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27)
“말로만이라지만, 시녀와 주인은 친구라잖아. 난 그분 따님의 친구가 되고 싶었어.”
“…….”
“하지만 기대한 내가 나빴지. 앨리스 님이 훌륭하고 고귀하신 분이었다고 내 멋대로 따님에게까지 환상을 씌우고 기대한 거야.”
난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할 말을 잊고 조용히 있었다.
배 안쪽부터 따뜻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가슴이 울렁울렁한 것 같기도 하고.
옐베리는 공녀를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내 어머니를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 얼굴에서, 본인이 존경하는 앨리스 님의 흔적을 찾으며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 혼자 상상하고 기대한 것과는 달라서, 나도 모르게 제멋대로 실망하고…… 내 멋대로 동경하다 혼자 실망이라니. 나도 참 최악의 인간이구나.
그런데…… 그런 와중에, 공녀님과 똑같이 생겼다는 네 얘기를 들어서…….”
“…….”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친해지려고 다가간 거야. 브라운 네 상황이 고립된 걸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조금만 호의를 베풀어도 넘어올 줄 알고…… 그냥 그렇게 비겁하게…….”
“…….”
“미안해, 기분 나빴지?”
옐베리의 뺨을 타고, 턱에서 뚝뚝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정말 잉이었다. 잉.
기사가 이런 일로 우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더 어이없는 것은, 나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나는 원래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
상상도 못 했던 어머니와의 끈이 여기 있었구나.
그런 사실이 이상하게 와닿았다.
방금 페리안 공녀한테 얻어맞고 와서 그런가. 내가 왜 이러지.
나는 갑자기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그동안 쭈욱 아무에게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앨리스 님이 외도로 아이를 낳은 건 신경 안 써?”
그분을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하기엔 퍽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생각 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앨리스 님이 외도를 하셨다면…… 레서 선공작님 잘못이겠지. 뭔 짓을 했겠지.”
그 말을 하는 옐베리는 정말 천연덕스럽고 능청맞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난 안 믿어. 앨리스 님의 유전자가 너무 강했던 거 아닐까? 그분이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을 거야. 어쨌든 신경 안 써.”
신경 안 써.
그 말이 가슴속에 콱 와서 박히는 것만 같다.
“우리 화장 다시 해야겠다. 세수부터.”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으히히 웃었다.
옐베리가 사실을 알게 될 날이 올 일은 없겠지.
나는 속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을 삼켰다.
네가 믿는 앨리스 님은 정말로 불륜 따위 저지른 적 없다고.
엑저 공작성은 단지 성 하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시급의 규모 안에 여러 채의 성과 세월의 흐름을 반영한 양식의 건물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고, 그 전부를 공작성이라 부른다.
그 안의 건물 모두 다 역사적 가치가 대단한 것들이었지만, 그중 특히 최고로 뽑는 것은 다섯 채의 성이었다.
그리고 그 다섯 개 성 중 하나.
크기는 가장 작아도, 호화로운 고딕풍 건축 양식과 아름다운 외관으로 자랑스러운 성이 있었는데, 그 성의 이름이 바로 엘리자베스 캐슬이었다.
평소에 출입 금지인 엘리자베스 캐슬은 오늘만큼은 이방인을 환대하며 활짝 개방된 상태였다.
엑저 공작은 서제국에서 온 귀빈들을 환영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캐슬 전체를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람들은 입장 즉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출입 금지까지 하며 보존했는지 알겠다. 그것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성 내부 중심에 세워진 높은 탑에서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있었고, 각 층마다 탑을 중심으로 중앙에 크게 빈 공간이 있어 위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각 층마다 춤을 추기 위한 댄스 플로어와 식사 및 음주를 위한 자리가 따로 준비돼 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한 자리가 되기 위한 사교 테이블, 남녀 간의 밀회가 이뤄지기 딱 좋은 개인 방, 휴식 공간까지 완벽했다.
그러나 자유로워 보이는 이 교류의 현장에서도 기본적인 규칙은 있었다.
위쪽일수록 중요 인물이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건축 구조와 엄격한 능력에 따른 층 배치는 이곳이 그저 편안한 정찬회가 아니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러나 엄숙한 자리임과 동시에 젊은이들 특유의 혈기와 쾌활함도 공존했다.
그건 본인들이 두 제국의 교류 시발점에 있다는 충만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러 이들의 인맥과 성향을 모두 고려해 배치한 세심함 덕분이기도 했다.
이렇게나 정성껏, 온갖 배려를 다 한 배치라니.
사람들은 역시 판데르니안이라고 감탄했다. 완벽한 연회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세상 제일가는 호화로운 연회였다.
그리고 그 엘리자베스 캐슬의 최상층 연회장. 그곳엔 그야말로 별 같은 존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우와.”
나와 옐베리는 퉁퉁 부은 눈으로 조금 늦게 배치된 플로어에 들어섰다.
내 나라는 가난하긴 하지만, 스파이로서 온갖 화려하고 좋은 데는 다 들어가 본 나다.
그런데 그런 나도 순간 기가 질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연회였다.
그래도 다행히 옐베리가 준비해준 옷 덕분에, 창피를 당하지는 않았다.
주변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처럼 무릎을 가리는 길이에 몸 선이 드러나는 캐주얼한 복식을 한 사람도 많았다.
공식 연회라기보단 환대 정찬회이기에 가능한 복장의 자유였다.
가장 밑층에는 서제국 측에서 그렇게 아끼고 보물처럼 대우하는 성수들이 수십 마리가 돌아다니고.
우리는 그래도 시녀라고, 최상층의 바로 아래 플로어로 배정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최상층의 바로 아래 플로어였기 때문에, 물기둥을 중심으로 뚫려 있는 빈 공간을 통해 위층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 가능했다.
“저쪽은 진짜 별세계구나.”
아래쪽으로 갈수록 비교적 자유로워지는 분위기와는 달리, 한 층 위는 정말 고결함과 엄숙함의 극치다.
그때 옐베리가 내 옆에서 속삭였다.
“페녹스 경이 널 보고 있어.”
“……으.”
사실 옐베리가 속삭여 주기 전에 눈치채고 이미 눈을 아래로 내린 상태였다.
페녹스는 그 층 사이 텅 빈 공간을 통해 열심히 시선으로 나를 쫓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페리안이 날 때리는 장면을 보고, 그대로 대화 없이 헤어졌었지.
만나면 어색해서 죽을 게 뻔하다.
나는 일부러 옐베리와 착 달라붙어서 핑거푸드 먹기에만 열중했다.
그때 익숙한 얼굴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매번 날 치료해 주던 마법사 시녀, 유리스였다.
유리스가 우리 둘의 얼굴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너네 둘 눈이 왜 그 모양이야?”
……근데.
“유리스! 너야말로 뺨이 왜 그래?”
우리 눈이 붕어가 되어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정작 유리스의 뺨이 누가 봐도 맞은 것처럼 새빨갛게 부풀어 있는 게 아닌가.
공녀님 시녀의 뺨을 어떤 미친놈이 때리지?
물론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하다. 바로 미친 공녀 본인!
유리스는 바지에 손을 집어넣은 채 껄렁거리며 말했다.
“나도 공녀한테 말하고 왔거든. 관두겠다고.”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주변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단교했던 두 국가가 공식적으로 만나는 영광스러운 잔치인지라, 어디든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래서 맞은 거야? 왜 치료 안 했어?”
“사람들 보라고 그냥 왔는데…… 아파서 어질어질해. 브라운 너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
유리스는 ‘신체 강화 마법을 쓴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힘이 나오는 건 이상하다.’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예리하군.
마물 부산물로 신체가 강화된 상태니까 이미 일반인 근력이 아닐 거다.
그런데 옐베리가 잠깐 침묵하다가 조용히 되물었다.
“그동안이라니?”
“…….”
“…….”
맞다. 옐베리는 내가 그동안 맞고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지.
옐베리는 내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공녀에게 당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분홍색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차올랐다.
둘이서 옐베리를 달래고, 우린 퇴사 예정 고용인들이라는 같은 처지끼리의 수다를 시작했다.
“그래서 너희는 앞으로 어쩔 거야? 동제국이나 성국에서 계속 살면 힘들 거 아니야. 뭐. 난 서제국으로 돌아갈 거지만.”
그러고 보니 유리스는 애초에 서제국 출신이니, 일자리 구하는 것도 힘들지 않겠지.
“너희도 서제국에서 일자리 구해 보는 건 어때? 브라운 너도 아카데미는 거기서 졸업했다며.”
“난 서제국에서 머물 만한…… 자금이 없어서.”
그때 주변 사람들 모두가 위층을 쳐다보는 걸 발견했다.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유리스가 옆에서 속삭였다.
“혼테인 공이 들어올 시간이라. 다들 얼굴 한 번이라도 슬쩍 보고 싶어서 고개 쭉 빼는 거야.”
“아하.”
그리고 정말로 새로운 방문객들이 들어오는 듯, 단체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위쪽에서 들렸다.
혼테인을 포함한 측근 일행들이겠구나.
사람들은 유명인의 얼굴을 보고 싶은지 다들 내심 슬쩍 위쪽을 기웃거렸다.
물론 아래층에서 위층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들어진 구조가 아니므로, 사람들 대부분이 금세 포기했지만.
자연스럽게, 유리스와 옐베리의 대화 화제가 혼테인으로 옮겨졌다.
옐베리가 조용조용 남들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마 전까지 혼테인 공이 페리안 공녀님과 무탈하게 맺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애초에 왜 공녀님은 혼테인 공을 집어서 혼인하고 싶어 하셨을까?”
“제일가는 신랑감이라?”
혼테인 웬덤. 서제국 제일가는 권력자이자, 구설수도 없이 바르고 훌륭하다는 이미지만 가득한 남자.
물론 본인 오빠들도 그만큼 탐나는 신랑감들이긴 하지만, 오빠들이랑 결혼할 수는 없는 법이니.
세상이 자기 것 같은 공녀에게 소거법으로 남은, 어울리는 짝은 그 남자뿐이긴 하다.
근데 우리의 시시껄렁한 잡담을 듣던 유리스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이대로 맺어져도 좋게 끝나진 않을걸. 적어도 공녀한텐.”
“왜?”
“어…… 음.”
본인도 말해 놓고 아차 싶었는지, 유리스가 말을 고르다가 적당히 설명이 될 만한 이유를 꺼내놓았다.
“그냥 서제국 가십거리긴 한데, 혼테인 공 성격이 알려진 대로가 아니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막 범죄로 사업을 불린다든가. 완전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어딜 가나 사교계는 똑같구나!”
“그치. 질투로 말도 안 되는 저질스러운 험담 붙이는 거.”
옐베리는 재밌다고 웃고, 유리스는 멋쩍게 넘어가는 이 순간.
‘……?’
나는 새삼 유리스를 다시 보게 되었다.
유리스가 처음에 해 버린 말은 진심이었다.
공녀가 이대로 행복하게 결혼에 성공해도, 끝은 좋지 않을 것이란 것.
왜 그렇게 생각했냐는 질문에 유리스는 그냥 안 좋은 가십거리가 생각나서 해 본 말이라고 하고 넘어갔지만…….
‘혼테인이 범죄 조직과 얽혀 있는 건 사실이고. 성격 이상한 것도 사실이지. 저건 누군가한테 들은 사교계 루머가 아니고, 본인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정보야.’
뭐. 그렇다고 ‘사실 유리스도 나처럼 첩보원이었나!’ 하고 과잉 반응할 필요는 없다.
같은 서제국인인 데다가, 유리스는 능력 있는 마법사니까 상위 귀족과도 연이 많이 닿아 있을 거다.
그럼 본의 아니게 들으면 안 되는 정보도 듣게 되는 법이고.
나는 시큰둥하게 물기둥이나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저 물기둥으로 성수가 잘 올라와야 할 텐데, 하고.
그래야 좀 이따가 내가 모두 앞에서 죽는 계획이 원만해진다.
그런데 유리스가 나한테 팔짱을 끼고 물었다.
“맞다. 페리, 서제국에서 졸업했었지?”
“응.”
“혼테인 공이랑 동문 아니야?”
“그렇긴 한데…….”
동문이라지만 말이 동문이지, 당연히 남남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아카데미의 규모 자체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내부 진학을 기본으로 여러 교육 과정들을 통합한 시설이었기 때문에 어린애들부터 어른들까지 다 다녔고, 게다가 일단은 공립이라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다 있었다.
‘신분과 나이가 다른 사람들끼리는 얽힐 일 자체가 없을 정도였으니.’
“남이었지, 뭐.”
으쓱 하고 물기둥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그때.
난 그제야 깨달았다.
주변이 조용했다. 이 층, 아니 위층 사람들의 시선까지 다 이곳에 몰려 있었다.
나는 ‘망했다.’라고 속으로 읊조리며 뒤를 돌아봤다.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눈을 안 마주치는데, 매력적이게 낮은 저음의 음성이 웃음기를 담고 말을 걸어온다.
“남이었나?”
페리안 공녀가 그렇게 집착하던 대상.
바르고 번듯한 이미지에, 곧 서제국 최고의 공작이 될 하나뿐인 후계자.
그러나 실상은 미친놈인.
혼테인 웬덤이, 한층 내려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정말, 누가 라이벌 구도 아니랄까 봐.
생긴 것도 이쪽 공작님이랑 대비되는 외양이다.
빛조차 흡수해 버릴 듯한 검은 머리카락에, 색이 깊고 선명한 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