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67)
연한 보랏빛 단발에 핏빛 홍채를 가진 서제국의 황녀.
사나운 인상의 황녀가 날 위아래로 훑었다. 그 눈엔 적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섭섭하진 않았다.
‘이 년 전, 내가 이 남매를 도운 적이 있기는 하지만…….’
서제국 황실에 침투해서 기밀작전을 펼치고 있을 때 겸사겸사 도왔었지. 몰래 분유나 기저귀를 놓고 가는 식으로.
하지만 감사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지.
당시엔 내 정체를 숨겨 놓고 지금의 나를 알아채 달라는 건 억지일 뿐이니까. 오히려 잘 자란 것 같아서 기특했다.
그 와중에 황녀님이 내게 인사했다.
“혼테인도 눈이 많이 낮아졌군. 아무리 천것이라도 황녀를 보고도 먼저 예를 갖출 줄 모르는 여자라니.”
감격. 그땐 낯선 사람을 너무 따르는 것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타인을 경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구나. 뿌듯합니다, 황녀님.
어쨌든 허둥지둥하는 척하며 내가 급하게 인사를 올리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때.
“안아.”
어눌한 발음의 아이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을 깼다.
“안아, 안아.”
황제가 내게 짧은 두 팔을 벌리고, 몸을 기울인 채 안아 달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
물론 아기 황제가 내게 안겨 평소보다 밝게 웃고, 꺄르륵 애교를 부리고, 내 품에 파고들었다 해도…….
황녀님이 나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경계심만 더더욱 강화된 듯하다!
그리고 세이비어 님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낯가림이 심하다던데.”
“…….”
“하하하…… 왜 그럴까요…….”
“조아. 좋아.”
황제가 고사리손으로 내 얼굴을 챱챱 만져 댄다.
‘으아아…….’
아기 황제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무섭다.
한창 록사르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보란 듯이 두 남매를 방치하던 시기.
황제는 그때 진짜 애기였다.
정말 애기뿌스러기였다! 내 얼굴을 보여도 상관없는.
그래서, 황녀가 자리를 비우거나 했을 때 황제가 뿌애애액 울어 대면 애를 안아 주긴 했었단 말이지.
‘물론 지적받으면 할 말 없는 위험천만한 행동이긴 해.’
나의 흔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도록 지문도, 솜털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가체로 갔다지만, 일과는 아무 상관 없는 대상에게 접촉하고, 또 모습까지 보이다니.
절대 스파이답지 않은 바보 같은 짓이긴 했다.
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최강 스파이가 된 것도 결국, 모망 폐하께서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던가.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세계를 위해서.
그러니, 우는 애를 어떻게 내버려 둬?
그래, 다 변명이야! 잉잉잉…….
난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비비적거리는 아기 황제를 내치지도 못하고, 속으로 울었다.
그런데 그때, 벌떡 하고 황녀가 일어섰다.
“이만 가 보겠소.”
세이비어 님과 황녀님께선 적당히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대화를 하고, 나는 감히 얘기에 끼지도 못한 채 아기 황제에게 잡아당겨지고…….
두 분이 얘기가 끝나자, 황녀님은 제 동생을 홱 낚아챘다.
역시. 자기 동생이 원수의 부인에게 안겨 있는 모습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난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 황녀가 돌아서는 그 때.
내가 다급히 외쳤다.
“황녀님, 사탕 좋아하세요?”
“…….”
“젤리도 있는데.”
세이비어 님조차 ‘얘 왜 이래.’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무척이나 뜬금없고 예의 없는 질문.
‘하지만 이건 줘야 해.’
난 아침부터 내내 들고 다니던 가방에서 꽤 커다란 사탕통을 꺼냈다.
유리스의 억지에 타협해 가면서까지 얻어 낸 사탕.
그래. 보온 마법이 걸린 사탕이다. 이 둘 주려고 준비해 놓은.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
황녀는 사탕을 좋아한다.
왜 그런 걸 아냐고? 왜냐면, 당시 내가 사탕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없는 환경에 놓여 있던, 이름뿐인 황제와 그 누이.
나는 내 일을 하면서도 그 둘을 조금 돕기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가져다주는 것들은, 아기 황제와 청소년 황녀가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생활용품이나, 오로지 아기를 위한 육아용품들이었다.
……그러니까, 오로지 ‘황녀’ 개인을 위한 선물은 없었었다.
오직 사탕 빼고.
사탕 같은 기호식품을 아기한테 먹일 수는 없지.
그래서 사탕은 황녀 혼자의 몫이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나 자신만의 소유물 하나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오직 자신을 위한 선물을 받게 된다?
그건 엄청난 감동이거든.
‘…….’
그래서 내가 사탕 몇 알을 놓고 가면, 황녀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기쁨을 숨기곤 했다.
‘하지만…….’
그 방치가 끝난 뒤, 두 남매는 겉으로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황녀는 그런 군것질을 입에 대지 못했다.
값싼 기호식품을 먹는 것은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사실 눈치 볼 것도 아닌데.’
적들 사이에 둘러싸여 계속 정통성을 증명해야만 했던 황녀.
황실의 핏줄로서 누구보다 품격 있는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어린애는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내가 유리스와 거래한 거고…….’
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제 친구가 만든 건데요, 맛있고 잘 안 녹는데 입 안에서 굴리는 동안엔 체온이 최적온도를 유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신기하지요?”
물론 평범한 기후 한정이고, 영하 100도라거나 하는 곳에서는 당연히 무용지물이지만.
난 그런 유의사항을 설명하며, 사탕 케이스에 글을 썼다.
‘페리가 황녀님께.’라고.
황녀는 그 글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뭔가 안쓰럽네.
물론 이것도 일부러 쓴 것이다.
속으론 나를 개무시하는 록사르. 하지만 그는 아직까진 나를 대우해 주고 있다. 자신의 주군인 혼테인의 부인이니까.
그러니, 새 신부가 준 사탕을 빼앗을 수는 없는 법. 난 그걸 계산하고 이걸 직접 준비했던 것이었다.
황제와 황녀와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는 환경과, 정치적 의미 같은 건 없어 보이는 가벼운 선물을.
‘…….’
나는 두 애들이 록사르의 화려한 방에서, 일부러 아주 초라하게 조성된 구석에서 둘이 기대 자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부턴 따뜻하게 잠 잘 수 있겠지.’
황녀님은 서 있는 상태로 계속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나는 안타깝게 자라는 아이들을 모두 구원해 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황녀님이 ‘아이’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저 살벌한 눈빛을 봐라. 야망 어마어마한 다 큰 황족이지…….’
하지만.
황녀님은 마땅히 누렸어야 했을 유년기를 빼앗기지 않았는가.
아이가 아이일 권리를 강탈당하지 않았던가.
그럼 나는…… 이제 거의 숙녀가 다 된 황녀님에게도 아이처럼 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튼튼하고 멋진 어른이, 그런 사람들의 결핍된 부분을 보듬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황녀님은 당당하고 멋있게 황제를 낚아채고 루프탑 정원을 나가셨다.
***
한 팔엔 사탕통을, 다른 한 팔엔 록사르 웨스트를 안고 황녀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도 탑 위에서였다.
황녀의 기억이 찬찬히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방치가 계속되고 썩고 부패한 식량이 들어오던 그 시기.
이젠 진짜 아무것도 믿을 게 없다고,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던 그 순간.
어느 순간부터 머리맡에 놓였던 식수와 빵, 그리고 삼 개월짜리 황제를 위한 분유가루.
군사학과 제왕학, 수학과 역사를 비롯한 온갖 학문을 섭렵했던 황녀였지만, 분유를 타는 법은 몰랐다. 그래서 식량을 받은 첫날, 그 분유가루를 못 쓰게 만들어 버렸었다.
‘어떤 양심 있는 귀족이 목숨 걸고 보낸 것일 텐데, 누나가 모자라서 미안하구나.’
서러웠다. 그만큼 패배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을 끌어안고 서러워서 눈물을 흘렸다. 기회가 와도 잡지 못한 본인이 머저리 같아 괴로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황녀는 분유 냄새에 눈을 떴다. 그리고 쪽지를 받았다.
머리맡엔 어제와 똑같은 품목의 식량이 있었고, 어제보다 두 배 많은 분유가루가 있었고, 웬 잡지에서 찢어온 것이 분명한 종이가 있었다.
[고수 엄마들은 분유를 어떻게 타는가?]그 이후로도 선물은 계속되었다. 푹신한 담요가 들어오기도 했고, 베개가 오기도 했고, 황제궁에서 연회가 열린 날엔 그날의 메뉴 몇 가지가 몰래 들어오기도 했다.
자다가 울면서 깨던 황녀는 어느 순간부터 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부턴, 울면서 깨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삶은 아직도 괴롭고,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고 나면 그분이 오니까.
그 사람이 오는 날은, 분유 냄새가 나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주는 분유 냄새. 그게 은은하게 풍기고 있으면 왔다 간 날인 것이다.
마음은 주고 싶지 않아도 제 알아서 가 버렸다.
저자는 첩자일 수도 있고, 나를 더 큰 절망에 빠뜨리려는 록사르 웬덤의 여흥일 수도 있다. 그렇게 아무리 되뇌여 봤자 소용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