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44)
이윽고 또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흙 사람이 속마음으로 ‘으아아앙’ 하고 우는 게 전해질 정도였다.
‘또 뭔가 무너졌나?’
전해진 시야는 완전히 뿌옇다.
그러나 페녹스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변명이라도 해. 왜 돌아 버렸는지. 뭘 본 건지.”
“…….”
레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페녹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
“페녹스 경, 이제 슬슬 저를 친구쯤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린가?”
“아니. 무슨 일만 생기면 나한테 오길래.”
약간 그거랑 비슷하다.
사춘기 애들은 낙엽만 굴러가도 친구한테 보고하러 가지 않던가. 가서 하소연하고 뒷담 까고 수다 떨고 간식 먹고.
결국 만나러 온 목적은 아무 상관도 없는…….
페녹스가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일은 또 뭐고? 또 일 생겼어?”
‘내 일 말고. 당신이 댁 형이랑 싸우자마자 나한테 왔으니 그러지.’
하지만 그걸 말할 순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다 소문났거든요.”
“뭘?”
“옐베리도 퇴직하니까 인사 편성으로 난리 났다면서요?”
“아. 그렇지. 그녀가 가는 건 아까운 일이야.”
페녹스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살짝 내리깔았다.
평소에 그는 술에 취해 있어도 풀 위에 누울 때 말곤 짜증 날 정도로 당당해 보이는데, 오늘은 좀 풀이 죽어 보였다.
나는 그가 묻지도 않은 내 사정이나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저는 뭐, 요새 불쌍하다 뭐다 말이 많은데요.”
“…….”
“출발만 한 일주일 늦어진 것뿐이에요. 집 망하고 돈 묶이면 뭐 어때요. 저 인생 훌륭하게 살아서, 자기 집에 와서 살라고 부르는 친구들 많아요. 걔네랑 같이 매일 돼지 파티 하면서 놀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네가 좋아하는 형아랑 너무 크게 싸우지는 말아라…….’
라고 대인배처럼 생각해 주는데.
페녹스가 바로 날카롭게 물어봤다.
“레리온 공이랑 따로 만난 적 있지? 저번 방에서의 일 말고.”
“……네.”
“뭐라고 하시던?”
“……같이 살 생각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환장하겠군.”
페녹스가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할 말이 없구나, 미안하다.”
“뭐 어쩌겠어요. 저도 오빠가 있는데 진짜 제 맘대로 해서 죽겠다니까요.”
“내가 따로 챙겨 줄 테니 일단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염려하지 마. 그리고…….”
“?”
페녹스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새삼 아깐 몰랐는데.
이 술주정뱅이놈 오늘은 굉장히 정중한 예복 차림이었네?
그리고 그는 숙녀에게 하는, 에스코트의 규범 같은 동작으로 내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동행을 요청했다.
난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술 먹자는 거죠?”
하지만 나는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술 먹어서 기분을 풀거나 시름을 잊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성실하고 올바르게 사는 인간이라 그런 게 아니고, 몸에 독도 약도 알코올도 안 통해서 그런다.
하지만…….
‘내 돈도 묶이고, 부동산 자산도 망했으니 쏘겠다는 건가. 오늘은 제법 기특하군…….’
나는 나 안 좋은 일 생겼다고 술 먹는 스타일 아니라고 그에게 대충 설명했다.
“저 집 날아가든 말든 상관도 없고 원래 술로 시름 잊는 거 안 해요. 괜찮아요.”
“아니, 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먹자는 거야.”
“…… 네?”
페녹스가 잠시 내 눈을 피하고 머쓱한 듯 말했다.
“물론 페리 양도…… 여러 사건으로 힘들었으니 술이 마시고 싶을 테지?”
“저 챙겨 주는 척하는 건 핑계인 거 다 들키셨어요.”
오늘은 기특하단 거 취소다.
죽어라! 페녹스!
내가 대놓고 그의 애원을 무시하자, 페녹스가 절절히 부탁해 왔다.
“페리 양, 자네랑 같이 있으면 안 하려던 말까지 다 해 버린단 말이야.”
그럼 나를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페녹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덧붙였다.
“페리 양이 내겐 그만큼 편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앓이를 꺼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바로 자네야. 내겐 기적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지.”
칭찬을 받으니 왠지 으쓱해졌다.
“으흠…….”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오늘 내게 곤란한 일이 있었어서.”
알지, 알지.
좋아하는 형이랑 싸웠지.
“페리 양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해결책이나…….”
“어흠.”
어쩐지 내게 의지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바로 일어섰다.
“그 차림새를 보면 오늘은 양조장은 아니겠죠?”
“그럼. 내 접객실로 오게.”
“이번만 가 드립니다.”
어흠!
***
그렇게 페녹스가 접객실로 나를 완벽히 에스코트하는 와중.
자기 딴엔 기쁘단 얼굴로 쓸데없는 소릴 지껄였다.
“페리 양은 내게 정말 특별한 존재지.”
“어흠.”
“이성에게 이렇게 신뢰와 우정, 동료애를 느낄 줄은 몰랐어.”
“어흠!”
그리고 페녹스가 당당하게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이런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찾아봤지. 힘든 일이 있을 때 손익 따지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존재. 나의 치졸한 행태나 감정도 이해하고 그대로를 응원해 주는 사람…….”
“에헴!”
내 자부심이 극에 달한 그때.
페녹스가 개소릴 지껄였다.
“그걸 ‘감쓰’라고 부른다더군.”
그 뒤에 페녹스가 말한 ‘우리 어릴 때는 그런 신조어가 없었잖는가? 하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 간의 관계 맺음도 과거와는 궤가 달라지니, 인연을 특정하는 호칭도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양이야.’
같은 헛소리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그냥 페녹스의 뒤통수를 때렸다.
정말 오래간만에 신분 차를 까먹은 순간이었다.
“감정 쓰레기통의 줄임말이라니…… 몰랐지…….”
페녹스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변명했다.
본인 말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죄 아저씨뿐이라.
오늘 ‘감쓰’ 보고 오겠다고 했는데 다들 페녹스 경은 유행어도 아신다고 감탄만 했다더라.
“그리고 그거 이미 한물간 단어거든요?”
“…….”
페녹스는 거듭거듭 맹세했다.
자기는 그런 경우 없는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며, 사람의 인격을 그런 식으로 매도한 적조차 없다고.
“아 됐고, 왜 감쓰가 필요했는지나 말해 봐요.”
“아니, 내가 자네를 쓰레기통으로 쓰려고 하겠는가?! 하여간 여러 가지가 있는데.”
페녹스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구라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 앞에선 어수룩해도 본인 형 얘기를 갑작스레 꺼내긴 어렵겠지.
다른 소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심화시키다가 나중에 형 얘기를 등장시킬 속셈인가 보다.
“일단 옐베리 경이 가서 큰일이야. 후임자가…….”
“그런 건 하나도 걱정 안 하고 있는 거 알거든요?”
여차하면 옐베리가 하던 일 포함 다른 사람들이 하던 일까지 다 해결할 사람이 뭐래.
그 이후로도, 페녹스는 계속 말을 빙빙 돌리기만 했다.
‘이래 놓고 네 앞에선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기는 무슨.’
심지어 페녹스는 이런 상담까지 했다.
“형님이 장남이시니 먼저 좋은 여성분을 만나서 일을 치르는 게 먼저겠지. 아무리 그래도 공작가인데 순서를 무시하고 결혼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근데 판데르니안조차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큰일이야.
정말 그 누구도 절대로 걱정하지 않을 소재였다.
말하는 본인도 ‘이게 먹히려나?’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 먹고 싶다고 불러 놓고 오늘은 한 잔도 안 마시는데.’
“그리고 요즘 기사단 평균 체격이 달라지는데…….”
안 되겠다.
이 쓸모없는 대화 늘리기를 막아야겠어.
안 그러면 참지 못하고 페녹스의 목을 졸라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제 얘기나 해 볼까요?”
방법은 간단하다. 저쪽이 진지한 얘기 꺼낼 타이밍 노리면서 횡설수설하면, 내 쪽이 먼저 꺼내 주면 된다.
내 얘기가 끝나면 신나서 주절주절 떠들겠지.
그리고 이번에 페녹스가 말하려는 것은 가족 이야기.
그러니까 당연히 나도…….
“저는 가족 이야긴데요. 너무 진지한 주제일 것 같으면 하지 말까요?”
“아니 아니. 좋아. 좋아.”
페녹스가 황급히 부정했다.
대놓고 좋아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페녹스에게는 내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꽤 한 편이었다.
물론 대부분 가짜가 섞여 있었지만 말이지.
예를 들면 가족관계도 그렇다.
“제 혈육들은 사고로 잃고, 대신 저를 가족처럼 대해 주신 가정이 있었다고 했었잖아요.”
실제로 모망 폐하와 멜로는 이모와 조카 사이지만.
“그 두 사람도 혈육이라곤 단둘밖에 안 남아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제가 우연히 그 사이에 끼게 된 거죠.”
페녹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서 걱정하지 마세요. 둘은 저한테 엄청 잘해 줬고, 지금도 어마어마하게 챙겨 줘요. 아직까지 부모 없이 잉잉 우는 꼬맹이로 보이는 모양인지, 둘 다 그렇게 지극정성이 없거든요.”
“그건 다행이네.”
“근데 그런데도 가끔은 부러운 거 있죠?”
페녹스가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 이어졌다고 가족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이 집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
“아무도 저를 왕따시키지 않는데, 저 혼자 외롭고, 소외감 느끼고…… 주책이죠.”
모망 폐하.
폐하가 나를 비밀리에 입양하면서, 둘만 있을 때는 얼마든지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사실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렇게 불러 본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는 엄마, 어머니, 하고 불러 보면서도.
혹시 진짜로 말로 내뱉으면 빈말도 못 알아듣는 염치 없는 계집애로 보일까 봐.
물론 안다.
폐하가 그런 꼬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런데도 불안한 거다. 품 안에 그분의 애정을 꽉 껴안고 있으면서도 조마조마한 거다.
“또 그런 거 있잖아요. 별거 아닌데 가끔 소외감 느껴지는 순간들. 가족 일인데 날 위해서라면서 말을 안해 줘!”
“허! 맞아!”
“날 위해서 비밀로 하고 진행했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좀 같이 하면 좋겠다고요. 내가 언제까지나 어린애도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동의한다.”
‘응?’
페녹스의 반응이 갑자기 달라졌다.
마치 잘됐으면 하는 친한 동생에서, 같이 왕따 당한 전우를 바라보듯 바뀐 것이다.
이 내용의 어디가 페녹스를 건드린 거야?
의문은 길어지지도 않았다. 페녹스가 머리를 짚으며 줄줄줄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이건 진짜 불러 놓고도 안 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피하고 있었는데. 내가 페리 양을 우습게 봤어.”
“뭔데요.”
“하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는 그냥 징징거림이 아니라 성인이 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당한 결정권 행사를 주장하는…….”
“빨리 말하기나 해요.”
페녹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가끔은 나도 아직까지 외부인 같아.”
“?”
형이랑 싸우던 얘기 하려던 거 아니었나?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페녹스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이 쫓겨났을 때 나는 어렸었지.”
“그쵸. 그럼 책임 부담에서 벗어나는 거니까 좋은 거 아닌가?”
페녹스는 내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
“형님은 당시 열한 살이었지만 이미 엑저 후계자로서 수여 받아 관리하는 영지만 네 개였고, 이미 가문의 결정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대표셨다.”
‘난 열한 살 때 글자도 못 뗐는데.’
물론 탑에 갇혀서 학대당하느라 배울 기회조차 없던 거지만.
“그리고…… 아버지는 당연히 그 사건에서 제외할 수조차 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나마 페녹스가 만만한 이유도 그거 아니던가.
참고로 레리온은 저 열한 살 영지 네 개를 관리했던 천재성으로 나를 내쫓는 데에 투표했다고 알고 있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죄책감이라도 같이 공유하면서 부담을 덜어 주고 싶다 이런 거예요?”
대답은 사람 무안하게 정색으로 돌아왔다.
“페리 양. 그 사건은 누군가에게 나눠 줘서 덜었다는 자기 위안조차 하면 안 되는 일이지.”
“아, 예 예…….”
페녹스는 한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눈을 짚고 말했다.
“이상해진 건 형님이야.”
그리고 그는, 페리안 공녀가 사라졌음이 밝혀졌던 때가 기억나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진짜 공녀여서 또렷하게 기억하는 게 아니고 누구나 재미있게 기억할 사건이었으니까.
***
어떤 비밀은 아주 어처구니없이 밝혀지기도 한다.
두 제국에서 한참 먼 곳에 있는 왕국.
한 늙은 기자가 비뇨기과에 들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동창인가?’
나이가 들면 아는 사람이 많아지지만, 까먹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는 직업 특성상 더더욱 그랬다. 친구인 줄 알고 반갑게 인사했더니 거래처 사람이었다든지, 반대로 낯익은 얼굴에 우물쭈물했더니 친구였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중요한 인물의 이름도 까먹어 곤궁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혹 중요한 인물은 아닌지 주의를 집중하던 순간.
갈색 머리 남성은 누군가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게 내 잘못인가?”
“무정자증이 당신 잘못이 아니면 뭔데!”
‘듣기 민망한 싸움이로구먼.’
비뇨기과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못 들은 체하며 흥미진진하게 싸움을 관전했다.
싸움이 길어지니 사정도 파악이 됐다.
갈색 머리 남성과 그 부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임신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이 난임이라 서러운 처지였는데, 알고 보니 남자 쪽이 무정자증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