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5)
그렇지만 동제국 황제 대리라면 나의 친어머니를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앨리스 님은 황제의 칠검으로서, 레서 엑저와 혼인하기 전에는 황녀 자매들의 호위를 겸했다고 한다.
‘황녀님들은 그때도 중년이었지만.’
황녀 납치 사건 때, 앨리스 님이 범인들의 수족을 모두 썰어 버린 것도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나는 예법에 맞게 인사를 올리고, 형식적인 치하를 들었다.
“자네의 존재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지.”
여러 모델 활동으로 민생에 즐거움을 더해 준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송구합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 이후로는 정적이었다.
“…….”
흙사람을 사용해서 황제 대리의 표정을 확인하거나 할 수도 없었다.
황녀님 개인에겐 대단한 힘이 있지 않았지만, 호위하는 이들은 내가 조금만 수상한 짓을 보여도 바로 나를 제압할 것이다.
이제 무슨 말을 할까. 신대륙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겠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앨리스는 아주 강한 여자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네?!’ 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 기사를 죽일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어. 여기 곳곳에 숨어 있는 놈들도 다 한때 앨리스의 동료였던 이들이지. 이놈들도 동의할 게다.”
“…….”
난 무례를 무릅쓰고 얼굴을 빼꼼 다시 들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황제 대리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난 그제야 깨달았다.
과거에 동제국 황녀님들을 호위하던 앨리스 님.
그리고 나를 온갖 곳에 데려가셨던 앨리스 님!
그러니 어쩌면, 황제 대리께서도 내 아기 시절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세이비어 님 때처럼 나를 옆구리에 끼고 가서 자랑했을 앨리스 님 모습이 상상되었다.
‘어머니…….’
그리고 그분이 왜 그렇게 분주히 나를 데리고 돌아다니셨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내게 뒷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겠지.
그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아렸다. 그때, 황제 대리께서 다시 입을 여셨다.
“네 어미는 부군에게도 비밀로 하고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
“……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들은 바 있느냐?”
“아니요, 없습니다.”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내 아버지는 그 애에게 극비 명령을 내렸다. 허무맹랑한 명령이었지. 신을 수색하는 것이었다.”
“…….”
네?
내가 뭐라 답하지도 못하고 어버버 하는 와중, 황제 대리는 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은 팔백 년 전에 사라졌다.”
“……예.”
“성녀야. 너는 마물이 언제 최초로 발견되었는지 아느냐?”
“칠백 년 전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칠백 육십구 년 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인간은 마물과 전쟁해 온 것이다.”
……황제 대리의 말을 들으면 마치 신이 사라져서 마물이 나오기 시작했단 것처럼 들린다.
이분 말처럼, 신이 ‘사라졌다’라고 가정하면 그렇게 의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정론은 ‘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팔백 년 전엔 신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뿐이고 말이다.
그런 내 생각이 읽히기라도 한 듯, 황제 대리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성국 사람인데도 믿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나는 꾸벅,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 우리 성국 사람들이 신을 믿으면 얼마나 놀림거리가 되는데요!
신이 정말로 있으면 성국이 어땠을지. 그런 건 우리나라 사람들이야말로 절실하게 꿈꿔 온 희망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만 해도 어땠는가.
성국 사람은 그냥 출신만으로도 비웃음거리였다.
‘쟤 성국 사람이래.’
‘웃긴다.’
그러니까 오히려 내부에서 계속 자정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이른 것이다.
신이 없는 것을 인정하자고.
우리나라의 근본은 그냥 사이비였다고.
하지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제 대리께서는 무엇 때문에 신이 존재했다고 추측하시는 것입니까?”
애초에 중간에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이라고도 부를 수 없지 않나.
그러나 내 물음에 황제 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잉!’
대신 그분은 근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성녀야.”
“예.”
“모녀에게 같은 임무를 주겠노라.”
“네?”
“신의 흔적을 찾아오거라.”
내가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는데, 황제 대리는 아까보다 더 유난히 유쾌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다.”
그리고 황제 대리의 양옆에서, 시종장이 상자 두 개를 공손히 들고 왔다.
황실의 격에 맞게 아주 호화로운 장식이 되어 있는 상자였다.
시종장이 내 앞에 서서,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파아앗!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상자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황실 시종장이면 대단한 귀족일 텐데, 그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했다.
“황실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장 신성한 신목입니다.”
“……이건.”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것은……
……다육이!
나는 시종장을 쳐다봤다. 해명 먼저 해 보세요!
그러나 시종장은 여전히 공손하면서도 정중한 얼굴로 다음 상자를 열었다.
“이것은 서제국의 황제께서 특별히 보낸 성수입니다. 그쪽 황실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성수라 합니다.”
성수? 영수를 말하는 건가?
나는 어째서인지, 그 단어 하나로 확 체감이 되었다. 이게 장난이나 날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든 것이다.
신이 없단 것이 밝혀진 이후로, 세상엔 신성하다는 단어나 성(聖) 자가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영수를 성수로 부를 정도라니.
이 사람들, 진짜 신을 믿나 봐!
그럼 성국이 욕먹을 때 좀 도와주지!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시종장이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이번에도 안쪽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파아앗!
“이것은…….”
난 내 두 눈을 또 의심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햄스터!
물론 평범한 햄스터보다 크기가 두 배는 크고, 털의 결이 곱고 깨끗하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시종장에게 물어야 했다.
“혹시 저를 놀리시는 거 아니지요?”
“아닙니다.”
시종장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
햄스터와 다육이를 받고.
각각 두 제국의 황실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소중한 그걸 받고.
‘거짓말 같은데’
“둘 다 각 제국 황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소중한 보물이니 귀하게 여기도록 하여라.”
“……예.”
“그리고 너를 보고 싶다는 인물이 있다.”
나를 보고 싶다는 인물?
“서제국의 웬덤 공이 너를 기다린다고 전했다. 가서 만나 보거라.”
네?
나는 온갖 미사여구가 잔뜩인 퇴장 인사를 올리고, 황제 대리는 그것을 우아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뒤돌아 나가고 문이 닫히는 와중.
“네 자신을 모두에게 보여 주려무나.”
-쿠웅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조언이 들렸다.
‘네 자신을 모두에게 보여 주려무나’
나는 내심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황제 대리님의 그 소리는 무슨 이야기였을까.
그리고, 신이니 뭐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에 혼란스러운 와중에 혼테인까지 만나야 한다니!
솔직히 거부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테인도 한 번쯤은 다시 만나 봐야 했었고.’
하지만 내 머릿속에선 아까 들었던 신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신의 흔적을 찾아오거라’
사실 아까는 시니컬한 척 계속 부정했지만, 난…….
난 항상 생각했다. 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성국에게 구원받은 아이였으니까 당연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릴 땐 가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신이 나한테 폐하를 보내 주신 거 아닐까?’
그런데 그 대단한 동제국 황제 대리가 신의 존재에 대해 확언을 해 주니, 내심 떨리고 은연중 기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로 신이 있을까. 정말로?
‘어쨌든 지금은 참자.’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고찰…….
그런 건 항상 그랬듯, 멜로한테 떠넘기면 된다.
그럼 틀려도 책임 소재는 걔한테 있으니까! 에헴.
아무튼 지금은 혼테인에게 집중할 때였다.
그는 저번에 본인이 요청한 멜로와의 독대를 위해 동제국 리안 지방의 바로 옆 지역에 머무는 상태였다.
난 동제국 황실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셀 수 없이 많은 마법진을 통과해야 했다.
황실 지하.
이곳에서 몇백 겹의 마법진이 동시에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리고 마법진 가동을 도와주는 모두에게 인사한 후.
-위이이이잉
‘멀미!’
눈을 한 번 감은 순간, 난 다시 탑이 있던 그 지역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
황실 시종장 할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웬덤 측의 사용인들이 성녀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라고.
“…….”
그래서 미리 예상하고 있는 상황이긴 했는데…….
‘왜 이렇게 많아!’
눈을 감고 있는데도, 마법진 근처에서 나를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인기척이 두려울 정도로 많이 느껴졌다. 단순 환대를 위해서 이 인원이 모일 리가…….
어떤 홀대를 받을지, 벌써부터 두려운 그 순간.
정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성녀님을 받듭니다.”
“예?”
그리고 마법진 앞에 도열해 있는 수백 명의 웬덤가 사용인들이 동시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성녀 호칭이라니?
‘동제국 황실이랑 여기가 같은 태도를 취할 리가…….’
설마 여기 사람들도 신을 믿는 거야?!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게 아니더라.
그들은 성국의 신을 믿어서 나를 성녀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비꼬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혼테인의 부인’을 높게 대우하기 위해 성녀 취급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저 이혼했잖아요.’하고 지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대놓고 날 부인 취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냐.’
어쨌든 혼테인이 있는 지역에 왔어도 막상 만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바로 만나 뵈어 주십시오.”
서제국의 한 백작이 내 손을 잡고 글썽거렸다.
웬덤에서 신부 노릇을 할 때 얼굴을 본 적 있는 가신 중 한 명이었다.
“……저 한 시간도 안 쉬었는데요.”
“혼테인 공께서 성녀님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
결국 황당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혼테인과 나의 독대 일정이 잡혔다.
***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그래도, 이젠 남남인데 침실에서 담소를 나누라니요.”
“자애로우신 성녀님, 부탁드립니다. 혼테인 공께서 바깥에 걸음하실 수가 없는 상태십니다…….”
웬덤의 가신들은 말이 안 통했다.
하기사, 당시 혼테인의 계획이나 진심을 알고 있던 이들은 거의 전부가 록사르와 같이 투옥되어 고문받고 있는 실정이었고.
그때 서제국 황제인 알로 폐하가 검을 뽑고 즉위한 뒤,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은 나와 혼테인의 결혼을 무효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남아 있는 가신들은 나와 혼테인이 ‘황제의 억지로 인해 강제로 헤어진 불우한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침 흙사람이 이런 얘기를 전해다 주었다.
아까 도열해 있던 하녀 두 명의 대화였다.
‘불쌍한 두 분. 황제의 견제 때문에 신혼생활 하루 누리지 못하고…….’
‘그뿐만 아니라 추락사까지…… 아휴. 두 분 다 행복해지셨으면……’
그리고 다들 이 둘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성인 데다 손님인 나를 침실에서 독대해 달라 하면서도, 죄책감은커녕 나를 배려해 주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부부끼리 해후를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
‘그거 아니라구요!’
속으로 답답해서 가슴을 쳤지만, 뭐.
독대 장소만 침실일 뿐이지, 혼테인이 날 강제로 붙잡고 뭘 하지는 않을 테니…….
난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그보다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알겠어요.”
그리고, 나는 혼테인의 침실 앞에서 심호흡했다.
혼테인에게도 여기는 임시 숙소일 뿐인데, 문에 보석과 마법 염료로 마법진이 몇 개씩이나 그려져 있다.
재력 과시도 아니고. 난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여기에 새겨진 마법진들 중, 나도 그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치료용 마법진이었다.
‘그렇게 아픈가……?’
당연히 엄살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육중한 문이 저 스스로 열렸다.
***
사방이 온통 조각된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는 방. 그 안에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서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수척해진 낯으로 침대 머리맡 부근 벽에 기대어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한순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항상 웃음기 가득하던 오만하고 수려한 얼굴에 물기가 확 올라온 거다.
‘내가 추락사했던 게 그렇게 상처가 된 거야?’
하지만 쟨 방금 본인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도 모를 거다.
혼테인은 순식간에 감정을 추스렀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
그러나 그의 입가가 살짝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신경질적인 것 같아.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그보다.
‘저게 뭐야!’
난 조그마한 약병들의 행렬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혼테인의 침대 옆엔 서류장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통 대리석을 깎아 조각해 만든 그 서류장 위에 검지 하나만 한 크기의 약병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난 순간 그게 무슨 약이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입이 열림과 동시에, 그래선 안 된단 생각이 들어 입안으로 삼켰다.
물으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약병 입구가 주사기로 찔러 넣어야 뚫리는 막으로 되어 있는 것도, 방 안이 따뜻한데 그가 긴팔을 입고 있는 것도.
‘팔을 가리기 위해서인가?’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짐승을 안정시킬 때 주사하는 약물까지 있는 것까지.
난 다 못 본 거야!
‘완전 돌아 버렸구만.’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왜 부르셨어요.”
그리고 나온 대답은 어처구니없었다.
“몰라서 묻니?”
“…….”
날 원망하는 말투.
숫제 고압적이기까지 한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사랑하는 아내가 바람을 피운 걸 목격한 남자가 쓸쓸하게 되묻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판데르니안 공작님 때문인가?’
“…….”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침묵했다.
사실 따질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난 그 모든 책망을 속으로 삼켰다.
당장이라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처럼 위태한 놈한테 뭐라 욕을 퍼부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 같아선, 저 잘생긴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려 주고 싶지만…….
참아야 했다.
난 양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독대 중이라도 내 이런 태도는 굉장히 무례한 것이었다.
저 바깥의 가신들은 나를 아직도 혼테인의 부인인 것처럼 대우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도 아니니까.
그런데도 혼테인은 내게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예전이었으면 귀족답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놈이.
오히려 아까는 센 척하던 주제에, 지금은 눈을 내리깔면서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게 아닌가.
이런 말은…… 정말 그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혼테인은 나를 대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세상만사가 다 쉽고 가볍고 감흥 없을 남자가. 나 하나 대하는 것이.
‘아니, 이 느낌 뭐야!’
진짜 구질구질하게 재회하게 된 부부 사이 같은 이 기분! 뭐야 대체!
“진짜, 진짜…….”
내가 흘겨보면서 중얼거리는데도 혼테인은 팔짱을 끼고 눈을 꾸욱 감았다.
내가 진짜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눈을 꽉 감았다. 감는다고 사라지는 일이 아닌데도.
혼테인.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혼테인 공. 저한테 소유욕이라도 보이는 거예요?”
“…….”
그의 입가가 완전히 굳어졌다.
난 그렇게 질문하면서도 그가 부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부정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답변한 긍정이었다.
페리는 본인이 그를 동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삐뚤어진 남자가 불쌍하긴 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제가 보고 싶어서 불러 놓고도 고압적으로 심술궂게 나오는 놈을!
페리가 남의 침실을 제 방처럼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고민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에휴, 에휴.”
한숨을 쉬면서 약병을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다 쓴 약병들이 버려져 있는 걸 보고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혼테인은 그걸 조용히 보다가 동선에 방해되지 않게 본인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몇 개월 전, 서제국 황제의 즉위 다음 날.
세이비어에게서 페리가 추락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투정 부리던 페리의 얼굴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잠에 들려 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페리가 죽은 세상은 약 없이 버틸 수 없는 곳이었다.
“아, 또 뭘 앉아요!”
그러나 페리는 당연히 그럴 줄 몰랐다.
혼테인에게 감정이 생기고 나면 남들처럼 다른 여자에게도 집적거려 보고, 연애도 즐겨 볼 줄 알았다.
다만 그의 마음은 페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고 음침했던 것이다.
페리는 혼테인의 마음을 절반 즈음만 이해하고 있었다.
대충 알에서 깬 병아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처럼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페리는 혼테인을 혐오할 수 없었다. 밀어낼 수도 없었다.
분명 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도 결국 자신의 시체로 실험당한 실험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인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마땅한 답은 없었다.
이제는 적이 아니라고 해도.
혐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지 않던가.
페리는 혼테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조차 정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것은 혼테인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페리를 얻는지.
처음 알게 된 연심에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 가는 중인데, 통째로 뺏기기까지 했다.
이제 와선 그냥, 페리를 삼켜 버리고 싶었다.
또 언제 가 버릴지 모르는 매정한 녀석을.
너 혼자 죽어서 날 또 떠나게 만드느니, 내가 먼저 널 죽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게 혼테인의 속내였다.
혼테인의 음울한 시선이 페리의 몸을 훑었다.
페리가 신경질 부리는 척하자 순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실상 그는 지금 인생 최대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라고 해서 서제국에 있고 싶어서 박혀 있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