.
불 꺼져 어두워진 방 안.
혼테인은 왼쪽을 바라봤다. 눈앞에 아이가 아른거린다. 입술로 소리 내던 어린 시절부터, 아가씨가 된 현재의 모습까지.
죽지 않고 몰래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
그래서 기다림이 지옥 같지만은 않았단다.
근데 페리야.
성국 후계자와는 무슨 사이야?
혼테인의 손이 페리가 자던 위치 그 자리 위에 얹혔다.
손등엔 성한 핏줄이 하나도 없었다.
성녀 상품으로 가득 찬 세상.
성국 수도 연극로.
어린애들이 빵 하나씩을 입에 물고 있었다.
초코 크림이 가득한 별 모양의 빵이었다.
때마침 아이들이 어떤 한 아이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아이가 새 빵을 뜯고 있었기에.
잠시간의 웅성거림 뒤, 탄성이 터져 나왔다.
“5번 나왔다-!”
“그거 비싸!”
“팔자!”
빵의 정체. 그것은…….
[45종의 랜덤 성녀 스티커 증정]‘성녀 빵’이었다!
성국에선 12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하루 하나씩 무료 지급되는 이 빵. 이건 지금 세계에서 돌풍처럼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 그 자체였다.
시장을 잡아먹는 깡패 아이템은 빵뿐만이 아니다.
비슷한 상품으로 성녀 쌀, 성녀 밀가루, 성녀 맥주까지!
그냥 앞에 성녀만 붙이면 희대의 생태 교란종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성녀 맥주 – 동제국 엑저 공작가와의 기술 제휴 협약 성공.]그중 성녀 맥주는 엑저 공작가의 마법 홉 농장에서 생산된 최고급 작물과 마법 양조장의 조합으로 연이은 품절 대란을 일으키며 맥주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었다.
기술 협약 도중, 엑저 공작가 양조장 톰 아저씨가
“우리 시녀님이 날 잊지 않았어!”
……라며 울부짖은 것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 분야의 성녀 상품들이 시장을 잡아먹고 있는 것은 마케팅 덕분만이 아니었다.
물론 공녀가 아기 시절일 적, 내쫓긴 공녀에 대한 신문 기사를 실시간으로 읽던 청년들이 중년이 되고 다이아몬드 지지층으로서 생필품을 사들이는 것도 있었지만…….
“우리 공녀님이 다 해!”
어쨌든, 가장 중요한 심리는 이것이었다.
‘그 엑저 공작가에서 검수하지 않겠어?’
실제로 엑저 공작가의 세 형제 주머니에서 나온 막대한 투자금이 성녀 상품의 품질을 말도 안 되게 상승시켜 놓은 것은 비밀도 아닌 일이다.
신문에서도 대대적으로 그 사실을 광고할 정도였으니.
[레리온 공 왈, ‘우리 페리 상품이다. 기술 혁신 없는 제품은 시장에 나갈 수 없다.’]동일 제품군에서 월등한 품질을 보증하니, 사람들의 선택이 한쪽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성녀 상품이 세상을 지배하려 하고 있는 그때.
성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직 출발도 못 하고 있었다.
***
“또 바다가…….”
이미 신대륙으로 항해하고 있어야 할 이들이 바다 앞에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페리가 울상을 짓자, 판데르니안이 안절부절못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워낙 표정 관리가 완벽한 덕이었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엔 그저 기분만 나빠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출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극악의 기상환경 때문이었다.
항해 준비는 다 되었지만, 도저히 출항할 수 있는 기후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바다가 부글부글 끓고 소형 해양 마물들이 익어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육지 쪽은 그저 잠잠하다.
이상 기후가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바다 위에서만이었다.
마치 그들을 신대륙에 오지 못하게 하려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임시 본부로 돌아가기로 하고.
마차 안.
멜로가 페리와 옐베리, 유리스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동제국 측 앞에선 진중한 척하더니 넷이서만 있으니 또 미친 놀이를 하고 있다. 모망 폐하가 보내 주신 연극단을 관람한 후 이러고 노는 것이다.
“내 이름은 베리!”
“……나는 유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페리!”
그리고 셋이서 합창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구하러 왔다!”
여기서 가만 냅두면 자동적으로 멜로가 악역으로 몰린다.
“그 연극 상영 금지시키기 전에 그만들 좀 해라.”
저 세 깡패들을 빨리 신대륙이든 어디든 치워 버리고 싶은데!
동생과 동생과 몰려다니는 친구란 것은 오빠 입장에서 그야말로 재수 없는 깡패들, 짐승 새끼들 그 자체였다.
아니나 다를까.
페리가 둘을 데리고 멜로 앞에서 까불거리다 도망쳤다. 셋이 꽥꽥거리며 마차에서 튀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누구라도 아름답게 느껴야 할 장면이었으나 멜로에겐 원숭이 셋이 도망가는 뒷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혼자만 남게 되자…….
“…….”
멜로가 방금과는 달리 진중한 얼굴로 고심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페리가 너무 밝은데.’
출항 당일 극심한 이상 기후로 일정을 미루고, 또 다음번에도 미루고…….
그렇게 일정이 연기된 것만 해도 스무여 번.
각 나라에서 온 주요 인사들이 이 지역에 체류하는 기간이 계절 단위로 계산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탑 철거 소식 전까지만 해도 미개발 지역이었던 이곳은 이제 웬만한 나라의 수도보다 발달한 지 오래다.
지역의 영주는 ‘이 영광을 페리안 공녀님께 바치기 위해…….’라며 지역명을 ‘리안’으로 바꿀 정도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도 공녀 사랑 협회의 인물이지 뭔가.
어쨌거나 페리는 이렇게까지 일정이 미뤄지는데도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제대로 얘기를 해 봐야겠어.’
멜로가 그렇게 결심했다.
***
“그게…….”
왜 항해가 미뤄지는 데 초조해하지 않냐고?
멜로의 직접적인 질문에 난 눈을 멀뚱멀뚱 떴다.
“사실은 말이야.”
난 멜로에게 털어놓았다.
오히려 용을 너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것 같지 않냐고.
용. 인간이 아닌 존재.
뭐, 물론 사람들은 그걸 이빨 요정과 똑같은 수준의 미신으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지금 용들이 진짜 있다고 추측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놈들이 나의 능력을 알고 앨리스 님의 죽음부터 계획한 주범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그들이 존재한다 치자.
사악한 음모를 꾸민 정체불명의 악당들이 신대륙에 있다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면 오히려 내 행동은 대책 없는 짓에 가까운 것 아닌가.
저쪽의 능력, 한계, 정체. 그 어떤 것도 모르는데도 그곳으로 모두를 이끌고 가려고 하질 않았나!
힘을 빼앗기고 아무리 경황없던 상황이라 해도, 과거의 내 행동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을 정도였다. 계약서는 무슨!
‘마치 용이 별거 아닌 거라고 세뇌에 걸려 있던 기분이었어…….’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내 힘을 점검했다.
-우르릉
“야, 지진 내지 마!”
“알아.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여진 수준밖에 못 내.”
분명 원래의 힘보다는 약해지긴 했지만, 이 상태로도 문제는 없고.
힘의 일부만 있어도 세계 최강 스파이로 사는 것에 문제는 없다.
그래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모두를 데리고 신대륙에 가는 것이 맞는 일인가 하고.
만약 신대륙에 가더라도, 나 혼자 가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애초에 엑저 모두를 데리고 넘어가려던 거는…….’
힘없는 일반인인 나로서는 저쪽에서 혼자 정보 수집을 할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힘이 다시 돌아왔잖아?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다.
계속 항해가 미뤄지니, 생각할 시간을 버는 기분이라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고.
멜로는 그런 내 넋두리를 천천히 듣다가 딴지를 걸었다.
“네가 기억하는 용의 모습이 어땠는데.”
나는 그 말에 곰곰이 회상을 시작했다.
***
등 뒤에 검은 날개를 달고 있는 이질적인 것이 말했다.
코가 없고, 얼굴형은 검은 동그라미 그 자체인데 기이하게도 얼굴 그 어디에도 음영이 없었다. 딱 봐도 인간이 아닌 생김새였다.
그리고 그것이 말할 때마다 공기가 진동하듯 주변이 웅웅 울렸다.
‘네가 그것이로구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내게, 그것이 그렇게 말했다.
‘건너편에서 네년을 기다리고 있겠다.’
‘…….’
‘하늘 위 높은 곳에서 너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리고 용은 내 등 뒤에다가 손톱을 눌러 가며 무언가를 그렸다.
***
지금 생각하면 ‘저딴 게 용이냐?’ 싶을 정도로 미친 발언이지만…….
‘용 입장에서 인간은 금붕어쯤 되지 않을까?’
성격 괴팍한 인간이 아기 금붕어의 어권을 존중하지 않듯, 그 용도 용들 중에선 괴팍한 놈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멜로가 나 대신 화내 주었다.
“미친 용 새끼!”
“아무튼 그게 끝이야. 용은 높은 곳 어딘가에 살고 있고…… 지금 생각하면 걔가 내 등 뒤에 마법을 건 게 아닌가 싶어. 그 용이 사는 곳은 이상하게 대충 알 것만 같단 말이지. 정작 하나도 아는 게 없는데도.”
하지만 이젠 엑저 애들을 데려갈 필요 없이, 혼자 가는 게 더 안전한 수준이 된 것 아닌가.
“……근데 또 고민이 된단 말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앨리스 님에 관한 일이잖아. 걔네도 이 일을 듣고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
“지금 생각해 보면 판데르니안 공작을 이 일에 설명도 없이 끌어들인 것도 미안한 것 같고. 그 공작이 갔다가 용한테 죽으면 어떡해.”
“너나 생각해. 너나. 그리고 삼신기 말이야…….”
멜로가 내 등짝을 때리려 하는 순간이었다.
“성녀님, 계십니까?”
밖에서 성기사단 단장님이 손님이 방문했다고 알려 주었다.
***
온 것은 페녹스였다. 진짜 할 일 없나 보네.
“왜 왔어요?”
“반말해 줘. 반말.”
이러니까 반말하다가도 마는 거라고.
그런데 페녹스가 오두방정을 떨며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어쩐지 신나 보이는 기색이었다.
“?”
내가 다가가자, 페녹스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약 불이행 손해 배상을 하러 왔어.”
“네?”
내가? 계약을 불이행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난 계약 결혼물 연극을 오백 번도 더 본 몸. 비록 가상 체험이라도 오백 번도 더 넘게 기괴한 계약을 체결해 본 경험자!
그런데 페녹스가 내게 당당히 계약서를 내밀었다.
“네가 매일 우리에게 부탁 하나를 하는 것은 네 의무 사항이었어.”
[4. 을은 갑이 행복하도록 성심성의껏 도울 의무가 있으며 갑이 바라는 요구를 하루에 하나 이상 수용하고 금전적 여력이 허용하는 한 반드시 이루어 주어야 한다.]“이걸 어떻게 그렇게 해석해요?”
“넌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계약을 이행하는 걸 방해한 거야. 혹시나 싶어서 판례도 다 찾아봤어. 넌 못 빠져나가. 이자까지 쳐서 받을 거야.”
뭘 어떻게 이자를 쳐서 받으려고?
페녹스가 내 어깨를 잡고 흐흐흐 웃으면서 문 쪽으로 이끌었다.
“오빠랑 하루 종일 놀자.”
페녹스의 억지를 파훼할 방법을 오백여든한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좋다고 실실대는 꼴을 보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에휴. 찔찔이가 좋다는데 뭐 어쩌냐.
우리는 그냥 거리를 한참 걸었다. 날 보고 너무 좋아서 쓰러지는 일곱 살 꼬마 숙녀를 구한 일 빼고는 특별한 일 없는 나들이였다.
내 얼굴이 붙은 상품을 볼 때마다 페녹스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런데 의외로 사지는 않길래 물어보니 이러더라.
“아. 아까 그 캔은 이미 집에 시안별로 삼십 개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