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4)
그러나…….
‘다시 시작’은 과거의 그 지점에서가 아니고, 지금 현재를 살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레리온과 페리가 남남인!
“페리는……. 자기 자신을 그런 걸로 생각하나 봐.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그 무언가라고.”
그들의 동생은 빛 그 자체였다.
원망이나 욕심은커녕, 정말로 자신들이 ‘페리안’이라는 아픈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던 것이다.
페녹스가 대화 중 슬그머니 계속 레서와 레리온에 대해 언급해도 그랬다.
그냥, ‘잘 될 거야, 파이팅!’이라고 말하듯.
남들도 다 자기처럼 강한 줄 아는 것이다.
그들이 페리안을 잊고 성장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애초에 페리안은 극복해야 할 대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평생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지.
그러나 그들의 막내는 너무 훌륭하게 자라 버린 터라, 그저 일반인의 감성인 오빠 아빠의 마음을 잘 모르는 듯싶었다.
‘괜히 성녀가 아니야…….’
성국의 후계자는 그 대단함을 알아보고 성녀라는 직위를 준 것이리라. 페녹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접근 제한 범위가 사 키로에서 오십 미터로 줄어들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실 그들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막내가 근래 머릿속의 전부이듯, 막내도 가족들을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
아니.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페리는 그 이후 가족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었고, 레리온이나 레서의 근황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제야 레리온과 레서는 ‘이웃집 아저씨’ 정도의 거리감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웃집 아저씨도 마주쳐야 인사를 하지!
페리와 그들은 그냥 남남이었던 것이다. 오로지 계좌에 돈만 보내 주는!
레서는 한탄했다.
‘돈이라도 더 주고 싶은데……!’
그러나 페리는 또 일정량 이상은 받지 않았다.
성녀 상품이 돈이 되니까 많이 받을 필요는 없다면서.
‘그냥 네 용돈으로라도 쓰지…….’
‘아버지, 그만하세요.’
하지만 레서를 말리던 페녹스도 가슴이 찢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페녹스는 예전, 페리가 시녀일 적 자주 수다를 떨던 사이가 아니던가.
페녹스는 술을 마시고, 페리는 빨래를 널고.
그럴 때 가끔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올 적이 있었다.
페리는 오빠 같은 사람과 가재를 잡으며 놀았다고 했다.
‘가재라니…….’
가재 잡는 어린 페리라니. 귀엽긴 귀엽지만, 마음이 찢어지는 것이다.
집게발이 그 여리고 귀여운 손가락을 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쩌려고 그 위험한 놀이를 하고 놀았단 말인가!
시녀 페리 시절에는 아무 생각 없이 듣던 것들이 지금 와서는 아주 고통스럽게 들려왔다.
‘아침에 천 은을 가지고 나가면…… 아. 연극은 팔백 은이거든요. 근데 그 시절 아이스크림은 삼백 은이었어요. 매일 백 은이 부족하니까, 오빠한테 빌렸는데…….’
천 은이라니!
그 작고 아기자기한 숫자를 생각하면…….
‘너무 귀여워!’
매일 지폐 한 장씩을 들고 쭐레쭐레 외출하는 어린애를 생각하면 호흡 곤란이 올 정도였다.
그렇게 페녹스가 행복한 상상을 할 때였다.
“음?”
“왜 그러니?”
“……아니야.”
그제야 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오빠?
그래. 생각해 보면 오빠의 존재가 있었다.
한두 번 얘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공작성에서 레리온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을 때, 페리가 위로해 준 적이 있다.
그때도 페리의 오빠 같은 존재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페녹스의 정신이 순간 깜깜해졌다.
‘큰일 났다.’
페리가 비밀로 하고 싶어 했을 큰 사실을 알아 버린 듯했다.
그는 아직도 풀 죽어 앉아 있는 레리온을 바라봤다. 형님께 말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아버지에게도.
우리 페리의 비밀인데, 왜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사실, 페녹스는 지금 조금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막내와 자신만의 소중한 비밀이 생긴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럼 그 오빠의 정체는?
답은 한 명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녀라는 증인을 선 남자.
가족인 우리와 대면할 때도 동행했던.
‘멜로 왕자랑 잘 안 되니?’
그때 페리가 질색하던 반응 하며!
하지만…….
“…….”
페녹스가 얼굴을 굳혔다.
외롭게 자랐을 페리에게 가족 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좋아해야 할 일이었다.
감사하고, 무릎 꿇고 고마움을 표해도 모자랄 일이다.
그렇지만.
페리는 우리를 오빠라고 생각할까?
어쩌면 페리에게 오빠는 그 사람 하나고,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남남일 뿐 아닌가.
두려움이 발치에서 그를 옭아매는 듯했다.
그때, 페녹스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질척한 감정을 느끼고 나서야.
그가 레리온을 내려다봤다.
동생을 쳐다보는 진청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 눈엔 둘째를 향한 음울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페녹스가 애꿎은 멜로를 부러워하듯, 레리온은 페녹스를 진심으로 질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응?”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응? 아니. 내가 무얼?”
찔린 레리온이 모르는 척했다. 어쩌면 동생에게 느끼는 그 감정을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아냐, 됐어.”
페녹스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떠볼 필요는 있었다.
“성국 왕자랑 페리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페리가 좋다면야. 애초에 우리에게 반대할 권리도 없지 않겠니.”
“맞는 말이긴 해.”
‘모르는 눈치군.’
하기사. 공작성에서 페리와 형님은 친하지 않았었으니.
다행히 형님은 멜로 왕자를 정말 페리의 연인으로만 보는 눈치였다.
그 말은, 그 왕자에게 깽판을 부릴 염려는 없다는 이야기.
근데 퍼뜩 그 사실이 생각났다.
하지만 판데르니안은?
판데르니안이 페리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형인 페녹스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페리에게 미안하듯 셋째에게도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상황이 너무 얽히고 꼬여, 페리에게 다른 연인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질 정도였으니.
그러나, 멜로 왕자가 실은 연인이 아니라면…….
‘판데르니안도, 혼테인도 멜로 왕자와 약속을 잡았다 들었는데.’
“…….”
‘판데르니안 성정에, 약소국 왕자에게 깽판을 부리지 않을 수가……. 그런데 멜로 왕자는……. 건드리면 판데르니안만……!’
“왜 그렇게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니.”
“형님은 몰라도 돼.”
동생들에게 외면받는 첫째가 우울한 얼굴을 하든 말든, 페녹스는 결심했다.
페리의 오빠라는 것이 확실한 일은 아니다. 정말로 그냥 애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페리에게 중요한 사람이란 것은 확실할 거다.
그러니, 내가 도와야 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도우랴! 페리가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서 의기양양하게 과시하는 쓰레기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판데르니안과 혼테인에게서 멜로 왕자를 지켜야 한다!
세계 최강 고결한 기사가 결심했다.
***
갑자기 달려가는 페녹스를 보고 레리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은 언제든 페리안을 보러 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설령 페리가 자신을 용서했더라도, 스스로는 본인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막내 앞에서 보인 한심한 꼴을 생각하면 그대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페리를 흉내 낸 여자와 놀아 주겠답시고, 그런 분위기를 내는 것을 보여 준 것.
아무리 페리가 없는 자리에서였다고는 하나 페리에 대해서 얼굴의 흉을 운운하며 막말했던 것.
그 더러운 여자가 매일같이 페리를 때린 걸 알면서도 방조한 것.
대역이 되라고 강요한 것이나, 혼테인이 손목을 잡고 강제로 끌고 가는 것까지 내버려 뒀었다.
“…….”
그가 자괴감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딴 쓰레기를 고작 뒤통수 한 대 때리고 넘어가다니. 대체 페리는…….
그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났다.
초인급 기사가 어찌나 빨리 달려오는지,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복도에 발자국이 움푹 패였다.
레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레리온 공!”
사파이어 기사단의 부단장인 아서 경이었다.
답지 않게 침착을 잃은 기색이다.
레리온이 말하라고 눈짓하자, 예상외의 답이 돌아왔다.
“신대륙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근데. 그것이…….”
“무슨 일인데.”
“공녀님께서…….”
아서 경이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전보의 내용이 담긴 마법석을 건넸다.
레리온이 마법석을 작동시켰다.
작은 돌멩이가 빛을 내뿜으며 글자를 허공에 띄웠다.
[성녀를 자처하는 자는 마물이니, 대륙을 건너 감히 성녀를 사칭한 죄에 대해 속죄하라.]마법석을 건네면서 부단장은 초조한 마음을 감춰야 했다.
첫 번째 페리안 공녀도 마물 부산물을 사용한 가짜였다.
두 번째 공녀님은 머리카락 색도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생각했지만, 연락 없던 신대륙에서 갑작스레 전보가 날아올 정도면…….
그러나 레리온은 그냥 무심한 얼굴로, 한 손으로 마법석을 쥐어 박살 내 버렸다.
같은 시각.
세상은 성녀가 마물이라는 소식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두 대륙 사이를 연결하는 항로가 생겼다고는 하나, 대륙 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편견만큼이나 멀고 낯설었다.
그런데 그런 그쪽에서 급작스럽게 통보한 것이다.
그 여자는 성녀가 아니라고.
이유도, 근거도 없는 주장이었지만 무시할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소식은 귀족들 사이에서만 퍼지지 않았다.
일부러인지 일반인 사이에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린 것이다.
사람들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물.
그것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다.
물론 마물 부산물과 인체 실험과의 연관성은 극비 사항이고, 민간인들이 일상에서 마물과 접할 일이 자주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마물들은 잊을 만하면 대참극을 벌이는 암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무려 칠백 년 동안이나!
어디 마을을 몰살시키거나, 마물과 접촉한 사람을 녹아내리게 만들 거나.
그런 괴담이나 마찬가지인 이야기들을 실제로 벌이는 것이 마물이지 않던가.
성녀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그 소문은 사람들의 등골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요사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현상들.
그 모든 이상한 현상들이 성녀와 관련 있지 않았던가.
성녀를 흉내 낸 여자가 기이한 마물로 변해 영수에게 공격당하질 않나.
심지어 서제국에선 시체들이 열차에서 쏟아져 내렸었다!
성녀가 어린 시절에 갇혔던 탑엔 시체 같은 인형들이 가득했었고, 성녀가 아저씨 몸에서 튀어나왔다는 증언까지.
의심의 여지가 너무 많은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진짜 공녀는 애기 때 죽은 거고 지금 공녀는 가짜 아녀?”
“또 가짜야?”
그렇게 세상이 혼란에 빠진 사이.
***
판데르니안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마물.’
그라고 해서 마물에 대한 편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오며 봐 온 그 끔찍한 것들을 혐오하면 혐오했지.
다만…….
그는 페리가 마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회담에서 이야기해야 할 쟁점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에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공녀의 출신까지 캐물어야 하게 생겼으니, 원.’
페리안 공녀가 마물이다?
그런 건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다.
인간보다는 마물에 더 가까운 사람이란 것.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판데르니안의 예기가 가진 능력은 치유였다.
과거, 영수의 부리에 페리안 공녀의 가슴이 꿰뚫렸을 때.
그때 죽어 가던 그 육신을 살린 것도 그의 예기 덕분이었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했던 본인은 안다.
그것은 살릴 수 없어야 정상이었을 상처였다.
아무리 예기의 도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페리는 살아났다. 그때부터 이상한 조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판데르니안은 무뚝뚝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섰다.
‘뭐, 상관없지.’
마물이라면 또 어떠한가.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가지고 싶었던 여자다.
그 마음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사람들과 동기화하여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번 공녀도 가짜가 아니냐.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그런 주장이었다.
성국이 활로를 찾기 위해 마물로 사기극을 펼친 게 아니냐는.
‘…….’
슬픈 점은, 내가 마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 문득 엑저 놈들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들을 감시할 수 없었다.
애초에 초인들을 따라다니며 감시할 수도 없지만, 지금은 또 오백 미터라는 한계까지 생긴 마당이라.
하지만 그들이 지금쯤 ‘이 가짜년! 그럴 줄 알았다!’라며 욕한다 하더라도 그건 충격적인 일도, 더 상처받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쯤 성국 왕성에 돌아가 계실 폐하를 떠올리며 울적해졌다.
폐하는 지금 마물을 성국으로 끌어들였다는 책임을 지고 계실 수도 있어.
내가 조금이라도 귀찮아지면 어떡하지.
그래도 폐하는 날 버리실 리가 없다. 주변 외압이 있다고 결정을 번복하거나 하실 분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그분께 조금의 흠이라도 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역사서에 기록될 거 아냐!
모망 성왕 시절에 나타난 성녀가 마물이었다고.
나는 이불을 끌어 올리고 다시 다른 흙사람들로 세상을 바라봤다.
“성국 놈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겠지! 성녀라니.”
“에이, 그래도 저쪽 말을 어떻게 믿어?”
“저쪽에서도 뭔가 아는 게 있으니까 이렇게 대놓고 공표한 거지, 긴가민가했으면 조용히 해결하려 들었겠지.”
“에이…….”
견딜 수 없다.
난 멜로 근처에 놓아둔 흙사람으로 정신을 옮겼다.
***
성기사단 단장님이 보인다.
이때 움직이면 걸리기 때문에 난 꼼짝 않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웬덤 측은 여태껏 아무 말도 없습니다.”
“…….”
멜로는 내가 왔단 걸 눈치챈 듯, 잠깐 눈동자만 이쪽으로 향했다.
“…….”
둘은 오늘 저녁에 무슨 발표를 할지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고, 멜로는 단장님을 내보냈다.
저벅저벅 하는 소리가 아주 작아질 때쯤, 멜로가 날 보지 않고 말했다.
“미안하다. 성녀로 올리지 말 걸 그랬다.”
“아냐. 나도 재밌었는걸.”
신대륙에서 그럴 줄 누가 어떻게 알았으랴.
정말 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안 건지.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얼른 신대륙에 한번 가 보려고…… 나에 대해 뭐라도 알고 있을지 모르니까. 판데르니안 공작이 안 도와주면 나 혼자 어떻게든 무역선에 숨어들어서 가지 뭐.”
신대륙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이 없지만, 저쪽 대륙에도 우리 성국처럼 신을 믿는 나라가 있단 건 유명한 이야기다.
성녀가 아니라고 화내는 걸 보면 저쪽 성국의 짓이겠지.
마물에 대해선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이 없었어도 어차피 그 나라에 가 봐야 했으니, 잘된 셈일지도 모른다.
멜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제야 내 쪽을 바라보고서.
“방금 단장님이랑 한 얘기 어디까지 들었어?”
“별거 못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입장 발표하기로 한 거.”
“그럼 지금 전해 줘야겠네.”
그리고 이어진 멜로의 말은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동제국 황제 대리가 성녀와의 독대를 요청했다.”
“나랑?”
“그쪽도 마물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성녀’라고 언급하면서 널 지목했어.”
동제국 황제 대리.
보통 황제 대리라면 섭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황제 대리는 황제의 따님인 황녀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동제국 황제는 아흔 넘어서까지 정정했지만 근래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일흔이 넘은 공주님께서 ‘황제 대리’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말이 대리이지, 차기 황제. 아니, 그냥 황제나 다름없는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를 왜?
궁금했지만 그것에 대해 멜로와 더 얘기할 힘도 없었다. 너무 시무룩해서인지 힘이 자꾸 빠져서.
내가 흙사람의 몸으로 우물쭈물하니까, 멜로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네가 삼신기와 마주칠 때마다 힘을 빼앗긴 건 사실이지만.”
“…….”
“그렇게 따지면 네 본체도 삼신기였어.”
난 쭈굴쭈굴 쪼그려 앉았다. 안 그래도 손톱보다 작은 흙사람이니 더 처량해 보이겠지.
“……신이 존재한단 소린 하지 않으마. 만약 신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이란 게 마물일지도 모르지. 그럼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도 맞을지도 모르고.”
“…….”
“하지만, 네가 마물이라도…….”
“…….”
“넌 내 동생이야.”
흙사람이 된 내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그리고 난 작은 흙발로 날라차기 하며 외쳤다.
“당연하지!”
멜로의 대신관 복장에 아주 조그마한 발자국이 찍혔다.
내가 씩씩한 걸 보고 멜로가 다시 씨익 웃었다.
나는 흙사람 모습으론 에헴 하고 웃었지만, 이제 새롭게 본체가 된 내 진짜 몸은 글썽거리고 있었다. 이불이 조금 젖었다.
***
한편, 서제국의 웬덤 측에서는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마물 아내를 들인 혼테인 공이 수치스러운 마음에 그러는 것이라 추측했으나, 사실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혼테인은 페리가 마물이었다는 소문을 가속화시켜 그녀를 고립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감정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 그랬다.
그녀에게 미움받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랑하고 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를 만큼.
레서는 이를 악물었다.
앨리스와 자신의 딸이 마물이라니.
그 얘기부터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딸에게 ‘네가 마물이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오십 미터 접근 제한은 항상 조심하며 숙지하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걸 어길 수밖에.
그가 성국의 숙소로 뛰쳐 들어갔다. 성녀가 묵는다는 곳을 향해.
아기 시절 너를 사랑했던 것만큼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고. 온 세상이 마물이라고 너를 욕해도, 이번엔 아비가 너와 같이 할 것이라고. 아비는 네가 마물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냉엄하고 품격 있는 생김새의 사내가 페리안의 이름을 부르며 벌컥 문을 열었다.
물론 다 큰 숙녀에겐 무례라는 것을 알지만, 그 여리고 작은 것이 지금 얼마나 불안한 마음일지 생각하면 도저히 침착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썰렁한 방 안을 둘러보고 당황해하는 레서의 뒤, 복도 저 멀리에서 대신관복을 입은 청년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성녀님은 먼저 가셨습니다.”
“……멜로 공.”
“아버지의 위로를 기다릴 만큼 얌전한 분이 아니라서요.”
멜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그사이, 페리는 동제국 황실에서 준비해 준 수백 개의 마법 이동진을 통해 황궁에 입성한 채였다.
황성이 얼마나 위엄 있고 아름다운지, 페리의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황제 대리다. 절대 쉽게 대할 상대가 아니었고, 상대는 ‘성녀’란 직함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직위에 불과한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현실에서 부복하고 있는 페리 앞에, 한 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흔이 넘은 황제 대리, 황녀님이었다.
“고개를 들 거라.”
그 말에 페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앨리스의 딸아.”
***
이어진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한지, 나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완전히 들고 나니, 그 대단하다는 황제 대리께선 입가를 굳히고 계셔 엄격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