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19)
“기사단!”
모든 또라이들이 합창하듯 감탄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별자군 기사단]“우와아아!”
그렇게 이 미친 집단은 자발적으로 기사단을 조직한 것이었다.
성국의 상징인 별을 기사단 마크 삼아, 별자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고서.
그러면서도 무력 집단이 아니고 성녀를 지지하는 집단일 뿐이라는 의미를 담아 일부러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무용지물인 칠백 년 전의 갑옷들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단한 기세를 지켜보던 다른 지부 사람들은, 하나둘씩…….
“아니. 자네도 여기 왔어?!”
“……재밌어 보여서…….”
……모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질이 다른 신앙이 쌓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멜로가 그 미친놈들 집단을 보고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 위염 투병을 시작한 것은 아직은 비밀인 일이다.
***
그리고 다시, 서제국 황실.
“허가도 없이, 자발적 기사단이라.”
보고를 올리던 황실 근위대가 바짝 긴장했다.
아직은 애들 놀음 수준의 일이지만, 이게 국제적 분쟁으로 번지면 어떻게 될지…….
그러나 알로는 피식 웃고 끝냈다.
“뭐. 내비둬라.”
동제국 황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대리인 일흔 먹은 공주님께서 보고를 올린 기사를 빤히 보며 미소 지었다.
“굳이 탄압할 필욘 없다.”
그리고 그 시각. 페리는 침대에서 기절해 있었다.
***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넓은 대륙 위, 아주 높은 허공에 있는 섬.
물리 법칙을 무시한 섬 위에 드래곤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드래곤들의 서식지가 여기였던 것이다.
어쩌면 드래곤이 내게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일 수도. 자신들이 있는 곳에 때가 되면 오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내가 힘겹게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퀭한 얼굴의 멜로였다.
“……어…….”
나는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며칠이나 지났어……?”
말을 꺼내자마자 내 몸 상태가 좋아도 너무 좋단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해 놓고도 기운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런데 멜로는 다크서클이 가득 내려온 얼굴에 침울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 솔직히 내가 잘못했지.
햄스터 성수를 보고 가슴이 벅차올라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거기서 길을 만들다니…….
그때 멜로가 내 생각을 자르듯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여론이 완전히 바뀌었어.”
“응?”
“그 무시무시한 바다를 이겨 낸 기적을 행한 기적의 여자라면서. 성녀 굿즈 짝퉁이 시중에 풀리고 있다. 도저히 그놈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겠다.”
잠깐. 그제야 내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한껏 초라해진 멜로의 어깨에 붙어 있는 꽃가루들이.
그러고 보니 멜로는 자신에게 온 듯한 편지를 한 아름 들고 있는 상태였다.
“이젠 나한테 협박 편지도 안 와. 중년 팬들이 나보고 성녀님을 행복하게 해 달라는 응원 편지를 보내지…… 내가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사람들이 꽃잎을 뿌려. 나뿐만 아니야. 기사단 사람들한테까지…… 말이 되냐, 이게?”
멜로는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뭔지 모를 기쁨에 한참을 웃었다.
이런 기분은 오래간만이야.
그리고 한참 웃고 있던 와중이었다.
난 그제야 문 바깥에 서 있는 누군가의 기척을 눈치챘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엑저 놈들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난 그냥 걔네도 불러들였다.
“페리야!”
“페리, 몸은 괜찮고?!”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에 대한 말보다, 내 건강을 걱정하는 그들을 앞에 두고 난 소탈하게 계속 웃었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
잠깐 걱정을 듣고, 난 판데르니안 공작님을 빼고 다 내보냈다.
“공작님. 죄송하게 됐어요.”
난 판데르니안 공작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이번 항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가. 항해가 계속 미뤄지면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고…….
그런데 나는 막상, 내가 갈 길을 직접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멋지고 대단한 스파이가 있을 수가!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죄송한 건 죄송한 거다.
반짝거리는 보석안이 나를 들여다보다, 살짝 눈매를 휘며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리고 그가 웬 철창을 꺼냈다.
철창 안엔 결박당해 있는 선인장과, 그 옆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기니피그가 있었다.
“공작님이 키우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그때 제가 수습했으니 가져왔습니다.”
“나다, 성녀야. 네 애인한테 나 좀 풀어달라고 말해 다오.”
잉?
작은 선인장에게 들리는 것은 익숙한 다육이님의 목소리였다.
그럼…… 기니피그도?
내가 놀란 얼굴로 기니피그를 보자, 그가 볼을 빛내며 찍찍거렸다. 맞구나!
“……이게 어떻게 된…….”
“페리 양이 기절한 이후부터 점점 변하더군요.”
“신앙이 모여서 그렇단다. 성장기 같은 거지.”
“아니, 근데 공작님은 선인장 결박용 수갑은 대체 어디서 나셨어요?”
“성스러운 것에게 수갑을 채우다니. 네 애인은 성적 취향이 고약한 모양이다. 조심하거라, 성녀야.”
공작님은 자신에 대한 부당한 모함을 부정하지 않고 선인장의 가시 없는 부분을 꼬집었다.
그리고 한참 옥신각신 후.
“이제 신앙이 좀 모였으니, 모두에게 신에 대해 증명할 때가 왔구나.”
“네?”
“성국이 사교도 취급당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거란다.”
난 이상하게, 선인장이 웃는다고 느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가시들이 움직이면서 웃는 입 모양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어이없어서 신목님을 바라보는데, 신목님이 말했다.
익숙하게 시야가 암전되고 새로운 풍경이 보임과 동시에, 신목님이 말하는 것이 내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인간 아이들아.”
인간 아이들?
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목님 앞에 있던 것은 나와 공작님뿐이지만, 지금 이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둘만이 아니라고.
전 세상 사람들이 다 신목이 보여 주는 환상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신목님의 힘에 한계가 없는 건가?
멜로한테 별자군 기사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 신앙으로 이런 힘이 모인단 말이야?’
반 진심, 반 장난의 자발적 기사단 몇 중대만으로도?
무서울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모두에게 뭘 보여 주려는 것인지.
성국이 사이비 취급을 그만 받게 될 것이라니.
그리고 이윽고 환상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커다란 나무.
아마 신목님의 본 모습일 거대한 세계수였다.
감히 크기를 헤아릴 수도 없이 압도적인.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쓰다듬는 큰 손이 있다.
감히 인간의 시선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는 거대한 크기의.
그러나 그 손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가 뚝 뚝.
핏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성수들과 신목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쿵. 무언가가 쓰러졌다.
세계의 규칙과 근간. 그것이 망가져 내린 것이다.
연극처럼 내레이션이 깔린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신이 죽었다.
팔백 년 전의 일이었다.
환상을 보게 된 것은 전 세상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느꼈다.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영상만이 전부가 아니다.
누군가가 설명하는 것도 아닌데, 정보가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신이 죽었다.
기운이 회복될 틈이 없어서 명을 다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던 신목과 성수들 중 약한 것부터 마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성수와 신목이 마물을 구분해 내는 힘이 있던 것. 그리고 유난히 마물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들 나름대로의 배반자에 대한 응징이었던 것이다.
멜로는 여기서, 페리가 마물의 힘과 비슷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던 이유를 이해했다.
페리는 정확히 따지자면 성수 혹은 신목과 비슷한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물은 신목과 신수의 아종이었으니, 언뜻 보면 페리와 비슷해 보이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고.
거대한 날개가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날갯짓한다.
검은색 비늘이 뒤덮인 육중한 덩치의 드래곤이 포효하더니,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을 뒤덮은 수많은 마물들이 드래곤이 날아간 길을 쫓아 기괴한 움직임으로 따라갔다. 마치 드래곤의 포효가 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금발에 보라색 눈, 그리고 성녀와 닮은 외모.
앨리스 경이었다.
***
신대륙에 있는 성국의 교황 알현실.
교황과 독대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 태도는 무척이나 당당하고 대담하다.
오히려 교황이 그녀에게 지고 들어가는 기색이었다.
과거의 일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생각했다.
‘어떻게 항로가 개척되기도 전에 혼자 이곳을 오갈 수 있던 거지?’
하지만 신목이 보여 주는 환상은 그 답을 설명해 주지 않고 흘러갔다.
둘은 이미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이었다. 교황이 입을 열었다.
“드래곤에겐 마물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하여, 새 신이 탄생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통탄스러운 일이지요. 신과 가장 가까운 이들이었던 드래곤이 이렇게 그분을 배신하다니.”
교황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드래곤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앨리스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별로 관심 없었다.
드래곤을 증오하는 신대륙 성국 사람들의 마음 같은 건 사실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대충 듣고 있던 앨리스가 적당할 즈음에 끼어들었다.
“그럼 내 딸 머리 색깔은 왜 그런 것인지 아는 바가 있나?”
엑저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특별한 머리카락.
그것은 드래곤의 가호가 있던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던가.
드래곤이 정말 실존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니, 그다음 따져 보아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왜 딸아이의 머리색이 갈색인 것인지.
앨리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친우가 그러는데, 내 남편은 우리 딸을 아직도 의심하고 있을 거라는군. 내가 보기엔 아닌데 말이야. 제 딸이라고 얼마나 싸고도는지!”
앨리스가 뿌듯한 마음으로 돌려 자랑했다. 내 남편이 애를 잘 돌본다고.
그녀의 관심사는 드래곤이 얼마나 나쁘냐보다, 딸이 어찌나 귀여운지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난감한 얼굴로 조심스레 답변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의심하겠지요. 앨리스 경은 당신이 사람의 감정에 무딘 편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계셔야 합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내가 저번에 말한 꼬마 말인데.”
“친구 되시는 분의 아드님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맞아.”
“말씀하신 정황들을 보아하니“ 그 아이도 당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인 듯합니다.”
교황이 우울한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쪽 대륙에도 그런 인간들이 계속해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 꼬마아이나 당신의 감정이 희박한 것도 단순히 천성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닐 겁니다. 세상이 점차 망가진다는 증거지요. 점차 그런 인간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내 친구에게 말해 줘도 되나?”
“……성녀님이 좀 더 큰 후에 말하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아직은 해결책이 없으니까요.”
교황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아까의 화제로 돌아갔다.
“따님의 머리색은…… 어찌 보면 갈색인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군요. 드래곤의 기운보다 신의 기운이 더 강력한 것이니.”
“예컨대 더 좋은 색이라 이거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 이건 좀 더 확인해 보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번에 오시면요.”
앨리스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남편이 좋아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교황의 안색은 어두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들은 따님을 해하려고 들 겁니다. 따님의 존재가 그들에게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
“……그러나 직접적으로 따님께 위해를 가할 순 없을 것입니다. 신의 기운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일단은 드래곤들도 따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 아직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놈의 신의 기운.”
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그래서. 내 딸은 대체 뭐지?”
“성녀님이십니다.”
“성녀라 해도 감이 안 잡히는데. 성녀는 보통 무슨 일을 하지? 무슨 역할인가?”
직업 소개소에서 설명 요구하는 듯한 투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교황의 대답이었다.
“억지를 부리는 역할입니다.”
억지.
과거를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는데, 둘은 대수롭잖게 넘어갔다.
앨리스의 보라색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요즘 고집이 늘긴 했는데. 뭐 하여간 대단한 역이란 건 알겠군.”
앨리스는 성녀란 것에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고 넘어갔다. 아직은 무엇인지 몰라도, 대단한 것이면 됐다. 그냥 호쾌하게 웃었다. 남편이 기뻐하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레서가 알면 참 좋아하겠어.”
***
“그럼 다음에 또 오지. 일 년은 걸릴걸세. 그땐 내 딸이 성녀라는 증거를 미리 준비해 놓길 바라. 남편에게 깜짝 선물로 건네줄 생각이야.”
“예. 아, 허면 성녀님을 저희가 한 번 뵐 수 있겠습니까?”
“데리고 오기엔 너무 멀긴 한데…… 뭐. 하여간 데려와 보지.”
그리고 풍경이 크게 바뀌었다.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방금으로부터 일 년 후의 일이라는 것을.
영상은 한 행렬을 비추었다.
공작 부인과 공녀님을 태운 마차와 그 주위를 호위하는 수많은 기사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종자들과 시종들.
그 행렬이 얼마나 길고 호화로운지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등 뒤엔 검은 날개, 이목구비에 음영이 없는 동그란 얼굴.
인간의 형상으로 변한 드래곤이었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진 지반에서 기어 나온 마물들이 그들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공녀님을 지켜라!”
기사들이 검을 뽑고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 안.
그곳은 방음 마법으로 인해 일반인에겐 바깥의 소란이 들리지 않는 채였다.
볼이 통통한 세 살배기 아이가 엄마의 다리에 매달리는 장난을 치며 꺄르륵 웃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앨리스가 웃으며 아이와 눈을 맞췄다. 땡그란 연보라색 눈이 엄마를 담고 휘어진다. 엄마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나이였다.
앨리스가 아가를 꼭 껴안고 말했다.
“아가. 엄마랑 숨바꼭질 연습할까?”
“응? 응! 응! 좋아!”
얼마나 좋았는지, ‘끼양!’ 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까지 지른다.
“연습해서 아빠를 놀래켜 주는 거야.”
“응! 놀래켜 줄 거야!”
앙증맞은 두 손을 쭉 뻗으며 소리친다.
자식을 두고 가야 하는 부모의 마음.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기를 앞에 두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엄마의 마음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는 웃었다.
앨리스는 페리안의 양 뺨에 오래도록 입 맞췄다.
사랑하는 내 아기. 내 딸. 엄마는 네 덕분에 행복을 배웠단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다 너를 통해 알았어.
그리고 해맑게 웃는 아기를, 마차 의자에 숨겨진 수납함에 넣었다.
그리고 누워서 히히히 웃는 제 아기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페리안이 쪼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엄마. 나 있쨚아…… 나는…….”
페리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올려다보며 종알거리듯 말했다.
“엄마가 세상에서 쩨이이이일! 좋아!”
앨리스는 딸을 사랑한 만큼 약해진 여인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딸로 인해 강해질 수 있었다.
“엄마도 페리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앨리스는 검을 쥐고 마차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환상은 다른 곳을 보여 준다.
여전히 설명 없이 불친절한 환상이었지만,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계속 과거를 보여 주던 그 전과는 달리, 이번엔 현재를 비추고 있다고.
이번에 보이는 것은 신대륙의 교황이었다.
주름진 이마. 건강이 좋지 않은 듯 어두컴컴한 안색. 아까 앨리스와의 독대에서보다 한껏 나이 든 모습이었다.
교황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주름진 이마가 바닥에 닿는다.
그가 얼굴을 땅바닥에 붙인 채 입을 열었다.
“성녀님을 급하게 불러올 생각에 마물이라는 거짓 모함을 퍼뜨린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바닥을 짚은 그의 손은 마치 경기를 일으킨 것처럼 벌벌 진동했다.
“대륙 간의 교역이 시작되었을 때, 저희는 성녀님이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성녀님이 없으면 저희에겐 아무 희망도 없으니, 그냥 멸망할 세상을 버티고 기다리고자 했습니다.”
교황이 쿵, 머리를 땅에 찧었다.
“최근에서야 다시 살아 계시단 소식을 전해 듣고,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모함을 해명하기 위해 성녀님이 급하게 건너오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아! 성스러운 그분께선 저희의 더러운 생각을 꿰뚫어 보고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지만…….”
또다시 쿵.
주름진 이마에 핏방울이 맺힌다.
“신이 없으면 앞으로 일 년 안에 세상이 멸망할 것입니다.”
늙은 노인이 얼굴을 들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노인의 눈물과 섞여 진홍색 물방울로 변한다.
“성녀님. 세상을 구원해 주십시오.”
그리고 환상이 끝났다.
***
아이에게 저녁을 먹이던 아기 엄마.
검술 훈련이 끝난 뒤 몸을 씻던 기사.
보행기에 앉아 돌아다니는 십 개월짜리 어린아이.
그리고 막 임종 직전의 노인까지!
환상을 본 것은 그 모두를 포함한 전 세상 사람들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
환상이 끝나고 일주일 뒤.
‘성국으로 가야지, 뭐 해!’
‘이미 국경을 폐쇄했다는데, 어떻게 가?’
‘그래도 무작정 들어가야 살 것 아니야!’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정당하게 성국으로 이민 가려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성국에 밀입국하려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성국 시민이 되면 성녀의 가호를 받아 살아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인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은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전 세상 사람들이 같은 환상을 본 이상 더 이상 잴 처지가 아닌 상황이겠지.
그리고, 한순간에 모두의 희망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나는…….
“…….”
땅 속에 숨어 있었다.
환상이 끝난 직후, 바로 내 옆에 있었던 판데르니안은 내 어깨를 쥐고 말했다.
‘가면 안 됩니다. 그 누구도 당신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설령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그리고 입 맞추더라.
‘공작님…… 이럴 때가 아닌…… 응…….’
그분은 언제든 나한테 뽀뽀할 틈만 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들이닥친 것은 페녹스였다. 페녹스는 검을 빼 들고 등장했다.
‘페리야!’
눈이 반쯤 돌아 버린 상태였다. 내가 드래곤에게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듯.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페녹스는 뽀뽀하고 있던 우릴 보고 멈칫하다가, 다시 찔찔이 모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 그런 페녹스와 한참 동안 말싸움해야 했다.
‘오빠가 다녀오마.’
‘아, 됐어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 제가 알아서 다녀올게요.’
‘그런 위험한 곳에 널 어떻게 보내!’
‘혼자가 더 안전해요.’
‘혼자라니, 그런 말 하지 말아라. 그 긴 시간, 너를 혼자 둬 무슨 꼴을 당하게 만들었는데…… 우리가 널 어떻게 혼자 보내.’
그 말을 하는 페녹스의 눈이 어찌나 충혈되어 있던지.
아니, 가체로 가면 무조건 안전하단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동생이 걱정되는 마음에 못 보내는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밀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라서 어찌나 답답하던지.
그리고 한참 또 옥신각신 후 나타난 것은 레리온이었다.
대체 다들 뭐 때문에 내가 위험하다 생각하는 건지, 그 놈도 검을 빼 들고 달려온 채였다.
레리온은 오십 미터 접근 금지를 마음대로 어겨 버리고 등장한 주제에, 나를 꽉 껴안기까지 했다.
‘……아가, 아가야…….’
‘…….’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오빠는 죽어. ……오빠가 널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응?’
그리고 눈물을 흘리더라. 또 빨간 눈물이었다!
‘……근데 눈물은 왜 맨날 그 모양이에요.’
‘미안하다…… 보기 흉하지?’
‘아니. 흉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눈물샘이라도 다친 거예요? 한번 봐 봐요.’
그리고 내가 깨끔발을 서서 봤지만, 사실 육안으로 뭐 어디 다쳤는지 확인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번에 페녹스가 레리온의 목을 그었던 그때처럼, 내가 치료해 볼까 싶어서 얘길 꺼냈더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니, 페리야.’
자길 걱정해 줄 때냐고 울먹이는 레리온에게 난 멀쩡하고 괜찮다고 대충 달래 준 다음.
그 뒤 다음 방문객은 혼테인이었다.
혼테인은 방문객 중 가장 여유로웠다.
그놈은 날 보자마자 입 맞추더니, 날 끌어안고 태평하게 이런 말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멸망하는 순간에 너와 함께하면 좋겠구나.’
얘는 날 걱정하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뒤로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그래서 나는 지금 땅 밑에 숨은 뒤, 흙사람들로 세상 동태를 보는 중이었다.
‘성국으로 가면, 성녀님이 우릴 살려 줄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