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130)
어쩌다 구원했지만, 책임은 안 집니다 18화(18/18)
18 외전- 비극이 없었던 세상
페리 유아화 사건 열흘 뒤.
레리온은 눈을 떴다.
“오빠야, 나만! 나만 파티장에 못 갔잖아아…… 오빠가 늦잠 자서…….”
서러워서 투정 부리는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상체를 일으키자 보이는 것은 응석꾸러기 여동생이다.
오빠가 덮고 있는 부드러운 침구 위에 얼굴을 비비는 조그마한 여자아이.
깨끗한 오로라가 일렁이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리본으로 묶여 있고, 파티용 드레스는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하게 펼쳐져 있다.
이윽고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한 커다란 연자색 눈동자가 레리온을 마주 보았다.
열두 살 된 페리였다.
그리고 페리는 또 제 첫째 오빠의 이불을 확 잡아당겨 빼앗더니, 오빠의 배에 얼굴을 묻고 투정을 부렸다.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바보야.”
이게 무슨 상황인 것인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레리온의 머릿속에, 기억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한다.
‘내일 파티장에 데리고 가 줄게. 오늘은 이만 자자.’
‘진짜야! 약속이야!’
레리온은 오늘 파티장에 페리안을 데리고 나가 준다고 약속해 놓고, 그대로 늦잠을 자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멍하니 어린 동생을 바라보던 레리온의 머릿속에, 그동안 페리가 자라면서 있었던 일들이 마구 떠올랐다.
‘형아!’
페녹스가 부르는 호칭이 입에 옮아, 자신을 형아라고 부르던 세 살 아기 페리안의 모습.
‘뱀뱀이다! 어흐응!’
네 살 페리가 씩씩하게 죽은 뱀을 주워 왔던 것.
‘나도 여기서 공부할래애애애- 으아아아앙-.’
여섯 살 페리가 오빠 옆에서 공부하겠다고 운 것.
‘나와 거래하지, 레리온 공!’
그리고 여덟 살 페리가 장난감을 사 달라고 몰래 협상을 걸어오던 것까지…….
레리온의 수려한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감히 가져서도 안 될 귀한 기억들이었다. 있어서도, 있을 리도 없는 사실들이었다.
그는 바로 깨달았다.
여기는 페리안이 탑으로 쫓겨나지 않은 세상이라고.
그때였다. 페리안이 슬쩍 눈동자를 굴려 오빠를 바라보더니,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벌떡 일어섰다.
“오빠 미워!”
그리고 페리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오로라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레리온은 본인의 차림새도 신경 쓰지 못한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허겁지겁 제 막냇동생을 쫓아가기 위해 문을 나선 순간.
-쿵!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레리온은 이 급한 상황에 상대가 누구라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막상 부딪힌 상대방을 보고 나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페리안과 마찬가지로 검은빛 머리카락에, 아직은 어리지만, 훗날 커서는 엄청난 미남이 될 것이 빤히 보이는 잘생긴 소년.
역시, 마찬가지로 어려진 페녹스였다.
훗날 세계에서 제일 정의롭고 강한 기사로 이름을 날리게 될 둘째 동생.
그리고 어린 페녹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같이 다른 세상으로 전이되었음을.
***
그 시각, 레서도 눈을 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새로운 기억들을 받았다.
이곳은 앨리스가 죽지 않은 세상이었다.
앨리스가 죽지 않았으니, 페리는 쫓겨나지 않았다.
그 후 아기는 4살 생일에 흙장난을 치다가 대지의 기운을 다 소모하고 만다.
온 세상 귀족들이 다 참가한 호화로운 생일 파티에서, 페리의 머리색이 엑저의 색으로 돌아오는 소동이 벌어졌었다.
‘아빠! 나도 까매졌다!’
‘……페…… 페리야!’
페리는 모래 묻은 작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 상황이 얼마나 중했는지도 모르면서.
머리색이 바뀌었다고 신나 하는 딸의 모습.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가끔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행복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이런 기쁜 기억들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 딸은 내가 직접 내쳤는데…….
게다가, 그렇담 앨리스는?
두통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며, 기억을 되새김질하였다.
‘오래간만에 둘이서만…….’
‘나 참.’
앨리스는 죽지 않았고, 아이의 머리색이 돌아온 것을 계기로 명예까지 회복되었다.
그리고 첫째가 장성한 지금도 둘 사이는 매우 좋았다.
지금처럼, 앨리스와 레서 둘이서 부부만의 여행을 올 정도로.
둘 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실력자들이다 보니, 기사도 수행원도 없이 둘만의 오붓한 여행이었다.
마침 어젯밤 앨리스에게 히죽거리며 농을 걸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아들놈 다 키워 놨으니 부모도 보상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그치?’
앨리스는 말없이 웃으며 동의했고, 그래서 둘은 레리온에게 공작성 일을 맡기고 출발한 와중이었다.
치기 어린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민간인인 것처럼 변복도 하고 호화 숙소에서 묵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깨어났다. 그게 이 세상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잠깐.”
레서가 번득, 옆자리를 확인했다.
그러나 앨리스가 누워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앨리스는 자신의 모습을 세 부자에겐 절대 보여 주지 않았다.
최근에 페리를 어려지게 만드는 장난을 치고도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그런데 이 세상에서조차 앨리스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레서의 손이 벌벌 떨렸다.
지금 이 이상한 상황도, 저번 상황과 마찬가지이리라.
신이 된 앨리스가 주도하여 만든 사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앨리스가 여기서도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은 아직도 레서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소리.
원래의 역사와는 달리, 살아 있는 앨리스가 있는 세상인데도…….
아직도 용서받지 못했다.
레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용서를 바란 것도 잘못되었다. 레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용서라니, 속 편한 생각이었다고.
그러나 만약 앨리스를 끝까지 만나지 못하더라도, 내 딸로서 자란 딸아이 얼굴이라도 봐야 한다.
레서는 굳게 다짐하고 출발했다. 목표는 엑서 공작가 본성이었다.
***
“남아 있는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두 분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다면서 여행을 가셨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는 어머니를 뵙고 계신 건가? 부럽군.”
소년 페녹스가 아쉬운 얼굴로 아버지를 부러워하는데, 레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성정에 그러실 리가.”
“……하긴.”
“아마 아버지도 지금쯤 우리처럼 당황해하고 있겠지. 곧 다시 본성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한다.”
“마법구로 먼저 연락해 보는 건 어때?”
“안 가지고 가셨어.”
그렇게 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도중이었다.
맑고 깨끗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끼어들었다.
“돼지들 뭐 해?”
페리였다.
껄렁껄렁, 편한 드레스 입은 어린이 깡패 페리가 걸어왔다. 둘이 입을 막았다. 너무 귀엽다.
오빠들을 돼지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몹시 귀엽고 앙증맞기 짝이 없었다. 제국 제일가는 신랑감들이 돼지라고 매도당한 상황이지만, 그들은 상관없었다.
원래 여동생이란 건 아무 근거 없이 오빠를 돼지라고 욕하는 존재인 것이다.
둘 중 누구도 ‘왜 내가 돼지야?’라고 묻지도 않았다.
이 애가 돼지라면 돼지인 것이다. 둘은 돼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더 해 줬으면 했다. 더!
참다못한 페녹스가 중얼거렸다.
“꿀꿀…….”
레리온이 그런 페녹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면서도 큰 돼지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가 파티 열어 줄까?”
“됐어!”
열두 살은 여자 인생에서 가장 냉소적일 나이였다. 약속을 어겨 놓고 그런 식으로 회유한다고 넘어갈 온화한 연령대가 아니다.
어린이 깡패 페리가 귀여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허리에 손을 얹고 상체를 가까이 숙였다.
오빠들을 위협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페녹스가 그 자리에서 페리를 껴안을 뻔한 것을 레리온이 붙들어서 막아 냈다.
그리고, 페리가 오빠들을 위협한 이유는 간단했다.
“대신, 나 오늘은 멜론만 먹을래.”
“응?”
“나 편식했다고 이르기만 해 봐!”
어린이 공녀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두 오빠를 위협했다.
이번에는 레리온도 참지 못하고 페리를 껴안았다. 페녹스도 참지 않았다. 순식간에 삼 남매가 한 덩어리가 됐다.
페리가 꽤앵 소리 질렀다.
“놔! 돼지들아!”
***
이 세상의 페리는 멜론을 좋아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입맛이 달라질 이유는 없으니, 원래 세상에서의 페리도 멜론을 좋아할 것이다.
그 밖에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페리의 기호와 사소한 성향까지.
원래 세상에서는 페리가 말해 주지 않을, 새로 얻은 지식들이 그 둘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둘은 지금…….
“녹스가 다 깎아.”
페리에게 멜론을 깎아 주고 있었다.
어린이 페리는 오빠들이 과육을 정량보다 더 깎아 내기라도 할까 봐 아주 매서운 눈빛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 중 더 껍질을 얇게 깎을 수 있는 페녹스에게 업무를 과중시키기까지!
급기야 페리가 레리온에게서 멜론을 빼앗으려 들자, 레리온이 말렸다.
“껍질 쪽은 맛없어. 다 먹으면 또 깎아 줄게.”
동생을 달래는 목소리에 사랑이 담뿍 담겨 있다.
이깟 멜론이 뭐라고, 쪼끄만 게 눈을 부릅뜨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그러나 멜론 집착 어린이 페리가 오빠들에게 잔소리하는 이유가 있었다.
“안 돼…… 개수를 들킬 거야. 아빠가 저번에 멜론 냉장실에 마법을 걸어 놨단 말야…….”
이 세상의 페리는 밥이랑 빵은 안 먹고 과일만 먹으려고 들어서, 아버지에게 계속 제지당하는 게 일상이었다.
‘너 키 안 자라면 어쩌려고. 과일만 먹으면 못써요.’
‘안 자랄 거야!’
이 세상에서도 아버지가 페리의 양육 담당이었다.
특히나 아이의 출생을 의심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극정성으로 키우는 중이었고.
그러나 지극정성으로 키운다는 것이 무조건 오냐오냐한다는 뜻은 아니다.
애가 멜론만 먹고 싶어 한다고 정말 그것만 주는 것은 올바른 양육 방식이 아니니까.
페리가 좀 자라서 어린이가 된 지금도, 페리의 건강을 진짜 걱정하며 잔소리하는 게 레서였다.
그래서 레서는 페리가 멜론만 먹는 것을 제한했던 것이다.
레리온이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쯤은 실컷 먹게 해 줘도…….’
괜찮겠지.
아버지와는 달리, 나쁜 양육 방식의 예시였다.
두 꿀꿀이들이 멜론을 열심히 깎았다.
페리가 배부르다고 할 때까지 멜론을 먹이고, 셋은 놀러 가기로 했다.
“오빠, 아빠엄마 일 해야 하잖아. 괜찮아?”
“응. 괜찮아.”
일이 대수랴.
페리가 지금처럼 오빠라고 순순히 불러 주며 따라오기만 한다면, 레리온은 불지옥에라도 뛰어들 수 있으리라.
물론 페녹스도 마찬가지였다. 페녹스는 페리가 오빠라고 부르는 게 너무 좋은 나머지, 자꾸 장난을 치다가 한 대 얻어맞기까지 했다.
***
“우와. 날씨 좋다.”
셋은 금빛 강으로 뱃놀이를 하러 왔다.
엑저 공작가의 자랑 중 하나인 금강.
이곳의 수면 아래 깊은 곳에는 금이나 보석 같은 광채를 발하는 광석들이 잔뜩 깔려 있어, 배가 물살을 밀고 나아갈 때마다 햇빛에 반사된 황금빛 물이 찬란하게 빛난다.
일부 사람들만 아는 진실도 있다.
이 밑에 깔린 것은 진짜 금이 아니라 비슷한 성질의 광석이라 알려져 있지만, 그건 도둑들을 방지하기 위한 거짓 소문일 뿐 실제로는 진품이라는 진실 말이다.
그리고 그 호화로운 강에서 배를 띄우며, 셋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리온은,
‘정말 이렇게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페녹스는,
‘페리의 볼 깨물고 싶군.’
페리는,
‘멜론 먹고 싶다!’
그렇게 각각 다른 생각을 품고, 배가 황금빛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
레리온은 계속해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자꾸 만져.”
페리는 그렇게 투덜댔지만, 막상 옆으로 도망치지는 않는다.
아까도 그랬다. 배가 잠깐 흔들렸다고, 곧바로 오빠 옆에 와서 앉았다.
말로는 ‘돼지돼지’ 해도 심적으로는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엇보다, 세 오누이 간의 사이가 막역하다는 것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페리가 웃고 있는 장면이 증명했다.
그때, 페리가 갑자기 죽은 듯 조용해졌다. 쑥스러움을 타듯.
그리고 레리온과 페녹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세 오누이가 이렇게 노는데 빤히 쳐다볼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레리온과 페녹스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정체를 깨닫고 소리를 냈다.
“아.”
“왜, 오빠?”
“아니야.”
두 형제를 굉장히 한심하게 쳐다보는 얼굴.
그건 바로, 판데르니안이었다.
페녹스가 그제야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어린이 페리를 만난 것이 너무 좋아서, 셋째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말 미안한 노릇이었다.
원래 세상에서는 페리와 혼인시키려는 목적으로 엑저 공작가에 입양한 판데르니안.
그렇담,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레리온과 페녹스가 기억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이쪽 생에서 판데르니안을 공작가에 끌어들인 것은 앨리스였다.
‘예전에 내가 보호하던 아이 중 하난데, 성국의 기사가 되었다지 뭐니. 페리한테 호위로 붙여 주고 싶어서 허락받고 데려왔지.’
‘…….’
지금의 판데르니안은 성국의 소년 성기사였다. 어떤 경로로 성국까지 가서 기사가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원래 세상에서의 페리와 처지가 바뀐 셈이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막내, 페리안이 조용히 우물쭈물하고 있었으니까.
페녹스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외양은 소년이지만, 속에는 다 큰 성인 남자가 들어가 있지 않던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페리의 반응은 그것이었다. 신경 쓰이는 남자애 앞에 서서 부끄러움을 탈 때의 반응!
아니나 다를까.
페리가 먼저 조용히 속삭였다.
“있잖아…….”
“응?”
“저 기사님 봐 봐. 아이, 대놓고 보지 말고!”
페녹스는 그야말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생을 빼앗긴다는 충격에 눈앞이 캄캄했다.
판데르니안과 페리가 다른 세상에서도 이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직 어린 내 새끼가 벌써!’
우리 품을 떠나려 하고 있다니!
“성국에서 온 기사님이래. 성국이라니, 낭만적이지 않아? 성국 왕자님이랑도 안면이 있으시댔어.”
“그…… 저번에. 어머니께서…… 네 호위기사로 임명할까 고민 중이시던데.”
“안 돼. 부끄럽잖아!”
입으론 안 된다고 하면서도, 마냥 싫은 기색은 아니다.
애초에 부끄럽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다는 증거!
페녹스가 흘깃 판데르니안을 쳐다보았다.
판데르니안의 청력으로는 이미 페리의 귀여운 수다가 다 들렸을 것이다.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아직 소년인 그 잘생긴 얼굴에 페녹스를 향한 승리의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페녹스와 판데르니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판데르니안은 보란 듯 비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
원래 세상에서의 기억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깐. 판데르니안이 그렇다면…….’
혼테인도 원래 세상의 기억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페녹스가 황급히 기억을 되새겨 봤다. 혼테인은 원래 세상에서보다 페리와 더 친하게 자랐다.
한쪽은 갑자기 나타난 설레는 기사님에, 다른 한쪽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자란 친한 오빠에.
이 세상에서는 누가 우위를 점할지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
그렇게 계속 뱃놀이를 하던 도중.
페녹스는 셋째가 신경 쓰였다.
판데르니안은 계속 조용히 서서 그들을 호위하고만 있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성국 성기사라는 지금의 신분으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페녹스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셋째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
‘원래 세상에서는 두 형에게 욕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 우리 망나니가…….’
어쩌면 모욕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페리 덕분에 행복하기만 했던 그들이 미안해지지 않는가.
페녹스가 레리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님. 나는 판데르니안을 보고 올게.”
“그러렴.”
이윽고 페녹스가 페리 몰래 판데르니안을 데리고 작은 선실로 들어가고.
배 위에는 레리온과 페리 둘만이 남았다.
사실, 레리온은 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기억 속, 불화 없이 평탄하게 자란 남매는 아주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가끔은 레리온이 페리를 먼저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레리온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빠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단 것을 눈치챈 페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왔다.
“오빠 졸려?”
“아까처럼 돼지라고 불러 주겠니?”
일부러 기세 좋은 척 장난을 치니, 페리가 손바닥으로 오빠를 소리 나게 때리며 웃었다.
***
그 시각, 배 선실 안쪽.
페녹스가 판데르니안을 붙들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어린 셋째의 모습은 오래간만이라 귀엽기도 했다.
“판데르니안.”
“왜.”
“이 건방짐은 역시……! 역시, 너에게도 기억이 있었구나!”
“보면 모르냐?”
페녹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상황. 기억이 존재하는 아군이 한 명이라도 더 생긴 건 좋은 일이니까.
이윽고 페녹스가 판데르니안을 붙잡고 페리 자랑을 십여 분간 하기 시작했다.
오빠들이 깎아 준 멜론을 먹다가도, 돼지들 먹으라며 하나씩 챙겨 주는 것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느냐 등등.
페녹스는 판데르니안이 주먹을 치켜들고 난 뒤에야 쓸데없는 수다를 멈췄다.
그리고 더 건실한 고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셋째야. 대체 왜 이런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는 걸까.”
“…….”
“어머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아기 페리의 모습 다음엔, 다른 세상으로 전이되어 어린이 페리를 만나 보다니. 대체 이유가 뭘까?”
그런데 판데르니안은 ‘아직도 몰라?’라는 눈으로 제 형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난 알겠는데.”
그러고 보니, 저번에 아기 페리 사건 때도 판데르니안은 무언가를 이미 짐작하는 눈치이지 않았던가.
페녹스가 판데르니안을 붙잡고 징징거렸다.
“같이 좀 알자꾸나.”
“내가 왜?”
판데르니안은 페녹스를 밀쳐 내고 유유히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