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3)
***
그리고 기적처럼 그 지옥에도 끝이 왔다.
버러지같이 살던 내 인생에도 영웅이 찾아왔다.
절대 열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철창이 한 사람에 의해 부서졌다.
날 구한 건 아빠도 오빠도 아니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니었다.
새하얀 예복 차림에 흰 망토를 걸치고 나타난 여자였다.
그분의 이름은 모망 록제.
록제 신성 왕국의 성왕이자, 후에 내 어머니가 되어 주신 분.
폐하와 나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난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가짜 육체를 빚는 힘도 서서히 떨어져 갔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거의 반쯤 썩어 가는 몰골이었던 나.
살점이 다 부스러져 가는 더럽고 역겨운 모양새.
누구라도 동정보다 혐오감을 느낄 상황이었다.
만약 내게 여유가 있었다면 미움받지 않기 위해 몸을 가리기 급급했겠지만, 난 팔 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인을 본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분에게 손을 뻗었다. 그저 절박하게. 내가 뭘 원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리고 안겼다.
폐하는 그 귀한 한쪽 무릎을 꿇으시곤, 나를 그대로 꽉 끌어안으신 것이다.
사람의 온기 한 번 못 느낀 채 갇혀 있던 나를.
버려진 이후로 아무에게도 안겨 본 적 없던 나를.
처음으로 사랑을 배운 순간을 기억하는가?
난 기억한다. 내겐 그때가 그 순간이었다. 사람의 체온을, 인간의 다정함을. 오직 단 한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렇게 그분의 품에 안겨 탑을 나왔다.
그 뒤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버려지고 죽어 가던 여자아이가 한 왕에게 구해졌다.
그 후 그 아이가 어떻게 살게 될지는 뻔한 이야기겠지.
그때부터 내 인생은 오직 폐하를 향한 일직선 여정이었다.
***
사실 그때 나를 구한 것은 폐하 입장에선 위험천만한 최악의 수였다.
우리의 록제 신성 왕국은 주권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신이 없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 세상에서의 성국이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가.
그건 우리 나라를 보면 알 수 있지.
교황도 추기경도 없다. 신전과 신관은 관광 상품.
치열한 냉전 중인 두 제국 사이에 끼어 당장이라도 흡수합병될지 모르는 처지.
그게 바로 록제 성국이 처한 상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성국은 쟁쟁한 양 제국을 연결하는 통로같이 생긴 나라다.
먼 옛날, 록제가 신성 제국으로서 온 대륙에 영향력을 끼쳤던 무렵.
그때 성국의 좌우 왕국은 스스로 국명을 ‘서 왕국’, ‘동 왕국’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록제는 힘을 잃고, 두 왕국은 역사상 전례 없는 거대한 제국으로 컸다. 그게 바로 서제국과 동제국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성국이 두 제국 사이에 압박받으며 끼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두 제국은 대륙의 패권을 두고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언제든 성국을 짓밟고 상대 제국보다 빨리 흡수시킨 후 전쟁 통로로 쓰고 싶어 했다는 소리다.
강국 사이에 낀 소국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허구한 날 경제 보복이며, 무역 제재, 환경오염까지…….
안 살아본 사람은 모르는 서러움이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
나는 동제국에서도 제일가는 대 귀족, 엑저 공작의 사생아다.
그것도 공작이 직접 유폐를 명령한 사생아.
그래서 나의 존재는 절대 들키면 안 되는 기밀이자 위험이었다.
모두에게 잊힌 어린애가 탑에 갇혀 점차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 건 사람들에게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아이가 죽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철저히 무시할 것이다.
그들에게 진실은, 약소국의 왕이 감히 엑저 공작이 직접 유배 보낸 사생아를 빼돌렸다는 것뿐.
성국 왕이 죽어 가는 어린애를 구했다?
그건 그들에게 미담이 아니었다. 전쟁을 선포할 기분 좋은 명분이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은 나보다 한 살 위인 남자아이였다.
멜로 록제. 폐하의 단 하나 남은 혈육으로서 조카이며, 성국의 후계자로서 발탁된 소년.
결 좋게 반짝거리는 금발, 동화책에 나올 듯한 전형적인 왕자님 같은 생김새.
설탕 과자처럼 생긴 그 녀석은 우리 둘만 남게 되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었다.
“네가 염치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평생 죽은 것처럼 살아.”
“염치가 뭐야?”
“……?”
탑에서 교육은커녕 욕설만 들으며 자랐던 나다. 그땐 백치보다도 아는 게 없었지.
황당하다는 듯 날 바라보는 멜로 앞에서, 난 친절히 설명했다.
“난 아무것도 못 배우고 자랐어.”
멜로는 울컥해서 내게 소리 질렀다.
“나한테 동정 사려고 하지 마. 네 인생이 불쌍한지 아닌지, 남들이 신경이나 쓸 것 같아? 네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민폐가 뭔데?”
“……이 멍청이가!”
염치도, 민폐의 뜻조차도 모르지만 내가 잘못해서 혼나는 거겠지. 난 자연스레 주눅이 든 채로 멜로의 말을 경청했다.
멜로는 지금도 약소국 비운의 천재로서 유명한 놈이다. 당연히 어린 시절에도 영특했다.
백치나 다름없는 교양과 지식 수준의 나를 상대로 ‘내 존재가 왜 민폐인지’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게 할 정도로.
“그럼 내가 살아 있는 게 들키면 큰일 나는 거야?”
“큰일 수준이 아니야. 이천 년 명맥을 이어 온 신성 왕국 주권이 너 때문에 위태해질 거다. 고작 너 하나 때문에! 알아듣겠냐, 멍청아?”
“……어, 어떡하지?”
“그러니까 넌 혹여나 내 자리에 감히 욕심 부리지 말고, 절대 남 눈에 띄지 말고, 이 궁에서 조용히…….”
“…….”
“……야? 너 왜 그래?”
나는 잠깐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목을 감싸 쥐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멜로가 경악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와중, 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을 뜬 건 침대 위에서였다.
머리맡에서 폐하와 멜로의 대화가 들렸다. 폐하는 마침 멜로를 내보내고 있었다.
“약자에게 포악해지는 게, 딱 망국의 후계자다운 훌륭한 모습이었다.”
“……송구합니다.”
“가 보렴.”
이때 당시에 난 눈치를 보며 눈을 꼭 감고 있었지.
멜로와 폐하 사이의 분위기에 긴장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쓰러져서 폐하가 귀찮았을까 봐 무섭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지만.
그래도 난 겨우겨우 용기를 내서 눈을 뜨고, 한참 눈치를 보다 물었다.
“왜 나를 데려왔어요?”
눈 감고 지나갔으면 될 일이었다.
미움받는 애 따윈 온 대륙에 넘쳐 흐르는 흔한 이야기니까.
날 데려오는 것 자체가 그분껜 위험한 일이었다.
폐하는 한참이나 대꾸하지 않으셨다.
그냥 내 머리 위의 물수건을 갈아 주시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그리고 내가 질문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시무룩해질 때 즈음에 입을 여셨다.
“너는 앞으로 숨어서 살아야 한다. 그건 그 녀석 말이 맞아.”
“…….”
“다시는 진짜 이름을 쓰지도 못할 거고. 평생을 가짜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단다. 널 알아보는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눈에 띄는 행동도 삼가야 하고.”
“…….”
“명예롭다고 일컫는 지위에도 오르지 못하겠지.”
“그러면…….”
그때 내 목소리는 아주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 저는 폐하한테 도움이 안 돼요?”
내 질문에 폐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셨다.
“아까 본 그 애가, 폐하의 나라에 저는 있어서는 안 된대요. 해를 끼칠 거래요. 정말 그런 거면 그냥…….”
나는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냥 탑으로 다시 돌아가도 돼요.”
그 말을 하고 난 주섬주섬 침대에서 내려왔다.
‘치료는 고마웠어요.’라거나, ‘저를 구해 주신 일은 비밀로 할게요. 맞아도 절대 비밀로 할 거예요.’라는 둥 울먹임 가득한 허세를 부리면서.
폐하는 날 가볍게 들어 다시 이불 속에 쏘옥 집어넣었다.
“……멜로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했든 간에, 하나하나 다 반박해 줄 수 있지만.”
“……?”
“가짜 신분으로 산다고 그 인생마저 가짜일까.”
“…….”
“세상엔 일부러 타인으로 가장해야 하는 직업도 있단다. 숨어서 나라를 지키는 직업도 있고. 우리 성국은 그런 사람들 힘으로 버티는 중이고.”
“……숨어서?”
“애초에, 꼬맹아.”
그분의 손가락이 일어나려고 낑낑거리는 나의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내가 너한테 도움받자고 데려온 것처럼 보이느냐?”
“……아니요.”
“그래. 전쟁이고 제국이고, 멜로 녀석이 하는 말은 앞으로 오 년은 무시해도 된다. 애들이 어른 일 고민하는 거 아니야.”
폐하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포근한 베개, 푹신한 이불에 파묻힌 채 눈만 끔뻑거리는 내게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냥 씩씩하게 커 봐라.”
“…….”
“내 나라는 그런 나라란다. 어른 놈들 사정에 어린 것들이 휩쓸리지 않는 곳.”
폐하의 그 말은 내게 똑똑히 각인되었다.
내 인생, 내 영혼에 삶의 방향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나는 비몽사몽으로 중얼거렸다.
“저도 목숨을 걸고 폐하의 나라를…….”
***
다음 날.
“이봐, 너. 어제는……. 미안.”
나는 우물쭈물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멜로를 붙잡고, 폐하가 지나가듯 말한 ‘숨어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의 정체를 배웠다.
“글쎄. 아마 정보부 사람들을 말씀하신 게 아닐까. 첩보원들 말이지.”
“첩보원? 그럼 나도 그거 될 수 있어?”
멜로는 바로 단호히 부정했다. 바로 등을 돌리고 어른인 척 뒷짐까지 지면서.
첩보원, 첩보원.
나는 처음 배운 그 단어를 계속 중얼거렸다. 첩보원, 첩보원…….
“첩보원들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그 사람들은 얼굴도 체형도, 다른 사람인 것처럼 분장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는데?”
“……으아아아악!”
비웃기 위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멜로가 비명을 질렀다.
본인과 똑같은 얼굴로 변한 나를 보고서.
내겐 간단한 일이었다.
멜로가 등을 돌린 사이, 정원의 흙을 손으로 퍼 올려 한 번 세수한 것뿐.
“……그, 그래도 흉내만 낸다고 끝이 아니야. 간첩이란 건 아무도 몰래 기밀을 훔쳐 오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럼 기다려 봐.”
“뭘?”
“잠깐만 기다려 봐.”
싫다고, 가겠다고 새침하게 구는 멜로를 붙잡고 십분 뒤.
“네 방에서 방금 가져왔어.”
난 멜로의 팬티를 내밀었다.
작은 흙사람들을 우르르 만들어 보내 가져오게 시킨 것이었다. 덕분에 땅에 끌리고 진흙 범벅이 된 모양새였지만.
참고로 내 명예를 위해 덧붙이자면, 사실 난 그게 속옷이란 것도 몰랐었다.
탑에 갇힌 팔 년 동안 속옷과 겉옷을 구분해서 입기는커녕 넝마 한 조각만 겨우 걸치고 자란 내가 그런 걸 구분할 수 있을 턱이 있나.
내 딴엔 팔과 다리가 짧고 조그마한 흙사람들이 가져오기 쉬운 작고 조그만 바지를 가져온 것이었다.
“…….”
그때 멜로는 반쯤 울먹였다.
아무리 천재님이라도 당시 놈은 고작 열한 살.
아무리 약소국일지언정 한 나라의 후계자로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대접받았던 녀석이었으니 당연하다.
어쨌든, 반쯤 울먹이던 멜로는 나를 잔뜩 경계하며 날을 세우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