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57)
시녀한테 경어 쓰지도 마시고,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지도 마세요. 많이 힘들었던 만큼 행복해지세요.
판데르니안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네가 뭔데 충고하지?”
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처럼 샐쭉, 음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엑저성의 주인, 판데르니안은 영지로 돌아오는 길 내내 감정을 갈무리해야만 했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제 몫으로 온 선물을 받아 갔다.
‘근데 그거 제 거죠?’
‘…….’
‘보자기가 톰 아저씨 도시락통 보자기인데.’
판데르니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남이 흔드는 대로 휘둘리는 여자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맹한 얼굴로 뒤에 비밀을 숨기고 있단 것도.
그러나 끝까지 평범한 소시민인 척 연기했던 여자가, 갑자기 왜 본색을 보여 줬는지.
그 이유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충동적으로 보여 준 것은 아닐 테다.
그때 아까 혼테인과의 언쟁에서 얻은 소득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동행을 붙이려 했던 것은, 사실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그 여자가 엑저의 명예에 해가 될 일을 할 것 같지도 않았었으니.
다만 서제국에 간다면 여기서 시녀로 지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모욕을 당할 것을 대비해 사람이라도 붙여 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서제국에서 죽어도, 제 눈이 닿는 곳에서 죽어야 한다.
그럼 누굴 붙이는 게 좋을까.
언뜻 처음으로 생각한 후보는 페녹스였다.
그 여자와 친한 사이라는 걸 계속 거리낌 없이 티를 내던.
그래. 페녹스, 놈이 붙어 간다면 그 여자가 그쪽에서 크게 망신 당할 일도, 육체적으로 위험에 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친한 척을 하며 온갖 주접을 부릴 테니까.
‘…….’
하지만 상냥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던 페녹스의 모습을 떠올리니, 무언가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방금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욕했다.
***
비슷한 시각,
성국 성기사단 본부의 사무실엔 대단한 사람이 방문해 있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녀가 여기 올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사들은 입 모양으로 숙덕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난들 아냐?’
그리고 그 요주의 인물의 방문에, 성국의 후계자가 몸소 내려와 직접 맞이하고 있었다.
멜로는 냉정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상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압박에도 상대는 계속 상큼하게 싱글싱글 웃을 뿐이다.
유심히 그녀를 노려보던 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옐베리 경. 입단 권유가 여러 곳에서 많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왜, 권하지도 않은 성국에 오셨을까요.”
엑저 공작가에선 뒤늦게 찾은 공녀에게 세상 모든 것을 쥐어 주고 싶어 했다.
그러니 그런 그녀의 시녀로 뽑힌 옐베리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설명조차 필요 없을 것이다.
공녀의 시녀로 발탁되기 전부터도 검사들 사이에서 천재 유망주 중 하나로 이름 날리던 인재였다.
그러니 멜로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여자가 여길 왜 와.’
그의 표정이 뚱해졌다.
사실 아무리 그래도, 원래라면 나라의 정무를 보는 후계자가 대면 면접을 볼 일은 없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뭐든지 의심하고 보는 그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기사단에 들르는 척하면서 마주치는, 추잡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만나 보기 위해 직접 내려온 것이었다.
멜로는 친구가 통신기도 사 줬다고 자랑하던 멍청한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면 페리에게서 무언가 의심스러운 걸 느끼고 접근하는 것일지도.’
게다가 옐베리는 너무 젊은 기사였다. 한창 검사로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할 수 있는 전성기가 바로 지금.
‘본인에게도 중요한 시기를 성국에서 허비하겠다는 것은…….’
멜로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세간엔 록제 성국의 성기사단은 오합지졸 아저씨 모임 따위로 알려져 있다.
환경은 천재도 쇠퇴하게 만들고, 반대로 범인을 영웅으로 끌어 올리기도 한다.
제대로 된 동료들도 없다고 알려져 있는 이곳.
그런 성기사단에 들어오려는 이유?
그런 게 있을 리가.
여기는 봉급도, 대우도, 명예도, 그녀를 부르는 곳들 그 어디와 비교해도 한참 모자란 곳이다.
‘……그러니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상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의심하고 뜯어보는 멜로와 달리, 한없이 솔직하고 깨끗한 옐베리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네! 새로 사귄 친구가 성국민이라, 성기사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학생보다 뻣뻣한 면접 대답이었다.
그녀 딴엔 면접에서 떨어질까 봐 잔뜩 긴장한 채였기 때문이다.
‘입단하고 싶어!’
“…….”
멜로가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 공격했다.
“옐베리 경은 고작 친목 도모를 위해 입단 신청을 하셨다 이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물론 겸사겸사 친구와 가까워지면 좋은 일이긴 하지만…….”
옐베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의 조언 덕분에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게 되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탐색하며…….”
어디 십 년도 전에 나온 면접 대비 멘트 같았다. 멜로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끊었다.
“그런 상투적인 대사는 됐습니다. 결국 옐베리 경은 그 친구란 사람이 떠나면 그만두시겠군요.”
“아니요.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지원한 건 아닙니다.”
멜로가 코웃음쳤다.
그리고 그가 단호하게 내쫓으려는 그때.
그의 시야 한 구석에 슬픈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덩치가 매우 큰 아저씨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성기사단 단장인 인물이다.
“…….”
그는 멜로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눈빛으로 ‘제발 뽑아 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멜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양 제국에게 견제받을까 봐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실력도 감추고, 조롱거리로 전락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던 사람이다.
저렇게 애원하는 눈빛으로 보면, 조금 의심이 가는 인물이라도 한 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법.
‘의심스러운 것이 밝혀지면 그때 내쳐도 되니까…….’
깐깐한 성국 후계자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면접을 통과한 옐베리는 신나게 팔을 휘저으며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모두가 비웃는 나라지만, 직접 와 보면 알 수 있다.
‘애들이 모두 웃고 있어.’
옐베리가 본 성국 아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옐베리는 당연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나란데, 애들이 구김살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의문은 간단히 해결됐다.
‘아이들은 교육비도, 식비도 무료라구요?’
‘그럼.’
그 말을 듣고, 옐베리는 며칠간 성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는 사라져서는 안 되는 나라라고.
물론 페리 덕분에 성국에 관심이 생긴 것은 맞다. 시작은 분명히 페리였다.
하지만 결심한 것은 옐베리 본인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의 흔적에만 집착하지 말고, 나의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페리가 말해 줬으니까.’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옐베리는 슬쩍 웃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여자의 감 같은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럼 이건 우정의 감일까?’
옐베리가 씩씩하게 미소 지었다.
증거 하나 없는 가정이 하나 있다.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논리 따윈 찾아볼 수도 없는 억지 가설이다.
그러나 그녀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앨리스 님과 페리는…….’
옐베리는 씩씩하게 계속 걸었다.
***
레리온은 철두철미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가끔 늦잠을 자곤 했다.
사람들은 그게 완벽한 남자의 한 가지 귀여운 버릇이라고 여기고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침실에서 늦게 나온 날은 페리 꿈을 꾼 날이란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꿈에서 아기 동생을 본 날이면, 깨고 나서도 아쉬워 한 번 더 얼굴을 보고 싶어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 꿈이 결국 어떻게 끝이 나는지 알면서도, 한 번이라도 더 안아 보기 위해서.
그는 꿈속에서 동생을 바라보며 마음 편히 웃었다.
페리는 정말 귀여운 아기였다.
아기다운 오밀조밀한 생김새.
몸에 직선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모든 곳이 둥그스름했다.
뽀얗고 통통한 살결에, 사랑스럽게 빛나는 눈동자와 항상 웃음기 머금고 있는 입가까지.
아기는 장난기도 많고 활달했다.
또 똑똑하기까지 해서, 자기 딴엔 장난을 쳐 놓고 씨익 웃고 있곤 했다.
물론 아기가 치는 장난이라고 해 봤자 오빠의 신발 안에 나뭇잎을 넣어 놓는 정도였지만.
그런 장난을 쳐 놓고 아기치곤 짖굿은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는 걸 보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꿈 특유의 맥락 없는 시간 흐름 덕분에, 어느새 페리안이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아기 페리가 내복 차림으로 동화책을 들고 읽어 달라 보챘다.
“읽어. 읽어.”
“읽어 줘?”
“응. 읽어조.”
깨끔발을 서서 한 손으론 동화책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오빠를 끌어안고.
“크라켄 동화?”
“응. 응!”
“……우리 공녀님. 몬스터 전집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뭉스터?”
“크라켄이랑 미노타우로스들을 몬스터라고 해요.”
“…….”
페리가 갸우뚱하다가 다시 보챘다.
“읽어 조.”
레리온은 웃으며 동생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귀여운 삽화로 알록달록하게 그려진 크라켄이 나타났다.
“옛날 옛날에, 아기 크라켄 공녀님이 살았습니다. 크라켄 공녀님은 크라켄 나라의 크라켄 공작의 막내딸이었어요.”
“크라캥!”
단풍잎 같은 손이 박수를 쳤다.
벌써부터 열렬한 호응이다.
페리는 아기답게 같은 동화책을 열 번 읽어도 질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낭독자인 레리온도 그만큼이나 이 동화를 읽었다는 소리다.
그땐 그랬다.
동화의 내용을 암송할 수 있을 만큼 읽어 주곤 했다.
레리온은 부슬부슬한 페리의 정수리 위에 턱을 살짝 올려 놓고 천천히 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따뜻했다.
그러나 서서히, 턱 밑에 감돌던 온기가 식기 시작한다.
온몸이 말랑한, 사랑하는 동생은 어느새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러나 꿈속 자신은 낭독을 멈추지 않는다.
이미 죽은 동생을 안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동생이 좋아하던 동화를 읽어 나간다. 두 눈에서 하염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때 레리온은 꿈에서 깼다.
-쾅
구태여 눈을 뜨고 상대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방에 저렇게나 막 드나드는 인간이라곤 귀염성 없는 셋째밖에 없었으니까.
딱딱하게 굳은 시신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안고 싶었는데.
내심 아쉬워하는 그에게 셋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그 시녀를 따라다녀 줘야겠어.”
“…….”
레리온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결혼식은 세 달 뒤란다.’
‘……예?’
‘어차피 일정 없잖니. 세 달 뒤에도.’
판데르니안과의 대화를 마친 다음 날, 내게 방문한 혼테인은 웃는 낯으로 그런 희한한 소리를 지껄였었다.
결혼 허락 받기 전에 양가 부모님을 만나 뵙고, 허락을 받고, 상견례를 하는 그 모든 절차는?
일단 이 신분은 부모 없고 일가친척 다 돌아가신 고아라지만, 그쪽 친척들이 날 싫어할 가능성은?
신부의 의견이나 상황 따윈 개에게 준 것 같은 결정이었다.
안 그래도 이쪽은 말도 안 되게 흠이 가득한 조건인데, 내가 미움받기 딱 좋을 명분까지 만들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고.
난 당연히 되물었다.
공작 부부를 아직 못 뵈었는데도 괜찮겠냐고.
혼테인은 내 염려를 듣고 걱정 말라는 듯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 괜찮단다. 내 양친께서는 눈이 높지 않으셔서.’
‘…….’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쌍욕을 하지 그러냐?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뒤인 지금.
나는 떫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창밖으론 바깥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고, 저 아래로는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