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52)
폐하가 날 구해 주신 일이,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러니, 상대하기 싫은 얼굴 앞에서도 참아야지.’
나는 모르는 척 매표소 앞에 섰다.
그리고 멈춰 섰다. 내 앞을 가로막는 훤칠한 남자에 의해서.
“여기 있었구나.”
혼테인이었다.
록사르의 조카이자, 사건에 개입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의문의 인물.
“건강해 보이네.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그가 나에게 상냥하게 아는 척을 했다.
난 멋쩍게 웃었다.
***
혼테인 웬덤. 그 유명한 웬덤 공작가의 차기 공작님.
말이 차기 공작이지, 이미 현 공작인 부친의 가신들까지 장악한 후 실질적인 공작 노릇은 다 하고 있는 야망 가득한 사내다.
빛조차 흡수하는 것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난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릿속으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계산했다. 왜 웃냐.
사실 아까부터 의식하고 있긴 했다.
내가 어릴 때 살다시피 해서 그런지, 이쪽 부근 대지는 특히 나에게 호의적이다.
그러니 여기 연극로 땅을 밟고 있는 사람의 기척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
마음 같아선 바로 대리석들로 때려 주고 싶었지만, 우선은 느긋하게 웃었다.
“……우와. 선배님도 연극 좋아하세요?”
“아니, 너를 보러 온 거란다.”
그리고 그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로 뜬금없이.
“페리야. 우리 결혼할까?”
“……?”
나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나름 합리적인 추측을 완성했다.
요즘 소극장, 대극장 할 것 없이 흥행 몰이 중인 연극들이 있지!
내용은 비슷하지만 대부분 이렇다.
폭군이나 악당이나 흑막에게 살해당한 주인공이 회귀라는 것을 한 뒤, 살아남기 위해서 그 상대에게 계약 결혼을 제의하는 것이다.
가만 내버려 두면 세계를 망가뜨리는 인간을 감화시키기 위해서.
이거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정말로.
“선배님. 혹시…… 제가 폭군이나 악당이 될 것처럼 보이세요?”
“머리는 치료 안 받았니?”
아닌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페리가 ‘페리 폭군설’을 내세우기 몇 시간 전.
엑저 공작성을 둘러싼 성채 안에서도 가장 외곽인 곳에 위치한 한 양조장. 그곳에 수려하고 눈부신 미남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수심에 빠져 있었다.
형님은 ‘지금은’ 그녀에게 손을 떼고 있다.
그러나 동생인 그는 알았다. 눈에 띄게 하지 말라는 것도, 보인다면 다시 장난감처럼 취급할 것이라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그러니 앞으로도 페리 양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는 굳은 얼굴로 결의했다.
가족들 모두가 더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본인이 나서겠다고.
더 이상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페리가 ‘술주정뱅이 새끼’라고 까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이제 누가 봐도 완벽한 귀족 신사의 표본 같은 몸가짐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세계 최강이라는 칭호와, 그 대단한 엑저 공작가의 차남이기까지!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질시에 빠져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를 질투하는 이들이라도 막상 그를 마주하고 나면 판도가 달라진다.
그의 너무나도 올곧고 완벽한 성품에 반해 그의 부하가 되고 싶어 단련까지 하는 인물이 셀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의아해하는 점도 있었다.
그가 아직껏 애인을 깊게 사귀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온 대륙을 돌아다니는 바쁜 몸이시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은 동성애자 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방탕한 척 과시하곤 한다.
하지만 페녹스는, 어린애 장난이나 마찬가지인 만남만 몇 번 가져 봤을 뿐이다.
‘사흘. 사흘…….’
형님 생각에 뒤숭숭한 페녹스의 뇌리에, 순간 페리 양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요인이 있는 거 아니에요?’
‘…….’
‘그 시기에 애인이랑 헤어졌다든가?’
페리에게 형님과의 사이에 대해 고민 상담을 하러 갔을 때 들은 말이다.
그때 그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어물쩍, 사흘간 형님이 혼자 탑에 계셨단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거야말로 페리 양이 징그럽게 받아들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페리의 예측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었다.
그의 형님은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와도 교제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아무와도.
옛날, 형님의 의사가 궁금했던 페녹스가 물었던 적이 있다.
‘형님. 남성을 좋아하는 거면 그냥 편히 사귀셔도 됩니다.’
그때 레리온은 정말 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끔찍한 오해를 받은 표정을 했다.
‘녹스야…… 너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니?’
으휴. 하고 형님께선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설명했다.
‘만약 판데르니안이 정말 페리를 찾아낸다면, 둘 사이의 아이가 공작위를 이어야 해. 만약 내가 먼저 혼례를 올린다면 후계 문제로 잡음이 생길 거고.’
‘아.’
‘아무리 정숙한 숙녀와 만나도, 그이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갑자기 내 애를 배었다고 책임지라고 선언하면 곤란해질 뿐이고.’
그러던 형님이었다.
물론 페리가 죽었다고 알려지고, 판데르니안에게 미안함을 가진 나머지 가족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권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었다.
레리온은 판데르니안의 후계를 생각해서 일부러 이성을 가까이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일을 떠올린 페녹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형님이, 오히려 탑 이후에 여자와 만나시고…….’
진지한 만남은 아니긴 했다.
아니, 성인 남녀끼리의 불장난을 탓하는 것이 더 이상하기도 하다. 누가 참견할 거리조차 아니었고, 레리온이 방탕한 문화를 즐긴 것도 아니니까.
그 순간 페리 양이 성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두 분의 남매애는 징그러워요. 페리안 공녀님은 돌아가셨겠지만, 살아 있어도 기겁할걸요. 그리고 레리온 공은 동생 닮은 여자 싫어하는 것 같아요.’
‘징그러운가……?’
그가 그렇게 고민하던 때.
순간 페녹스는 깨달았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기분.
갈색 머리, 여자, 사교계.
‘형님이 만난 여자 중에 갈색 머리는 없었어. 하지만…….’
사교계 생활에 중독된 것은 아니지만, 페녹스는 갈색 머리의 젊은 여성 귀족들에 대해선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한 명 한 명, 그녀들 개개인의 과거 위상과 현재의 모습이 나란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확실히.
그리고 페녹스가 심각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그때.
양조장 톰이 허겁지겁 창고에서 술을 들고 나타났다.
페녹스가 얼굴을 풀었다. 약한 이 앞에서 위협적인 얼굴을 보이는 것은 그가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었으니까.
“페녹스 님! 여기 있습니다. 꼭 좀 잘 부탁해서 전달해 주십시오. 혹여나…… 술이 줄어들지 않게 조심해 주시고…….”
“자네도 참! 하하하. 내가 누군데 병 깨뜨리는 것을 걱정하나?”
귀여운 부탁을 들으니 웃음이 나오고, 아까의 추측은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톰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 중간에 한 병 정도 몰래 까드실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인데…….’
페녹스는 그것도 모르고 유쾌하게 하하하 웃었다.
***
페리 양에게 놀러 가고 싶긴 했다. 성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도 걱정이 되고.
뚫린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번 운을 띄워 봤을 뿐인데.
“그럼 이 반찬 좀 전해 주시겠어요?”
“어, 저도!”
페리를 알고 있는 모두에게서 턱턱 짐이 전달되었다.
페녹스는 모두에게 친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작성 사용인들이 그를 편안하게 여기진 못했다.
그러나 페리라는 존재가 있으면 달라지는 것이다.
짧은 시간 있었는데 모두가 챙겨 주고 싶게 만들고.
그러고서 본인은 훌쩍 떠나 버렸다.
‘나한테만 편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편안한 사람이었구나.’
그 사실을 떠올린 그가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성국에 있다던 피 안 섞인 ‘오빠’가 누군지도 신경 쓰였다.
‘뭐, 나는 이제 페리 양과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을 거고…… 페리안과 페리를 겹쳐 보지 않을 거니까.’
그럼 나도, 피 안 섞인 ‘오빠’ 정도는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친한 아는 오빠 정도로…….’
이건 정말 흑심이 아니었다. 여자로 보는 것도 아니고, 페리 양에게서 페리안을 기대하는 것이 실례라는 것도 안다.
이제는 페리 양 그 자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까지.
그러니까, 페리 양이라는 인간 자체와 자연스러운 인연을 맺고 싶었던 것이다.
시녀와 공자라는 관계 말고, 좀 더 친근하고 평등한…….
‘친구라든가.’
그가 수줍게 생각했다. 친구. 친구. 좋은 울림이다.
남들이 듣기엔 그것도 변태 같다는 건 그는 몰랐다.
그때 저 멀리서 순간 이동용 마법진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사삭!
그리고 그의 예민한 청각에 욕설이 들렸다.
‘판데르니안?’
그는 땅을 박차고 날듯이 엑저 공작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난리가 나 있었다.
발동이 실패하여 주변이 반파해 있고, 관리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고.
판데르니안은 서늘한 얼굴로 ‘마법진 관리를 누가 했지?’라고 살벌하게 묻고 있었다.
페녹스가 헛기침을 하며 다가섰다.
“우리 공작 동생, 뭐 하나?”
사실 페녹스의 참견은 당연한 것이었다.
‘레리온 형님이 마법진을 타고 가서 페리 양에게 접근하고 ‘눈에 보였다’라는 억지를 쓸까 봐…….’
그런 걱정을 하며, 성국행 마법진들을 뽀각뽀각, 열심히도 깨뜨린 것이 본인 자신이었으니까!
판데르니안은 한껏 성질을 부리다가 페녹스가 들고 있는 짐을 보고 물었다.
“……넌 뭘 그렇게 들고 있어.”
“아, 이거? 페리 양에게 놀러 갈 겸 선물들을 전해 주려…….”
“……혼테인과 그 시녀가 무슨 관계인지 더 아는 정보 있나?”
페녹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판데르니안은 이를 갈고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페녹스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왜 그런감?”
대답 대신 날아온 것은 통신구였다.
페녹스의 비범한 동체시력이 날아오는 통신구에 쓰여 있는 글자를 읽었다.
그에겐 던져진 통신구를 받아서 멈춰 놓고 읽어야 한다는 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절차조차 필요 없다.
0.1초 만에 지나가는 글자도 정확히 또렷하게 읽을 수 있으니.
그러나.
[그쪽 시녀님에게 청혼하러 가는 중.]잠깐 놀라서 그대로 받지도 않고 뒤로 날아가게 둘 뻔했지만, 정신 차리고 재빨리 낚아챘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주제 모르는 작자가?”
“혼테인이다. 우리 쪽에 시비를 걸기 위함이겠지. ……아마 여자는 가지고 놀다 버릴 테고.”
그 말에 페녹스도 살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깐이나마 공작성에서 근무한 우리 사람이야. 서제국 인간에게 농락 당하도록 두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혼테인 공이라면…… 내가 가는 것보단 판데르니안이 직접 가는 게 낫겠어.’
그는 눈물을 삼켰다.
“근데 이 망할, 어떤 대가리 빈 놈이 성국으로의 이동진을 죄다 망가뜨렸…….”
판데르니안이 말하다 말고 홱, 페녹스를 노려봤다.
“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