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36)
그리고 쭝얼거렸다.
‘잘못했어요.’
평소엔 반말이면서, 이럴 땐 존댓말로 귀여운 척이라니.
그러나 부모란 이 뻔한 수작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레서가 어쩔 수 없는 척하면서 용서해 주려던 순간.
그는 잠에서 깼다.
“…….”
아이를 보내고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마음이 심란했다.
‘그래도 그따위 계집애에겐 과한 곳이야.’
사실 탑을 유배지라 하고 보냈으나, 그 탑은 겉보기와는 달리 대단한 건물이었다.
마물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탑엔 근대의 기술로는 따라가지 못할 기술력이 있었다.
외관으론 다 무너져 가기 일보 직전인 좁디좁은 탑이지만, 그 안은 실질적으로 최첨단 시설이나 마찬가지다.
마물 연구를 하는 최고급 인재들을 위해 탑 아래쪽엔 호화 시설이 있고, 지하엔 정원은 물론이오 항상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영장까지 있다.
물론 위쪽엔 마물을 가둬 두는 감옥 등이 있었지만 탑 안에서 사는 것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정도면 공작을 기만한 것치고 충분히 신경 써 준 셈이지.’
다 자라기 전까지 유폐하라 명했지만, 사는 것은 호화로울 것이다.
친부라는 놈의 행적까진 제한하지 않았으니 제 진짜 아비가 탑을 오가며 챙겨 줄 것이고.
또 유폐가 끝이 나려면 공작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그 말은, 그 계집이 다 커서 바깥이 보고 싶을 때 공작에게 먼저 머리를 숙이고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을 생각한 공작의 판단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다.
침대 옆의 빈 자리도 어느 순간 신경 쓰이지 않는 날이 올 것이고, 아기가 보고 싶은 것도 사라질 것이다.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
딸을 안아 들고 싶었다.
아기 냄새를 맡고, 꼭 껴안아 보고 싶었다.
내 딸도 아닌데.
내 딸이 너무 보고 싶다.
하루가 갈수록 더 돌아 버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변한 건 있었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원망이 가라앉은 것.
그땐 원망할 대상이 없어서 아이에게 증오가 향했지만, 아내를 죽게 만든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내 여자가, 죽어서도 지키고 싶어 했던 소중한 아이였지 않나.
여자애가 ‘아빠’ 소리를 부르는 걸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려졌다.
보이는 것이라곤 남의 집 딸이 남에게 안겨 꺄르륵거리는 풍경뿐.
해가 갈수록, 페리 또래의 애들을 보면 기분이 이상했다.
얼마만큼 자랐으려나. 이젠 이만큼 컸을까.
그러다 서운했다.
내가 그렇게 귀하게 키워 줬는데, 제 친부 나타났다고 코빼기 한 번 안 비치고.
밉다가도 그립고, 그립다가도 괘씸하고.
축출당하기 전 딸아이의 것이었던 재산들을 볼 때마다 아쉬웠다.
이게 걔 것이었는데. 걔 줄 거였는데.
어디 가서 무시받지 않게, 다른 집 애들보다 최고의 것만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이걸 줄 수도 없다.
‘어떻게 된 계집애가, 무슨 생각으로 안부 서신 하나 안 보내는지.’
하지만 이제 와서 먼저 부르는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저쪽에서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사교계 데뷔라거나, 수도에 올라오고 싶다거나.
그런 이유로 도움을 요청하면 못 내킨다는 듯 받아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페리안 쪽에서 먼저 연락을 보내오는 일은 없었다.
몇 년간이나마 공작이 손수 키운 아이다. 매년마다 안부 인사를 올리는 것은 예의상 당연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서신으로라도 안부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괘씸하기는.’
어디 개잡놈의 피가 섞여서 방만하게 자라기라도 했나 보다.
‘내가 키웠으면 버르장머리 없이 자라진 않았을 텐데.’
레서는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페리안이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연락을 안 올리는 거라 생각하고서.
페리안이 엑저 공녀로 있을 적 수여받은 재산들은 다 몰수되었지만, 그중 일부는 레서가 몰래 몫을 떼어 놓고 있었다.
나중에라도 그 계집애가 친한 척 낯을 뒤집고 달라붙으면, 그때 줄 요량으로.
어떻게 자라고 있나.
그렇게 먼저 연락해 볼까 하다가도 말았다.
서신이라도 한번 보내 보자 싶어서 밤새워 편지를 쓰는 날도 있었다.
쓰는 도중엔 담백하고 사무적으로 적어 내린 것 같은데, 다음 날 보면 너무 길고 질척거리는 것 같았다.
공작 자존심이 있지.
먼저 연락도 안 하는 얄미운 것에게 먼저 손을 내밀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레서는 매번 쓴 편지를 그냥 불태웠다.
“키워 준 공은 없다더니…….”
***
그리고 어느 날, 정말 별거 아닌 날.
린저 자작이 보고하다 말고 사담을 꺼냈다.
“확정된 사실은 아니지만, 하나 미리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공녀님을 보낸 그 탑…… 물류 반출입과 세금액 계산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볼까요?”
사치를 부리고 장부를 속이고 있나?
더 괘씸해졌다.
“됐다, 됐어. 그 탑에서 무슨 지랄이 일어나도 신경 꺼라. 나를 생각해서 하는 짓이니 뭐니 하며 뻘짓 말고 일이나 해라.”
“근데 얼핏 남은 흔적으로는 사람이 산다기엔 조금 소박한…….”
“그럼 오히려 더 좋지.”
공작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몰래 사치를 하는 것 정도는 내버려 둬도 되고, 자기 죄를 반성하며 초라한 생활을 하는 중이라면 더 좋다.
궁상맞은 생활을 할수록 공작저를 그리워할 것 같아서.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이성은 아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내를 죽게 만든 만큼 벌을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인간 마음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피하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다.
세월의 무게는 일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외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사람은 그걸 알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다시 그 애와 가족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그 애에게 다시 영광된 자리와, 호화로운 인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방법을.
‘양녀로 재입양할 수는 없지. 친부를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내가 죽기 전 했던 사업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고아이되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남아를 모아 애들에게 제안했다.
너희 중 가장 뛰어난 것을 양자로 삼을 것이다.
버려진 그것과 혼인할 아이다.
악마의 제안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본인도 후회하게 되는 쓰레기 같은 행동이었다.
선발되었던 아이들은 진심으로 매달렸고, 그 이상으로 상처받으며 하나하나씩 탈락했다.
그리고 마지막.
그는 한 남자아이를 선택했다. 외모를 포함해 여러 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녀석이었다.
“판데르니안?”
“예.”
반짝거리는 보석안이 그를 응시했다.
레서는 그 아름다운 눈에서 불타오르듯 피어나는 야망을 봤다.
“……그래, 너로 하지.”
어린 소년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레서는 몰랐다.
본인이 생각했던 의미의 ‘경쟁’은 이뤄질 수도 없는 것이었단 것을.
그는 그걸 판데르니안을 입양하고서도 한참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부터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이들은, 밑바닥에서 굴러야 하는 인간들이 얼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부인의 사생아와 혼인시킬 맞춤형 인간.
그런 걸 주문해 놓고서 재화로 보상할 수 있다 생각한 자신.
그걸 뒤늦게서야 후회하며 판데르니안에게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보듬었다.
하지만 이미 삐뚤어진 사내의 귀엔 그저 개소리로 들렸을 뿐이었다.
***
그리고 또 몇 년 뒤.
아이가 탑에 없단 것이 밝혀졌다.
없기만 한 게 아니라,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탑은 참혹한 풍경이라 했다.
멍청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면서도 홀린 듯 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죽어 버리겠다는 아버지를 기어코 살린 것은 레리온이었다.
“살아 계셔야 페리안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항상 냉철하던 첫째 아들.
장성한 지 오래인 첫째가 눈물까지 보였다.
동생의 행방불명을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알아차리지도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원망.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분노.
“분명…… 어딘가에, 살아…….”
눈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읊조리는 레리온의 모습에, 레서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거의 자기 세뇌에 가까운 소망을 품었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 딸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내 사랑. 내 아가.”
누군가가 나를 껴안고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엄마 목소리인가? 엄마야?
“평범하게 낳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에 번득 정신이 들었다.
꿈속이구나.
꿈은 사람의 무의식으로, 보고 싶은 걸 보여 준다지 않던가.
내 어머니가 저런 말을 하셨을 리가 없다.
기억엔 남아 있지 않지만, 당당한 분이셨으니까.
온 세상이 본인의 부정을 확신해도, 남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한 분이셨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이건 내가 어머니한테 듣고 싶은 말이었겠지.
내가 어렸을 적, 탑에 갇혀서 어머니의 정절을 의심했을 무렵. 그때 듣고 싶었던 말이었겠지.
물 먹은 듯 젖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미안해.”
난 그렇게 부정하면서 꿈에서 깼다.
내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만 보일 수 있는 약한 모습이 있었을 것이라곤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딸을 낳아서 가슴 아파 하는 날도 있는, 평범한 인물이었을 거란 사실은 싫었다.
끝없는 암흑 속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다 눈을 떴다.
어두운 방이었다.
몸이 물에 젖은 종이인 것처럼 푹 늘어졌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난 내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머리 아파…….’
힘겹게 눈을 떴다.
깜깜한 방이었다. 난 무거워 죽겠는 손발을 힘겹게 조금 들어 올려 봤다.
좋아. 묶이진 않았군.
내가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곳도 제법 좋은 침대다.
어쨌거나 포로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건 아닌 듯싶다.
나는 눈을 여러 차례 끔뻑거렸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천천히 생각했다.
‘왜 안 죽었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몸은 내 힘과 흙으로 빚은 가체. 즉, 가짜 육신이다.
나는 이 가짜 육신의 생명 기관이 정지하면 자동으로 정신이 옮겨질 다른 그릇을 빚어 놨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시녀로 일했던 그 몸이 아닌가.
‘치명상이었는데.’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 죽지 않으면 이상한 부상이었지.
그래서 난 당연히 내가 옮겨 갈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이 며칠인지, 사건으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도 계산해 봐야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너무 오락가락했다.
나는 눈을 연거푸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눈가 주변이 눈물로 흥건했다.
그때.
“깨어났군.”
“콜록!”
깜짝이야!
난 갑자기 어둠 속에서 말을 건 상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어두컴컴하고 막 깨어나 정신이 없었다지만, 이렇게 조용히 기척을 숨기고 앉아 있을 줄이야.
그리고 내가 본 사람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진짜로!
“……선공작님?”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물었다.
선공작. 내 친아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선공작의 얼굴은 어둠에 완전히 가려져 표정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석상. 내가 느낀 감상은 그것이었다. 마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돌로 만들어진 장군상 같은 것.
사람이라기엔 너무 정적이다.
아니, 아니. 근데 뭣보다…….
왜 여기 와 있는데?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공작의 표정을 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 시야 자체가 흐리다. 확실히 죽기 직전의 치명상을 입어서 몸 자체가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들었더군.”
“……아! 맞다! 공녀님께선 무탈하신가요?!”
나는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황급히 물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 궁금한 일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난 그때 죽고, 성국의 페리라는 신분은 거기서 사망 처리될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정신은 따로 빚어 둔 그릇에 옮겨 갈 테니 내 가체가 죽은 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 계획은 그랬다.
그러나 이 몸이 죽지 않도록 살린 누군가 덕분에 내 정신은 옮겨 가지 않았고, 혼수상태가 된 가체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이다.
공작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네가 구한 건 공녀가 아니었다네.”
“……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본 공작이 말을 이었다.
“내가 가짜에게 눈이 먼 거지.”
“무슨…… 소리신…… 웁, 콜록……!”
일단 모른 척하고 상황을 물어보려는데, 성대 안쪽이 아파 기침이 나왔다.
“내가 멍청했어. 내가.”
콜록콜록, 계속 기침하는데 입에서 피 맛이 났다.
그런데, 선공작은 굳이 자고 있는 시녀 병문안까지 온 것치고는 딱히 내 건강 상태에 관심은 없어 보였다.
“콜록, 콜록…….”
“…….”
대놓고 아파하는 나보다는, 나와 닮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느낌.
그저 황망한 후회, 마지막 희망도 잃어버려 넋이 나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죽은 듯한 느낌.
이윽고 기침이 멎었다.
공작은 괜찮냐는 둥의 겉치레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본론부터 꺼냈다.
“자네가 기절한 사이 있었던 일은 천천히 알게 될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