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20)
‘일단 짐 싸!’
아니, 다들 대체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건지! 정작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인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꾸욱 감았다.
***
한밤중.
흙사람을 올려 보내, 성국 임시 숙소의 지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지하실의 환풍구로 흙을 올려 보냈다.
그리고 그 흙을 뭉쳐 내 몸을 만들어 내고, 그 몸으로 정신을 옮겼다. 쨘! 최강 스파이님의 이동법이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엔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
나를 기다리고 있던 멜로놈이다.
멜로는 한껏 지친 얼굴로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얘가 요새 계속 리안 지방의 성국 숙소에 머무를 수 있던 것은, 성국에 모망 폐하가 자리를 지키고 계신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국에 밀입국자와 이민 신청자들이 폭증하는 지금, 멜로는 바로 성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 하니, 한동안 또 이별인 것이다.
멜로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나를 걱정하며 발발 떨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하러 가야 하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멜로였다.
일주일 동안 어디 숨어 있었냐는 등의 인사도 없이 본론부터 들어간다.
“……그 교황.”
“응?”
“네가 급하게 건너 올 줄 알고 모함을 퍼뜨렸단 것부터가 수상해. 그건 개소리고, 그냥 너를 마물로 몰아서 우리 대륙에서 고립시키기 위해서였겠지.”
나도 그렇게 의심하긴 했다.
“네가 진짜로 급하게 찾아가면 그 길로 드래곤들에게 바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신목님 말대로면, 아직 드래곤들은 남아 있는 것 같았으니.
그러나 교황의 예상과는 달리, 내가 마물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는데도 별자군 기사단까지 창립되질 않나.
그리고 신앙이 모여 다육이님의 기적이 임하니 태세를 바꿔서 완전히 내 편으로 붙은 것 같았다.
가서 드래곤이든 교황이든 다 패 줘야지.
아, 맞다!
“야, 여기.”
나는 멜로에게 주섬주섬 둘을 맡겼다.
기니피그가 된 햄스터님과, 선인장이 된 다육이님을.
지금부터 힘든 곳으로 가려고 하는 중이니 같이 가고 싶었지만…….
‘나는 여기서 쉬련다. 무사히 관광하고 오너라.’
라시지 뭔가. 관광이라니!
그 여유로운 태도가 나까지 안심되게 만들긴 했지만, 신목님은 해도해도 너무 느긋하신 태도라니까!
하여튼, 멜로와 난 긴 대화도 필요 없었다.
“명령이다. 앨리스 님의 복수를 하고 와라.”
그게 끝이었다. 멜로는 그 말을 하고, 자기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밀입국자 관련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멜로는 내가 실패할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가짜 성녀가 나타났을 때, 내게 명령을 내리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주 건방지고 오만하게, 세계 최강의 스파이에게 말도 안 되게 어려운 명령을 내리던 성왕 후계자의 모습이.
하지만 나는 씨익 웃었다.
“예전에 그 말 기억나?”
“바쁘니까 빨리 다녀와라.”
“성국은 우리 힘으로 위대해질 거라고.”
난 봤다! 서류를 보던 멜로의 입꼬리도 올라간 것을.
그렇다!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이 몸이 부하라면 그야말로 걱정하는 시간 자체가 낭비!
나는 세상에 못 가는 곳이 없고,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보람찬 임무가 될 것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난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우쭐거렸다.
“에헴!”
“빨리 가기나 해.”
내가 이용하려는 방법은 흙으로 변해 신대륙으로 이동하려는 것이었다.
흙으로 변한 나는 땅 속에서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맞다. 이것도 맡아 줘.’
나는 나의 새로운 본체를 멜로에게 맡긴 뒤, 흙으로 변해 땅속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저번에 내가 만들어 버린 신대륙으로의 육로 앞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육로 앞.
“……?”
난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지상 위에, 같이 있어선 안 될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판데르니안과 혼테인이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잘생긴 두 남자.
은발에 보석안을 가진 반짝반짝이와, 흑발에 금안을 가진 음험이.
그 둘을 모아 놓고 보니, 한밤중인데도 무슨 햇빛이 반짝반짝 비치는 것 같다.
왜 둘이 같이 있지?
분위기는 또 어찌나 험악한지.
그 둘의 표정은 마치 ‘어쩔 수 없이 같이 있긴 하는데, 기회만 생기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난 몰래 슬금슬금 움직였다.
어차피 지금의 나는 아무리 초인들이라도 감지할 수 없는 흙 그 자체였고, 그마저도 지하에 있는 상황이라 전혀 상관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때였다.
“저기다.”
판데르니안의 보석안이 반짝이면서,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의 눈동자가 한밤중인데도 번쩍였다. 마치 빛을 쐰 보석처럼.
저거 뭐야?!
내가 놀라는 사이, 혼테인이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바닥에 손을 댔다.
그리고 난 꼼짝없이 묶여 버렸다.
***
그리고 판데르니안은 마치 땅에서 무를 캐듯 나를 캐냈다. 나는 분명 흙인 상태였는데, 다른 흙과 나를 구분하여 나만 캐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인간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난 취조를 받는 신세가 됐다.
판데르니안이 날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삐진 듯싶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아니, 공작님. 눈…… 눈 그거 뭐예요?”
뭔데 나를 알아보는 건데?
“아…….”
그때 난 기억해 냈다. 성서에 보석안은 진실을 보는 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추측에 답을 더해 주듯, 공작님이 말한다.
“다육이가 말해 주더군요. 신앙이 모여서 제 눈도 원래의 기능을 되찾은 것이라고. 그리고 이럴 줄 알고 당신께 비밀로 하고 있었습니다.”
혼테인도 거들었다.
“그래서 이 멍청이와 협력해서 너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단다.”
“죽고 싶지?”
난 둘이 싸우려 하는 것을 무시하고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 명은 수색, 한 명은 포획.
판데르니안의 눈으로 나를 찾고, 혼테인의 속박의 예기로 나를 붙잡을 셈이었나 보다.
그런데…….
난 둘을 지켜보며 한 가지 의문에 빠졌다.
둘 사이가 이렇게까지 나빴나?
그래도 그 전에 파티장에서는 그냥 데면데면한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 혼테인까지도 판데르니안에게 어떻게든 시비를 걸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등을 돌리면 둘은 당장이라도 서로를 향해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왜 그런가 생각하던 나는 그게 나 때문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런…….’
그런데도 둘이 협동해서 나를 잡으러 온 것이다.
어찌 보면 속박이라고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니까.
한참 혼테인과 신경전을 벌이던 판데르니안이 한숨을 푹 쉬고 내게 물었다.
“어떻게 흙으로 변해 있는…… 아닙니다. 지금은 묻지 않기로 하죠.”
“……감사합니다…….”
“같이 갑시다.”
아니, 안 된다.
난 두 손과 고개를 막 저으며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 분은…….”
“응.”
“느리잖아요…….”
내 대답에 그들이 황당해했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나는 흙으로 변한 상태에선 땅을 통해 초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기니피그님 덕에 기운을 완전히 회복한 나는 내 자신이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그러니 이분들은 초인이라도…… 인간의 육신을 가진 이상, 내 속도를 따라올 순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도중이었다.
나는 근래 계속 궁리했던 결과를 말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지금 이 진지한 순간에 말할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 둘의 정신을 홀려 놓기 위해서!
“저…… 그…… 출발하기 전 중요한 순간에 이런 얘기 하기 좀 그렇지만…….”
“예.”
“……응.”
“제가 아주 멋지고 창의적인 해결법을 찾아냈어요. 만족하실지 모르겠지만…….”
난 쪼그려 앉아서, 땅에 양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쑤욱!
마치 무 뽑듯, 흙에서 내 몸 하나를 만들어 끌어 올렸다.
판데르니안과 혼테인의 표정이 볼만했다.
“전 몸이 두 개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
“…….”
“각자 하나씩 가지시는 거예요! 저를요! 그럼 공평하고, 불만도 없을 거고……!”
그때, 판데르니안이 먼저 왼쪽의 나를 껴안았다.
“지금 그런 게 문제입니까.”
“…….”
그때 혼테인은 나머지 한 명의 나에게 입을 맞췄다.
“읍!”
“이 자식이…….”
당장 혼테인의 멱살을 쥐는 판데르니안을 말리느라 고생깨나 하고.
나는 그 둘 앞에 당당히 서서 말했다.
“날 믿어 주세요. 돌아올게요.”
난 둘을 차례로 포옹했다. 하지만…….
“……위험하잖니.”
“이런 걸로 정신 빼 놓고 도망칠 생각 하지 마십시오.”
통하지 않았다!
***
우리의 의견은 계속 평행선을 달렸다.
나의 주장은 이렇다.
일단 내가 먼저 출발하면, 이 육로로 둘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은 적어도 누구 한 명이라도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령 자기들이 아니어도 되니까, 페녹스라도 데리고 가라면서.
……어?
그러고 보니.
난 진지하게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딱 한 명은 같이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흙으로 변해서 초고속 이동을 하되, 흙으로 변한 내 위에 한 명을 올려놓고 이동하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동 수단이 되는 것이지!
물론 내 속도에 버틸 수 있는 정도의 인간은 되어야겠지만…….
“……한 명은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내 계획을 둘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둘의 표정이 똑같이 뿌듯하게 변한다.
둘 다 그 ‘한 명’이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 얼굴들을 보니 왠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하지만…….
앨리스 님의 복수를 위한 임무.
그것에 함께할 수 있는 단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그 사람뿐이다.
앨리스 님을 누구보다 가장 사랑했을…….
물론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죽을지도 모르고, 드래곤한테 고문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같이 죽으면 되지!
아마 그쪽도 나랑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판데르니안과 혼테인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
앨리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다녀오면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했었다.
그걸 말하는 것이었나.
탑 꼭대기 층. 레서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의 입장에선 드디어 알게 된 것이었다. 가장 사랑하던 아내가 죽은 원인을.
그간 수많은 이야기가 돌았다.
부인을 죽인 것은 사실 레서 선공작이 아니겠냐는. 아니면 그 수많은 기사들을 어떻게 다 몰살시킬 수 있었겠냐는 이야기의…….
그런 오명들이 모조리 벗겨진 것이지만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는 환상을 본 날 이후로 잠도 못 들고 있었다. 그때 본 아내 얼굴이 계속 생각나서.
그런 이유에서 계속 돌아다녔던 거였어.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당신은 항상 열심이었구나.
나는 그것도 몰랐지 뭐야. 이제 와선 아는 게 있기나 했는지 모르겠네.
모든 것이 무력했다.
딸은 세상의 구원자로 이름 날리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까지.
제국 내에서 패권을 쥐어 봤자 결국 아내도 지키지 못한 머저리였을 뿐.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그가 서 있던 탑 창틀을 밟고, 누군가가 ‘쨘’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딸아이였다.
레서는 왈칵 눈물이 올라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가기 전에 아비를 찾아왔구나.
건강히 다녀오라고, 무사히, 무탈히 다녀오라고. 그런 말을 하며 딸아이를 보내 줘야 하는데.
목구멍이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마치 불덩이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겨우 내뱉은 것은 이런 말이었다.
“……도망가자. 아비와 같이…….”
“…….”
“나는 너를 내놓을 수 없어. 더는 누구도…… 잃을 수가 없다…….”
그러고 레서가 딸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때 페리가 씨익 웃고 레서를 살짝 밀었다.
역시 징그러운 것이겠지. 이 더러운 아비가.
그렇게 체념한 레서에게, 맑고 쾌활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냐. 같이 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물론 레서 선공작님은 위험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저랑 같이 죽을 수도 있고…….”
페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서에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페리는 씩씩하게 말했다.
“엄마의 복수니까, 당연히 같이 가실 거죠? 아빠니까!”
레서는 그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라고.
카이바탄 대륙의 성국.
페리안이 나고 자란 대륙과는 달리, 이 대륙에서는 신성제국의 의미와 위용이 남달랐다.
신성제국의 성은 검은색 대리석 산을 깎아 만든 건축물이었다. 대단한 규모였다. 단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대리석 표면은 얼마나 세심하게 조각되어 있는지, 햇빛이 반사될 때마다 불규칙한 선형 패턴이 화려하게 그 위용을 자랑했다.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붉은 깃발들은 황금실로 자수를 놓아 그 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 섬이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엔 몇백 년 동안이나 짙은 안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안개 속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열기구나 와이번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개가 최근에 걷혔다.
사람들은 이것이 멸망의 징조라 생각하며 두려워했으나, 안개가 걷힌 것은 페리가 드래곤이 사는 위치를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신의 기운에게서 숨으려는 마법이 해제된 것이다.
그 속사정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섬에 무엇이 있을지는 누구나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드래곤들.
그 탓에 그 화려한 성에 살던 사람들도 다 대피한 지 오래.
아직까지 성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어두컴컴했다.
이 대륙에 사는 사람들도 다육이 신목이 보여 준 환상을 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이 없으면 앞으로 일 년 안에 세상이 멸망할 것입니다.’
‘성녀님. 세상을 구원해 주십시오.’
교황이 실토한 비밀도 본 상황.
그러니 그들은 무력하게 성녀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대륙을 건너 먼저 성녀를 찾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멸망이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패배감과 무력감이 그들의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화처럼 영웅이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때였다.
새롭게 나타난 육로에서 한 사람의 인영이 빠르게 미끄러지듯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성녀님인가?!
페리가 만들었던 새 육로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자진해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가, 안 힘드니?”
마치 미끄러지듯 흙을 타고 전진하는 것은 웬 남자였다. 그것도 자신이 타고 있는 흙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의아해지던 그때.
레서가 그들 앞에 정지하고, 그가 타고 있던 흙에서는 한 여자가 튀어나왔다.
성녀의 등장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감격으로 벅차오르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페리가 말했다.
“시간 없으니 본론부터 갑시다!”
***
내 말에, 마치 사람들은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착착 나와 레서를 교황 앞에 데려다 놓았다. 정말 조금의 허례허식도 없이.
환각에서 본 그 사람이었다.
레서 선공작의 얼굴은 교황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교황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물론 대륙 간의 교역이 열렸던 시점에서도 모든 걸 비밀로 하고, 내가 마물이란 거짓 소문까지 퍼뜨리긴 했지만…… 음. 지금 생각하면 잘못이 많군.
난 내가 먼저 따지려다가, 레서한테 맡기기로 했다.
레서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퍽
늙은 교황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악!”
“선공작님!”
깜짝 놀라 말려야 했다.
물론 레서도 바보는 아니니 알 것이다.
나를 고립시켜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마물이라는 소식을 퍼뜨렸을 것이란 사실 정도는.
단지 내가 해명을 위해 빨리 건너 올 줄 알고 마물이란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엔 허점이 너무 많으니까.
게다가, 내가 이렇게 멋지고 대단하고 유능한 스파이가 아니었으면 마물이라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대륙에서 마물 사냥이라도 당했을 것이다.
내가 레서를 말리고, 여차저차 교황의 피를 다 닦을 즈음.
레서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할 말이 많지만 다 생략하겠소. 내 딸이 성녀라는 건 무슨 의미이지?”
사실, 나 이 전개 알 것 같다!
이런 연극도 자주 봤다. 내가 본 전개대로라면 내가 신이 된다! 그럼 세상이 구원받는 거지!
에헴. 난 슬쩍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신이 되는 거 맞죠?”
“……그건 아닙니다만…….”
교황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엥.
“성녀는…… 세상에게 억지를 부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억지가 뭐길래, 내 딸이 위험에 처해야 하느냔 말이야!”
레서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사실 시원하기도 했다.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확실히 해야지.
일이 꼬이게 만든 것은 이 신대륙 교황의 판단도 있던 것이다.
하다못해 판데르니안이 해로를 개척했을 때라도 우리 쪽 대륙에 신에 대해 언급했어야 했다. 모르는 척 말고.
‘항로가 개척되었을 시점엔 내가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는 말았어야지.’
“……억지를 부린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세상의 규칙을 마음대로 흐트러 놓을 수 있는 것이지요.”
뒤이은 그의 말은 황당했다.
“대지는 만물의 어머니입니다. 모든 것을 만들고 창조하는 힘……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요.”
레서의 시선이 나로 옮겨 온다.
“흙으로 인간을 빚으면서, 성경에 나오는 신의 능력과 자신의 능력이 동일하다 생각한 적 없으십니까?”
“어릴 때야 그러긴 했지만…….”
그런데 이 아저씨, 내가 어떻게 사람을 빚을 수 있는 걸 알고 있지?
교황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내가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하는데 교황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예?
“성녀란 것은 그것입니다. 신을 선택하는 존재.”
너무 막연하고 황당한 소리에 뭐라 대답하지도 못했다.
“당신은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신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기에 신의 기운이…….”
“아니.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내가 황당해하며 그의 설명을 끊고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늙은 교황은 오히려 난처한 듯 망설이다가 이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성녀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모르는데요.
난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황스럽고 멋쩍어서 레서 선공작도 다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오히려 교황이 내게 뭐라도 맡겨 놓은 것처럼 구는 게 아닌가. 그가 한순간에 절망한 얼굴을 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레서 선공작이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황의 멱살을 잡았다. 여기까지 온 내 딸아이에게 지금 언성을 높이는 거냐면서.
데려오길 잘했다!
응접실이 또다시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난 레서를 대충 말렸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물었다.
“근데 제가 신을 선택하면, 그 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멜로를 선택한다고 쳐 보자.
“약 팔백 년 전에 기운이 다해서 죽었다는 그 신처럼, 오랫동안 세상을 위해 이용만 당하다가 죽는 건가요?”
“……그건…….”
맞나 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환상에서 더 많은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신은 세상을 너무 많이 사랑한 나머지, 조금도 쉬지 못했다. 그리고 회복할 여유가 없어서 기운이 고갈된 것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과로사라고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