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8)
그리고 마차가 다시 움직이고…….
판데르니안 공작님이 한숨을 쉬고 다육이에게 묻는다.
“드래곤들은 왜 페리 양에게 집착한 겁니까?”
앗. 갑자기 본론에 들어가다니.
“죽이려면 일찍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살려 두고 괴롭힌 이유가 뭐죠?”
그의 말대로다. 지금까지 용들의 행보엔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나를 왜 이렇게 집요하게 싫어했는지.
그러면서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그러나 다육이는 이번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민망해라. 괜히 나까지 멋쩍다.
나는 공작님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육이님 맨날 저래요. 자기 불리하면 말이 없어져요. 이제 앞으로 한참 주무실걸요.”
그래도, 아까 둘만 있었을 때에 비하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다.
‘그럼, 이제 그 얘기를 해도 되겠지…….’
사실 기다리고 있었다.
둘만 남게 될 이 시간을.
항해와 앨리스 님 이야기가 제일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판데르니안 공작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계속 묻어 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혼테인.’
난 최근에 그를 만나고, 괜히 계속 공작님께 죄책감을 느꼈다.
공작님과 나 사이엔 무언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유부녀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저번 와이번 데이트 때 확실해졌고.’
근데 내가 혼테인을 완전히 밀어내지도 못하고 돌아왔으니…….
난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민망한 얘기는 항상 미루고 싶다.
하지만 미루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부딪쳐야 하는 것이다. 나올 결과가 어쨌건 간에.
나는 크흠,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판데르니안 공작님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본론부터 말했다.
……그 와중에 햄스터님이 우릴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저, 이번에 혼테인이랑 만나고 왔어요.”
공작님의 입매가 굳었다.
“……여자가 조심해야 할 남자는, 나 없으면 죽는다고 매달리는 남자래요.”
“그렇죠.”
“걔도…… 제가 없으면 안 된대요.”
공작님은 잠깐 마차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석안은 바로 나를 응시해 왔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고백을 받진 않았어요. 공작님이 있으니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 지금의 내 얼굴은, 방금 부끄러운 과거를 모두에게 들켰을 때보다 더 민망한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솔직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더 이상 저 혼자 고고한 척 공작님 마음을 이용만 할 수는 없으니까.”
“…….”
“저 전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작님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혼테인을 동정하는지. 제가 누구를 좋아하고 있기는 한 건지. 아니, 좋아할 수는 있는 건지…….”
잠깐 심호흡을 하고.
“둘 중에 누가 좋은 것인지, 전혀…….”
내 마음은 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작님은 그렇다 쳐도 혼테인 그 멍청이가 왜 자꾸 신경 쓰이는 것인지.
그래서 나는 선택한 것이다.
둘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으로. 나는 누군가를 고르거나 할 처지가 아니라고.
“그래서 이쯤에서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죄송해요. 공작님이 원하는 그런 관계는 될 수 없을 거예요.”
그 대단한 공작님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나를 내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럼 알아서 관계가 정리되겠지.
내가 사죄의 의미를 담아 상체를 서서히 숙이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공작님이 황급히 다가와서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고 숙이지 못하게 막았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아녜요. 그게 아니라…….”
내가 왜 지금까지 공작님을 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날 바라보는 그의 보석안은 그 누구보다 깨끗하고 순수한 열정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주 보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정직하고 올곧은 구애의 눈빛이었다.
“……공작님이 싫거나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그냥 다 제가 문제예요.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그런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작님의 호의를 꾸준히 이용하고…….”
내 말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래서 죄송해서…….”
내 눈을 마주 보던 판데르니안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향한다.
그래. 실망했을까.
남자의 마음을 알면서도, 여러모로 이용해 먹기나 했었지.
혼테인을 견제하는 것부터, 당당히 항해를 요구하는 것이나.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나.
나를 원하는 그의 마음을 바탕으로 내 기만을 용서해 달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그가 고개 숙인 채 말했다. 항상 화려하던 그의 은발이 이렇게나 쓸쓸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공녀님.”
“…….”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애절하게, 마치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포기한 것처럼…….
“……저도, 공녀님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난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 없게 말하는 것 역시 그의 인생에서 처음일 것이라고.
난 나도 모르게 확 눈물이 나올 뻔했다. 매사 당당하던 공작님이 왜 나 때문에 이런단 말인가.
“버리다뇨,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
난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당장이라도 죽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져서.
그가 내 품 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러기를 한참.
그가 내 팔을 꽉 붙들고 조용히 속삭였다.
“공녀님. 입 맞추겠습니다.”
방금까지 그렇게나 정중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가 무례할 정도로 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살덩이가 들어왔다.
우리는 숨도 못 쉬고 키스했고, 마차 안에는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살을 빨아당기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내 입안 곳곳을 헤집는 그의 혀가 빠져나가고.
코가 맞부딪힌 상태에서, 서로 숨을 교환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마주 보고 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입술, 볼, 이마, 코끝…….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연거푸 내 얼굴 여기저기에 버드 키스를 한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열이 엄청나게 올라서, 거울은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뽀뽀하는 입장에서도 입술에 닿는 열기가 느껴진 것인지, 그가 나지막이 하하하 웃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듯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공작님의 허리를 끌어안듯 손을 올리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어…… 어…….”
허둥지둥, 나는 손을 풀고 양손으로 판데르니안 공작님의 두 눈을 가렸다!
-팍!
실수로 거의 눈을 때리듯 했는데.
그는 그런데도 실없이 하하 웃기만 했다. 내게 눈이 가려진 채로.
아니, 나 방금 공작님만을 못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한 사람인데…….
방금 그건 뭐야?
내겐 이 최강 스파이 숙녀님의 부끄러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선 안 될 의무가 있었다.
난 공작님의 눈을 막은 손에 힘을 꽉 주고,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건…… 이건…….”
“압니다. 입맞춤이 뭡니까. 설령 몸을 섞어도 당신의 마음은 가져올 수 없겠지요. ……한 명에게 머무르기엔 너무 귀한 분이니까. 저도 이젠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
“당신이 누구 한 명을 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마음이 쉴 시간이 없으니까요. 누굴 사랑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
“허니 당신 곁에 남아 있게만 해 주세요. 지금은 그거면 충분합니다.”
“……공작님은…….”
난 그의 눈을 막은 두 손에 힘을 뺐다.
손이 떨어지며 그가 눈을 떴다.
그가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나를 담고 웃는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항상 상냥하시네요…….”
그리고 판데르니안이 헛기침하다 말했다.
“혼테인이나, 멜로 왕자나. 누가 당신 같은 여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예?”
“당신은 그저,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 선택만 하면 됩니다.”
“예? 아뇨. 싫어요.”
멜로는 거기서 빼 주세요. 난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슨 더러운 이야기람!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무엇으로 오해한 것인지, ‘싫어요’ 소리를 듣고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예…… 그렇지요.”
“……?”
그의 표정은 죽음을 앞에 둔 사내만큼 결연했다.
“……저를 옆에만 두신다면…….”
아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나는 황급히 멜로에 대해 설명하려다,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를 옆에 둔다면 다른 남자들을 둘이나 거느려도 된다는 엄청난 결단 앞에서는 미안한 얘기지만…….
멜로와 나의 관계를 설명했다간, 폐하와의 관계까지 밝혀지는 것이다.
물론 이젠 알고 있었다.
공작님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 것인지 말이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 품고 있던 마음이라, 변하지도 못할 거란 사실까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
판데르니안 공작이 다시 내게 가까이 왔다.
그리고 마차 안에 긴장감이 서리고.
공작님이 살짝 웃고, 내가 눈을 감으려는 찰나…….
그때였다.
“찍찍!”
매번 분위기 깨는 등장밖에 할 줄 모르는 그들.
다육이를 태운 햄스터가 일 미터가량을 점프해서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육이가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뭐 하느냐. 그럴 정신도 있더냐?”
“…….”
“…….”
난 공작님이 다육이님을 찢진 않을까 걱정했다.
“이 사내 소유의 열다섯 척의 군함을 이용해서 건너편 대륙에 갈 생각이었구나.”
아까의 브리핑을 다 듣고 계셨구나.
“어…… 네.”
화제가 순식간에 사랑에서 군함으로 바뀌었다. 정말 딱딱한 분위기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공작님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사나워졌다.
눈빛만으로 식물을 죽일 수 있었다면 다육이는 이미 재가 되었으리라.
“왜 그리 느긋하게 돌아가려 하나, 성녀야?”
“……그럼 무슨 방법이 있어요?”
다육이님의 말대로라면, 더 빨리 신대륙으로 건너갈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하지만 항해 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바다를 건너?
혼테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도, 금전적인 부분만 요구한 이유가 있다.
하늘을 나는 크루즈 열차도 바다는 건널 수 없다. 열차의 동력원이 바다 위에서는 마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육이님은 딴소리를 했다.
“네 가족 셋도 필요 없다. 이 사내가 내어준다는 병력도 필요 없다. 가서 싸울 것이 아니야. 성녀 너 혼자 먼저 가도 된다.”
“예?”
“페리 양 혼자라니.”
판데르니안이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듣지 마십시오. 설령 갈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페리 양을 혼자 보냅니까. 그 위험한 곳에.”
“위험하지 않대도. 보여 주마.”
시야가 또 갑작스레 전환되었다. 우리는 다육이님이 보여 주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
넓은 초원이다.
화각은 땅만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곳에, 갑자기…….
-쿵!
피 흘리는 육중한 도마뱀 같은 것이 떨어졌다.
날개 찢어진 드래곤이었다.
***
예고도 없이 잔인한 장면을 본 터라, 아주 자연스레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이건 내가 딱히 연약한 감성을 가져서가 아니고, 추우면 몸이 떨리는 것과 같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공작님은 나를 보더니 다육이의 멱살을 잡았다.
멱살 같아 보이는 잎사귀를 잡아 올렸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만…….
“공작님! 공작님! 찢어져요!”
내가 허둥지둥 말려서 내려놓게 만드는데, 다육이님은 평온하게 말했다.
“이것은 드래곤이 죽는 장면이로다.”
“……아니! 진짜!”
나도 참을 수 없다!
난 다육이를 집어 들고 안 어지럽게 탈탈 털면서 항의했다.
잎사귀가 나 보란 듯이 살랑거린다.
“동화 속에나 나오는 종족이 진짜 있다는데, 또 걔네가 죽었다뇨! 저희도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끔 설명 좀 해 주세요.”
“아직 다 죽은 건 아니니라.”
나는 다육이를 탈탈탈탈탈 털었다. 밉상이야, 밉상. 겉만 귀여우면 다 되는 줄 알고!
“그만 흔들거라…… 그럼, 일단 거기까지 갈 길을 먼저 만들어 보자꾸나.”
그때 작은 무언가가 내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내려다보니, 햄스터가 내 바지 끝자락을 입에 물고 낑낑거리는 것이 아닌가!
“찍찍!”
그리고 마차 문을 짧은 손톱으로 박박 긁는다.
-박박박박
“찍찍!”
화낼 기운도 없었다. 게다가 사실 햄스터님은 다육이한테 같이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까…….
그리고 난 햄스터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바로 이해했다.
“공작님, 마차 좀 세워 주세요!”
***
내린 곳은 바다가 보이는 항구였다.
지금까지 계속 몇 번씩 출항을 포기해야 했던 그 장소 말이다.
그 와중…….
“성녀님이다!”
“성녀님이랑 그 공작이다!”
근방의 시민들이 벌써 모여들었다.
그들은 성녀 구경에 신나서 웅성거렸다.
‘민망해라!’
판데르니안 공작님은 다육이에게 엄청 화를 내고 있었다. 분위기를 깬 죄로.
지금도 봐라, 잎사귀를 잡아당기고 있잖아!
“공작님!”
“……예.”
공작님이 다육이를 놔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판데르니안 공작의 더러운 성격이 워낙 유명한 나머지 시민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이미 다들 모여들어서 꽃잎을 뿌리고 한 번만 손잡아 달라며 난리였을 텐데.’
나는 다육이에게 소곤거렸다.
“여기에 배 없이 신대륙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예요?”
다육이님은 이번에도 또 딴소리를 하신다.
“여기가 아니라 너에게 있지.”
“네?”
아.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설마, ‘그거’ 아니죠?”
신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는 땅을 만들라는.
나는 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땅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으니까 입 밖으로 내서도 안 된다.
난 슬쩍 판데르니안의 눈치를 봤다. 그가 내 눈빛을 보고, 알아서 모른 척 딴 데를 보기 시작했다. 고마워라.
내가 그의 시선을 돌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도 초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소곤거리면서 다육이와 대화해도, 충분히 다 들을 수 있을 수준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육이와 입 모양으로 대화했다.
‘전 흙으로 무언가를 빚는 걸 잘하는 거지, 지반을 움직이는 힘은 약해요. 요새는 여진도 잘 못 일으킬걸요?’
“네 오라비가 말했던 거 기억나느냐?”
멜로와 있었던 이야기? 너무 많아서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였다.
“찍찍!”
햄스터가 뛰어올랐다. 마치 힌트를 보여 주듯.
‘너 내가 어릴 때 보여 준 햄스터 마물 기억하냐?’
‘그 마물의 생존 방식이 그거야. 볼주머니에 다른 마물의 힘을 받아 내서…….’
‘세상엔 그런 식으로 힘을 이동시키는 메커니즘이…….’
“어?”
내가 무언가를 깨닫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햄스터 성수를 바라보았다.
햄스터가 두 발로 서서 자랑스럽게 소리 냈다. “찍.” 하고.
햄스터의 양 볼주머니가, 서서히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확신한다. 그 빛은 나만 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볼주머니에 담긴 것은 나의 힘과 동일한 종류의 것이었다.
기적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같은 근간을 공유하는 힘이 그 볼주머니에 서려 있던 것이다.
이제는 나도 완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신은 정말로 있다고.
신목과 성수는 성녀의 편이 맞으며, 그들의 말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고.
나는 홀린 듯 햄스터의 양 볼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우우우웅
햄스터 성수가 가진 거대하고 육중한 힘이, 나에게 일순간 전해져 온다.
하지만.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능력을 쓰면? 당연히 안 되지!
‘그럼 밤에 지하에서 접근해서…….’
그때 다육이님이 말했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너의 힘을 숨기지 말아라.”
동제국 황제 대리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대사를.
그 말이 왜 나를 벅차오르게 만들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원을 빌었다.
아주 어린 시절 읽었던 기도문처럼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는 붙이지 못했다. 그럴 겨를도 없었으니까.
내가 빈 소원은 간단했다.
“길을 열어 주세요.”
그리고…….
서서히 바다가 갈라지듯, 무언가가 물 밑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쿠르르르릉
바다 밑, 빛 한 점 없는 밑바닥에서 엎드린 채 숨죽이고 있던 흙들이 위를 향해 융기하기 시작한다.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듯.
토양이 모이고 결합하여, 일직선의 길을 만들어 냈다.
길고 긴.
신대륙까지 가는 육로의 탄생이었다.
나는 땅이 치솟는 기적을 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페리 양!”
공작님이 내 등 뒤를 받쳐 주는 것을 느끼며 쓰러졌다.
성녀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서제국 황실. 황좌에 앉아 있는 소녀가 턱을 괴고 웃었다. 그녀에게 아주 재밌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
공녀 사랑 협회, 사이비 지부.
협회엔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사이비 지부라고 명명되는 집단이 있었다.
두 제국에서 숨어서 성국을 믿던 신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지부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번에 성녀가 일으킨 기적에 잔뜩 흥분해 신이 난 채였다.
그들의 사무소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사무소가 꽉 차서, 그 바깥의 공원까지 사람들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다른 지부의 사람들도 사이비 지부로 이적을 희망하며 몰려든 것이다.
사이비 지부는 점차 그 세를 늘리고 있었다.
그들은 잔뜩 흥분해서 와와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들의 차림새가 이상했다.
남들이 보면 광대 집단이라고 할 만큼 이상한 옷차림이 아닌가.
그들은 성국이 부흥하던 시기인 칠백 년 전쯤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갬비슨 위에 짐승 가죽으로 만든 조끼에, 그 위엔 또 사슬 갑옷까지.
몇몇 진짜 또라이들은 판금 갑옷까지 입고 있었다!
정말 만만치 않은 미친놈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이러는 이유는, 보름 전으로 되돌아간다.
소박한 사이비 지부 사무소. 그때까지만 해도 몇 없던 인원들이 행복해 죽겠단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성녀님이 길을! 역시 성녀님이야.”
“그 무시무시한 바다에 길을…….”
“하지만 또 마물의 힘이라고 탄압을 받으면 어쩌지?”
그때 누가 뒤에서 소리쳤다.
“우리가 나설 때가 왔다!”
“응?”
“우리가 성녀님을 지켜야 한다!”
당당하게 외친 그는 얼굴을 가린 성국 기사단장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그의 정체를 알고 있으나 모른 척했다. 이것이 여기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때 사이비 지부 부단장이 당연한 지적을 했다.
“누구에게서 지키느냐는 둘째 치고. 지키기 위해선 뭘 해야 합니까?”
그는 레서 선공작의 가신이었고 그걸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 역시 일단은 비밀인 일이었다.
그때, 역사를 좋아하는 웬 또라이가 탄성을 지르듯 외쳤다.
“나 이거 봤소! 역사 속에선, 기사단을 조직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