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6)
몇 개월 전, 서제국 황제와 판데르니안은 거래를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혼테인에게 막중한 극비 임무가 주어졌었고, 그 과정에서 동제국에 출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판데르니안은 페리가 살아 있단 걸 예측하고 그런 짓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탑 해체 공사의 일에 혼테인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미리 수를 쓴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페리가 다시 살아나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혼테인이 완전히 배제되는 효과가 있었다.
혼테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저씨 몸에서 나온 것도, 어린 시절의 몸이 떨어졌다는 것도, 성녀로서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 보고로만 들은 것이다.
‘나도 너를 보고 싶었는데.’
먼 거리에서, 도움도, 방해도 주지 못했다. 아예 남남인 것처럼.
부부였는데. 내가 먼저 너를 사랑했는데.
혼테인이 눈을 감았다.
다시는. 다시는 놓고 싶지 않다.
페리가 계속 신경질 부리면서 침실 안의 약병을 비우는 동안, 혼테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항상 끼던 흰 장갑을 벗었다.
키 차이 나는 인영 두 개가 하나로 합쳐졌다.
혼테인이 뒤에서 페리를 끌어안은 것이다. 아주 소중한 걸 대하듯 조심스럽게.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을 읊조렸다.
“난 날 모르겠다.”
페리가 당황하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혼테인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어? 어?”
페리가 이상을 느끼고 흙으로 변해 도망가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손이 가느다란 목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손에서 나온 속박의 힘이 페리의 목으로 이동한다. 그의 예기는 속박이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한이 날 만큼 시린 음성이었다.
“그때 네가 내게 말했지.”
‘너, 내 육신이 당신 몸이랑 섞인 거 꼴리지?’
저속한 말로 비웃으며 새초롬히 올려다보던 미운 녀석.
그런데도 미워할 수 없이 예쁘기만 한.
그래. 네가 해석해 주지 않으면, 난 나 자신의 마음도 모르더구나.
“……그 말이 맞더라. 내 음심이 너에게만 반응하지 뭐니. 내 몸이 너에게만 발정을 해. 응?”
‘당신이랑 나랑 이어진 것 같아서 내심 좋았지? 이제 평생 그거 가지고 위안거리 삼으면서 살 수 있겠다. 근데 어쩌나?’
‘내가 빚은 몸이라도, 너랑 섞인 게 내 진짜 육신은 아니잖아.’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네가 방심한 지금이야말로, 한 몸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잠깐만! 놔 봐요!”
페리가 팔꿈치로 혼테인의 팔을 쳤다. 그러나 조금의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았다.
혼테인이 고개를 숙여 페리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씹었다.
“하나가 되고 싶어.”
“악!”
“지금 내가 너를 씹어 삼키면…… 그럼 우린 한 몸이 된 셈이라 할 수 있는 게지. 그치?”
페리가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오싹함에 꽥 비명 질렀다.
혼테인은 좋았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나를, 너로 채워 주렴.”
그가 페리를 꽉 끌어안고 마치 뱀처럼 조였다.
한순간의 방심이었지만, 완벽히 속박당한 것이다.
혼테인이 페리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강제로 벌리고 그 안을 탐했다.
그때였다.
최강 스파이가 관절을 뺀 뒤 팔을 돌려, 팔꿈치로 혼테인의 얼굴을 가격했다.
“이 미친 인간은, 똑똑한 척은 다 해 놓고 무슨!”
-퍽
“소리야!”
또 한 번 더 가격.
-퍽
사람은 턱을 맞으면 뇌가 흔들리게 된다.
그걸 노리고 턱을 가격했지만, 혼테인의 균형 감각은 일단 멀쩡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건조하던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났다.
방 안에 훅 피 냄새가 퍼졌다.
혼테인은 손에서 힘을 빼 페리를 놓았다. 맞은 것이 아파서? 그건 아니었다. 거부당하는 것이 마음이 시리도록 괴로워서.
페리는 뒤돌아서 정강이를 발로 차주며 소리 질렀다.
-퍽
“사랑 고백은 널 씹어 먹어서 하나가 되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또 한 대 찼다. 혼테인의 다리는 쇠보다 더 단단해서, 본인의 발이 더 아픔에도 불구하고.
“분위기 잡고 고백하는 줄 알았더니만!”
“…….”
“내가 당신을 뭘 채워! 아니, 반대로 나를 채워 주겠다고 말하면서 꼬셔도 시원찮을 판국에!”
“……?”
혼테인은 방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확 당황했다.
그러나 페리는 혼테인이 당황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페리가 점프하듯 박치기했다.
“이 멍청이!”
“…….”
혼테인이 박치기하고 씩씩거리는 눈앞의 여자를 떨리는 팔로 껴안았다.
아까와는 다른 포옹이었다. 안아도 되는 건지 겁먹은 듯한.
“……미안하다.”
“바보 같은 게!”
“네가 없으면, 하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하는지.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하나가 되고 싶어.
그리고 기우뚱.
혼테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페리에게 안기듯이 쓰러졌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저보다 한참 작은 그녀의 품 안에서 잠든 것이다.
“왜 맞고 잠들어요!”
페리는 몰랐다. 그가 그 독한 약들을 주사하면서도, 자신 생각에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있었단 사실을.
페리가 무게를 버티면서 아우성쳤다. 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혼테인은 그토록 그리웠던 달콤한 살 내음을 맡으며, 그냥 멀어지는 정신에 몸을 맡겼다.
페리는 자신에게 기대 쓰러진 남자를 부축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
가 버렸나?
혼테인은 생전 처음으로 당황하며 급하게 일어섰다.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그 애는 언제든지 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때였다. 방 한구석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식기끼리 부딪치는 작은 소음이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혼테인이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 한쪽 테라스.
당연히 가 버렸을 것이라 생각한 페리가 그곳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힘이 빠진 혼테인이 침대에 다시 털썩 앉았다.
그 애가 날 기다려 줬다.
나를.
페리가 그 모습을 짜게 식은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에헴! 하고 헛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주 멋있어요.”
“……?”
“나는 진짜 최강이에요.”
“…….”
애가 평소에도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런데 페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나랑 연애하고 싶으면 착하게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거예요. 고백도 분위기 있게 하고. 내가 혼란스러운 시기는 얌전히 기다리고, 뒤에서 도와주면서.”
그 말로도 충분했다.
지금 당장은 밀어내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까.
혼테인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제 방에서 밥 먹는 사랑하는 여자를 보면서.
평소에 짓는 그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웃음이 아니었다.
안도와, 겨우 찾은 행복 앞에서 보이는 수줍은…….
그런 웃음이었다.
***
“신대륙 가는 거 도와줘요. 돈 많이 대 주세요.”
“응.”
나는 막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런데 혼테인은 계속 멍한 채 응, 응. 거리기만 했다.
‘네 목숨 내놔!’라고 위협해도 ‘응. 가지렴.’이라 할 것 같은 판국이었다.
왠지 모르게 순해지고 행복해 보이는 혼테인 앞에서, 나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공작님도. 혼테인도.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은 새 일이 끝나면 정리가 되겠지.
그리고 나는 혼테인과 잠깐의 작별 인사를 했다.
혼테인은 자기도 신대륙에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날 한 번이라도 더 껴안으려 했지만, 난 헛소리 말라고 하며 그를 침대로 밀어 쓰러뜨리고 때려 기절시켰다.
***
지금은 리안에 있는 성국 숙소로 가는 길.
마차 안에서 나는 동제국 황실에서 받은 두 개의 상자를 끌어안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혼테인과의 일을 해치우고 나니까, 왠지 모를 용기가 생겼다.
아직까진 이 감정이 용기인지, 과신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렇다.
말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레서 선공작에게, 앨리스 님과 신대륙에 관한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는 그 일에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나밖에 없던 최고급 마차 안에서, 갑자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좋아.”
“좋아.”
“악!”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앉아 있는 상태로 점프하다시피 했다.
“신앙이 잘 모이고 있어.”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누군가가 접근하다니. 심지어, 난 아직도 상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설마, 드래곤인가?!’
그렇게 내가 허우적거리는 그때.
동제국 황실에서 대대로 내려왔다는 신목 상자가 혼자 끼이익 열렸다.
벌어진 상자 틈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온다.
그리고…….
-씰룩씰룩
빛나는 다육이가 걸어 나와 잎사귀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방금의 그 중후한 목소리로.
“놀라지 말거라. 나란다.”
***
솔직히 누구라도 경계할 것이다.
신목이 갑자기 말을 시작하는데, ‘와 정말 신성한 식물인가 보다!’ 하고 바로 납득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눈앞의 다육이를 보면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소박한 잎사귀와 앙증맞은 생김새 때문인지. 도저히 진지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난 다육이를 의자 위에 올려놓고 중얼거렸다.
“뭐야, 이게?”
“이게라니. 성녀여, 무엄한 짓은 하지 말도록. 나는 네 아비보다 삼백 배는 나이가 많은 신목이니까.”
“아니, 뭐야.”
진짜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 상황이라 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육이가 갑자기 왜 말을 해?
신목이든 성수든 말하는 동식물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 없다. 온 세상의 기밀을 다 알고 있는 나도 그렇다.
아니, 그리고 뭣보다…….
난 서제국 알로 황제님이 전달했다는 햄스터 영수 상자를 바라봤다. 저 상자에선 그냥 평범한 ‘찍찍’ 소리만 간간이 들리고 있다.
난 조심스럽게 신목 다육이에게 말했다.
“말을 해도 네가 아니라 햄스터여야 정상 아니니?”
“그놈은 성대가 없다.”
너는 있다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다육이를 바라봤다.
***
동제국 황실에서 신의 실마리를 찾으라는 이상한 임무를 받고, 받아 온 신목 다육이는 말을 시작하고.
하지만 난 그때까지만 해도 반 장난으로 다육이를 대하고 있었다.
물론 다육이에겐 마법의 흔적도, 다른 기계 장치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내 능력으로 근방 오백 미터를 샅샅이 훑어봐도, 이상한 조짐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육이가 아무리 근엄하게 말해 봤자 진지하게 다가올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나만 해도 흙으로 그런 특수한 다육이를 흉내 낸 인형을 만들 수 있다.
흙으로 다육이를 만들어 낸 다음에, 다육이의 몸으로 들어가서 다육이가 말하는 척하면 되니까.
그러나, 다육이가 알고 있는 것은 내 상상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네 오라비에게 날 데려가라.”
“예. 신목님. 페녹스? 아니면 레리온?”
둘을 내 오빠라고 생각해서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말하는 장난감 같은 신목이라도 나와 멜로의 관계는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뱉은 소리였지.
그런데 다육이는 잎사귀를 젓더니 이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성왕 후계자 말이야. 그놈과는 얘기가 통할 것 같다.”
멜로가 내 오빠라는 것은 이 세상에 단 몇 명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죽어도 내 편일 사람들만.
그럼 이 다육이는……?
그때부터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부터 다육이를 떠봤다.
그러나 다육이는 내가 성국에서 뭘 하며 자랐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
수십 번의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마차에서 탑이 보일 정도로 리안 지방에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다육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흑!’
그나저나.
“근데 다육이님은 왜 갑자기 움직여요?”
“성녀 네가 신앙을 모으지 않았더냐. 아주 잘한 일이었다. 나는 그 힘으로 방금 깨어났단다.”
뭔 이상한 소리인가 싶었는데.
“네 활동으로 인해 세상에 신앙이 모였다.”
“……성국 믿는 사람 별로 없는데요?”
“사람들이 너를 성녀님이라 부르는 것도 다 포교 활동인 것이다.”
“…….”
“그리고 그게 신목들의 거장인 나를 깨웠다.”
다육이가 근엄하게 말했다.
나는 거의 다육 님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공손해졌다.
잠깐.
이 말하는 신목 다육이가 하는 말을 보면, 정말로 신이 있는 건가?!
그리고 말하는 다육이는 그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담 우리나라가 사이비 취급을 받는 것도 덜해지는 거야?
그때 마차가 멈추고, 바깥에서 나의 하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육 님을 상자에 쑤셔 넣고 바로 멜로에게 직행했다.
***
멜로의 앞에 다육이를 데려간 후.
멜로의 첫 반응은 이랬다.
“장난치지 마.”
“아냐, 진짜 내가 만든 흙 다육이 아니야.”
“나 바쁘다고.”
“진짜라고!”
얼마나 어이없었으면 멜로까지 다육이를 무시했을까!
결국 다육이가 잎사귀를 흔들며 입을 열고 나서야 멜로도 조금 진지해졌다.
그리고, 멜로도 다육이와 한참 대화한 후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폐하를 불러야겠어.”
멜로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비밀을 다육이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상대할 수 없다. 멜로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다육이가 우리를 멈춰 세웠다.
“모망은 부를 필요 없다. 바쁜 아이니까.”
“……폐하보고 아이래…….”
“내 나이를 생각하려무나, 성녀야. 내가 보기엔 너희 인간들 모두 아기나 다름없다. 물론 그중에서도 성국 아이들은 한 명 한 명이 특별하지.”
“…….”
“…….”
나와 멜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분명 진지하거나 감동적인 대사인데 조금도 그런 분위기가 돌지 않았다.
다육이가 너무 앙증맞은 탓이었다.
“자, 그럼 두 아이들아.”
“…….”
“왜 아직도 건너 대륙에 가지 않고 있는 것이냐.”
“…….”
“그냥요…….”
“…….”
분명 진지한 분위기여야 하는데…….
결국 다육이가 좀 진지해져 보라고 화를 내면서 점프해서 잎사귀로 우리 둘을 후려쳤다.
“너희는 나를 아직 믿지 않으니, 내가 증명해야겠다.”
“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공중에 떠 있었다.
***
신앙이 어떻게 모였는지를 먼저 보여줘야겠구나.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며칠 전의 과거에 서 있었다. 멜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나와 같은 과거를 보고 있겠지.
때는 ‘성녀가 마물이다’라는 신대륙의 급보가 온 직후였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은 동제국 엑저 성이었다.
내가 브라운이라는 이름의 시녀로 일할 때, 밥을 얻어먹곤 했던 제2 식당의 모습이 보인다.
그때 친하게 지냈던 아주머니가 국자를 휘두르며 기사들에게 엄포를 놓고 있었다.
“허튼소리 하면 밥반찬으로 쇠 국자나 먹을 줄 알아요들!”
기사들이 억울해했지만, 아주머니는 끝까지 외쳤다.
“우리 공녀님은 성녀님이야!”
그리고 시야가 확 바뀌었다.
아주 익숙한 곳으로.
바로, 페녹스와 인연이 시작된 엑저 성 양조장이다.
성벽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해서, 매일 성내 순환 마차를 타고 출근했던…….
요즘 한창 성녀 맥주와 성녀 와인 양조로 바쁘다던 톰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운 얼굴이었다.
톰 아저씨는 일을 돕는 하인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복창해라. 페리안 아가씨는 성녀님이다!”
“성녀님이다!”
그의 팔뚝에는 공녀 사랑 협회의 인증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시야가 뒤집힌다.
여긴 서제국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번엔 딱히 특정한 어느 곳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꿈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전해져 왔다.
크루즈 열차의 파티장에서 나와 한 번이라도 말 섞어 봤던 어린 귀족들이 각자의 집에서 징징대고 있었다.
“페리안 공녀님 욕하지 말라고요오!”
또 다른 곳에선, 철거팀 팀원들이 엑저 가문의 마음씨를 칭찬하며 ‘우리 형님은 성녀님이 맞다.’고 우기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옹호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던 것이다.
계속해서 연거푸 시야가 바뀌었다.
아버지의 가신인 림로드 자작은, 신문사에 가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다.
“마흔둘! 마흔셋!”
“아니…… 저기…….”
그는 나에 대해 안 좋은 기사를 쓴 기자의 책상 앞에서 계속 검을 휘둘렀다.
검의 방향은 기자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는 기합만으로 몇 번씩이나 머리통이 깨질 뻔했다.
그 이야기는 순식간에 모든 언론에 다 퍼졌다. 성녀에 대한 거짓 보도는 그 이후로 완전히 끊겼다.
서제국의 사교계엔 세이비어 님이 있었다.
곧이어 다육이가 보여 주는 꿈은, 세이비어 님이 파티장에서 남편을 부채로 후려치는 모습으로 비췄다.
세이비어 님의 남편은 성녀에 대해 아주 작은 농담을 했을 뿐이다.
서제국 사교계는 그 이후 알아서 입단속을 하게 되었다.
평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공녀 사랑 협회의 마크를 단 인간들이 온갖 곳을 들쑤시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시야가 점점 밝아지며…… 끝이었다.
***
나와 멜로는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멜로는 바로 시간을 체크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방금 건 무엇입니까, 신목이시여.”
말투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신앙이 모이는 과정이었도다. 성녀에겐 익숙한 일이겠지?”
난 처음엔 다육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익숙하다는 것인지.
그러나 깨달았다.
다육이가 방금 과거를 보여 준 것은, 흙이 기억을 담고 있다가 내게 전해 주는 것과 비슷한 매커니즘이었다!
우리는 둘 다 잠자코 다육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가 먼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다육이님. 신이 정말 있습니까?”
“아니. 죽었다.”
뭐야!
난 바로 실망해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다육이의 말이 진짜라면, 황실에서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팔백 년 전에 사라졌다는…….
이번엔 멜로가 물었다.
“신목님께선 드래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은혜를 모르는 것들이지.”
“드래곤이 페리를 노리는 것이, 신의 부재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정답이다.”
“그러하면, 페리는 무엇입니까?”
분명히 내 앞의 다육이는 귀여운 다육이인데. 그런데.
“…….”
갑자기 위압적인 기분이 들었다. 뿌리로 세상을 감쌀 만큼 커다란 고목이 나를 들여다보는 그런 느낌.
“……그건 스스로 알아내어야 할 것이다.”
다른 건 다 잘 말해 주면서, 왜 나만?
다육이는 앙증맞은 잎을 쫑긋거리다가, 내 쪽으로 잎사귀를 향한 뒤 말을 이었다.
“성녀야. 계속 궁금해했을 것을 알려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