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49)
하여간에 중요한 진실은 그것이었다.
칠십 공주들 앞에서도 꼿꼿한 그가, 페리안에게는 조금이나마 숙이고 들어갔다는 것.
심지어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까지.
‘최면인가?’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아니었다.
‘…….’
다시 한번 얼굴을 대면하고 보면 답이 나올까.
하지만 찾아가서 얼굴을 맞대는 것도 무언가 껄끄러웠다.
그녀 앞에서 했던 이야기는 모두 사실들이었다.
이성적으로 매력을 느꼈다든가 하는 낯부끄러운 소리들까지.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멈춰야 하는 것 아니던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전될 필요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스윽. 슥.
혼테인 측과 교환한 도청 불가 통신구에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홈이 파인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던 판데르니안이 벌떡 일어섰다.
혼테인이 개소리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쪽 시녀님에게 청혼하러 가는 중.]“이 새끼가…….”
성유물로 가득한 성왕 집무실. 페리가 나간 뒤 그곳엔 성왕 대리인 멜로만이 홀로 남아 길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바보 같은 놈.’
그가 평소에 ‘바보’라 일컫는 이는 보통 동생인 페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바보 소리는 멜로 록제 그 자신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의자에 앉은 멜로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금발 머리가 기운 없는 주인을 따라 흐트러졌다.
나약한 나라와, 보호해 주기는커녕 동생을 사지로 밀어 넣는 무정한 후계자.
집무실은 온 사방이 고결한 하얀색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입고 있는 의복은 대신관 의복이다. 길게 늘어뜨린 하얀 천이 몇 겹씩 겹쳐져 고아함을 강조한 예복.
그리고 그가 앉은 자리, 앞에 놓인 책상, 간단하게는 벽 선반에 가득 늘어놓은 물건들까지.
그 수많은 것들이 죄다 과거에 떠받들어진 성유물들이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비참한 약소국이었다.
자존심도 없이 주변국의 호의에 기생해서 사는 나라.
멜로는 그런 나라의 후계자라서 항상 비참했다. 그리고 오늘은 무능력한 오빠라서 비참했다.
***
그 어린애가 진짜 엑저의 적통이란 게 드러난 것은 성왕이 페리를 데려온 지 2년도 채 안 돼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건 공작이 성급하고 멍청했다며 비웃고 넘어갈 만한 사안 따위가 아니었다.
페리가 친모의 명예를 애통해하며 땅 밑에서 엉엉 울고 있을 때, 성왕 모망은 멜로를 은밀히 호출했다.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 알겠지.’
‘예.’
그전까지 멜로는 공녀의 친부라고 주장하며 나타난 남자가 진짜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용감한 사기꾼이라 해도, ‘내가 사생아의 친부입니다’라는 위험뿐인 거짓말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공작이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앨리스 경이 죽은 시점에, 본인이 불륜남이라고 나타난다?
그건 목을 날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멜로는 안다. 그게 가짜 친부였다는 것을.
아빠가 레서이니 다른 아빠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그 사기꾼은 왜 나타났을까.
답은 하나였다. 목적이 너무나도 분명한 거짓말이었다.
공녀를 가족과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
앨리스 경이 죽었는데도 바로 내쳐지지 않은 아이를 기어코 납치하기 위해서였다.
멜로가 머뭇거리다가 질문했다.
‘페리를 노린 이유가 뭘까요? 대체 걔가 뭐길래요?’
왜 하필 마물 연구를 하는 탑이었을까?
그전까진 모두가 공작 부인의 암살이 사건의 주체라고 생각했다. 페리가 내쳐진 것은 그에 영향을 받은 부수적인 결과일 거라고.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가짜 친부까지 내세우며 페리를 가족과 분리해 내 탑에 가두지 않았던가.
그걸 보면 마치…….
‘처음부터 목적이 페리였던 것처럼…….’
멜로는 그 추측을 입 안으로 삼켰다.
페리의 친모인 앨리스 경을 죽인 것도, 탑에 가둬서 무슨 짓을 했던 것도. 다 같은 놈들일 것이다. 같은 놈들일 수밖에 없다.
‘걔 인생이 망가진 건…… 비극적인 우연이 아니었던 거네요.’
‘그래. 그리고 저쪽은 그런 짓을 꾸밀 수 있을 만한 강한 집단이야.’
그러니 절대로, 정체를 쫓았다는 흔적을 남기지 말아라.
모망은 그렇게 멜로에게 경고했다.
***
그리고 그 이후 둘은 은밀하게 그 일에 대해 조사해 왔다.
페리에겐 말할 수 없었다.
그 녀석 능력이 괴물 같으며, 걔가 잠입하면 바로 알아내지 못할 것이 없단 것은 멜로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 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봐 왔던 것이 그다. 페리 본인을 제외하면 아마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페리한테 도움을 요청하겠는가.
사람이면 그럴 수 없다.
어쩌면 네 어머니가 살해당한 건 놈들이 너를 빼돌리기 위한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하고, 놈들의 정체를 네가 직접 찾아야 한다며, 직접 가서 알아 와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까.
그런 걸 말할 수 있는 오빠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끝까지 동제국엔 보내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데 하필이면 절호의 기회에 가짜 페리안 공녀가 등장했다.
고민하다 페리를 보냈더니 대단한 정보를 포함해, 세실과 동료들까지 생포해서 데려왔고 결국 큰 단서를 찾았다.
혼테인의 숙부이자, 서제국 섭정인 록사르 웬덤이 연관되어 있다는 단서를.
‘허나, 그놈은 너무 거물이야.’
페리가 가서 록사르의 목을 부러뜨리고 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분 나쁜 늙은이가 목숨을 잃는 순간, 서제국의 권력 구도가 폭발하듯 완전히 뒤집히리라.
‘…….’
그 영향을 직격으로 받을 옆 나라 입장에선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천천히 록사르의 영향력을 줄여 손에 넣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건 첩보원이 해낼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위상을 가지고 있는 유명인들이 나서야 하는 일이었지.
“……제기랄.”
오늘따라 더 신경질 난 얼굴을 하고 있는 멜로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으로 협조할 만한 인물들이 있긴 있었다.
명망 높고 국제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웬덤에 대적할 수 있는.
‘엑저 새끼들.’
적이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얼떨결에 당했다지만, 원래 웬덤을 상대할 쪽은 엑저밖에 없다.
페리의 친가족들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페리가 모아 온 추정 단서들과 유력한 용의자도 있는 상황.
그러니, 탑에 관련된 진실을 밝히려면…….
엑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자존심을 버려서라도 엑저 공작가에게 페리안이 진짜 딸임을 알려 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동생을 상납하는 것이 되겠지.’
“…….”
멜로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어떤 방면으로 따져도 엑저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것이 맞았다.
성국의 안전을 위해서도, 페리안의 8년에 대한 진실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서라도.
험한 곳에 팔아 치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껴 주겠다고 찾는 놈들에게 데려다주는 거지.
그러나 페리안은 제 동생이었다.
건방지고, 개도 아닌 게 땅 파기를 좋아하고, 오빠를 ‘야’라고 부르는 답 없는 놈이었지만…….
“…….”
멜로는 자신이 은연중에 열등감을 느꼈단 것을 깨닫고 실소했다.
최강의 기사 페녹스? 자신이 그만큼 강했다면 뒷생각하지 않고 가서 목을 따 줬을 것이다.
레리온만큼의 권력을 부릴 수 있었다면 몇 년에 걸쳐서라도 교묘하게 압박해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나락으로 처박았을 테고.
동생을 넘기느냐 마느냐로 고민할 일 따윈 전혀 없었을 거란 얘기다.
멜로의 속이 답답해졌다.
그 짜증 나는 놈들의 능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비참한 사실이었다.
***
성국 수도 중심가 연극로.
“……잉?”
뭐야!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이 산만한 길거리에 와 있었다.
“으아아앙-!”
“뚝, 울지 마!”
시끌벅적한 인파들. 몸에 간판을 씌운 채 돌아다니는 인간 광고판들.
성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연극로에 도착한 것은, 우리 수도가 좁디좁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내 시선이 한군데에 꽂혔다.
“빙수 팝니다!”
‘……먹자.’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근처 까페 중 한 곳에 들어갔다.
“……녹차 빙수 하나 주세요.”
아까 멜로에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며 집무실을 빠져나온 뒤.
어딘가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놀렸다.
그런데 정신 차리니 이곳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어릴 때 생각난다. 그나저나…….
‘매일 들락거렸던 장소라 그런가. 어떻게 자동으로 온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니 잠깐 얼떨떨했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아까의 울분이 울컥 올라왔다.
난 앞에 아무도 없는데도 혼자 또다시 삐쳤다.
‘내가 둘 사생활은 안 보기로 한 걸 그렇게 이용하고……!’
섭섭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뻔해.
둘은 나 몰래 그동안 내 어머니 시해 사건에 대해 둘이서만 자료를 공유하며 꾸준히 조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 나 몰래 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전에 내가 한 약속 때문이었다.
예전의 일이다. 멜로와 폐하의 사생활이 나 때문에 종말을 맞이할 뻔한 적이 있다.
왜냐? 내가 보지 못하는 비밀이 없고, 내가 침투하지 못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고 두 사람에게도 엄포를 놓은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서 엿보지 않을 거예요!’라고.
이미 다 봐 놓고 어쩔 거냐고 멜로가 왁왁거리긴 했지만…… 그건 넘어가고.
어쨌거나! 그걸 이용해서 그렇게 중요한 비밀을 감추면 어쩌냔 말이야.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그렇게 생각하며 시무룩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릴 무렵이었다.
마침 서빙을 위해 다가온 종업원이 빙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손님, 불편하신 곳이 있으신가요? 더우세요?”
“아, 아니에요.”
“냉방 켜 드릴게요.”
“괜찮아요!”
‘……왜 이 세상은 내가 진지할 틈을 안 주는걸까?’
나는 뻘쭘하게 종업원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또다시 샐쭉 삐쳤다.
‘그리고…….’
멜로 앞에서는 순간적으로 확 기분 상한 티를 내며 벌떡 일어섰지만.
‘정말 솔직해져 보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