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79)
“그러렴.”
“당신 태생부터의 이상함이 그쪽 숙부가 초래한 원인이란 건 알고 있죠?”
여전히, 그의 눈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기 좋은 수려한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가는 것은 뚜렷했다.
난 속으로 혀를 찼다.
“왜 록사르를 가까이 둡니까?”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어둠 속이지만 얼굴이 보이는 거리가 되고…….
이윽고 혼테인은 손바닥으로 날 쓰다듬으려 하는 듯,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꾸욱.
아래를 향해 짓누른다.
‘이 자식이…….’
어쩐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혼테인이 대답했다.
“불쌍한 어린애가 멋모르고 희생되었다고 생각했어? 왜. 록사르가 제일 나쁘고 나는 이용당한 거라고?”
“…….”
“록사르는 처음부터 내게 제 행동을 고백했단다. 태어나 주셔서 영광이라면서. 나는 특별히 용서하지도, 벌하지도 않았지.”
“…….”
“그 애는 우매하지만, 결국 그 애가 품은 이상이 세상에 도움이 되었잖니.”
“……무슨 이상이요?”
내 고개는 그의 손에 의해 강제로 숙여져 바닥만 보고 있었지만, 지금 혼테인이 웃고 있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너무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니?”
‘네 인성이 더 더럽거든?’
“나는 멍청한 우민들의 생까지 원만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란다. 버러지 한 명까지 예외 없이 모두가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건.’
난 혼테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연극로에선 지금 너 같은 주장을 하는 악당 캐릭터들이 한 시즌에 열다섯 명씩 나타난단다.
그리고 진부하다고 욕먹고 사라지고, 다음 시즌에서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된단다. 진짜로.
‘이거랑 비슷한 흑막 악당 패턴이 또 있지!’
전 세계 인류의 수준을 높이고, 폭력과 분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의 정신을 연결하여 한 명이 곧 모두이자 모두가 곧 하나인 제 3의 인류로 진화하는…….
‘아니, 이럴 때가 아닌데.’
“왜 이걸 나한테 순순히 말해 주죠?”
“네가 사실을 안다 해도 뭐가 달라지니?”
혼테인은 진지한데 난 자꾸 연극 폐지와 함께 사라진 옛 악당들이 아른거려서 망했다.
“소문이라도 내고 다니게? 분수를 알아야지. 나는 혼테인이고, 너는 본인 정체도 감추고 도망쳐야 하는 하찮은 여자애잖아.”
……그리고 그중엔 내가 좋아하던 악당도 있었다. 진부할 정도로 계속 나오는 클리셰는 그만큼 인기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마음껏 해 봐. 혼테인 공이 미쳤다고 외쳐 보렴. 세상에 누가 너의 말을 믿어 줄까? 불쌍한 것.”
……상영 중단이 결정되고 흙 속에 파묻혀서 엉엉 우는데, 일름보 멜로놈의 이야기를 들은 폐하가 그 연극의 마지막 팸플릿을 구해 돌아오셨었다.
‘폐하는 얠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우십니다!’
‘…….’
‘헤헤헤…….’
옛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가운데, 혼테인이 비웃었다.
“네까짓 게 뭐라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럼! 세상까지 바꿀 수 있지.
난 박치기로 혼테인의 손을 밀쳐 내고, 얼굴을 들었다.
“당신, 감정 못 느끼죠? 나 빼고.”
“그래.”
난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냥 불량품 아닌가?”
“…….”
“아니, 한 명한테라도 예외가 생기면 실패작이잖아. 그쵸? 완벽한 사람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은데.”
혼테인은 잠시간 날 쳐다보다 웃었다.
그리고 내 양 뺨을 손으로 감싸며 얼굴을 가까이 대 온다.
“……내 예쁜 페리안.”
“네.”
“네 말대로, 난 너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단다.”
양 뺨이 점점 꾸욱 조여졌다.
“그러니 날 화나게 할 수 있는 것도 이 세상에서 너 하나뿐이야.”
내 말 맞잖아!
“불량 맞네!”
난 혼테인의 손을 탁 쳐 냈다.
“혼테인 공. 굳이 록사르를 아끼는 것도 아니죠?”
“그렇단다.”
“그럼 한 번, 제가 얼마나 못 바꾸는지 보세요. 록사르한테 가서 제가 공녀라고 이르지만 말고.”
“내가 왜?”
“저도 불륜 안 할게요.”
결혼식 일주일 전.
바다 표면이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투명한 바다.
수상 교통수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그 섬이 있다.
물고기 하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바다를 한참 지나, 암석 해안이 보이면 도착한 것이다.
암석 해안의 위.
가장 높이 솟아오른 암석에서부터 약 삼십 미터 위 상공.
섬은 그곳에 마치 신기루처럼 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신비한 섬을 ‘황제의 요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곳은, 혼테인 공과 성국의 새 신부가 혼인을 치를 장소이기도 했다.
***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명소 중 하나.
바다 위 허공에 떠 있는 기적 같은 아름다움은 이 섬의 신비로움을 더해 주는 요소일 뿐이다.
황제의 요람은 서제국 초대 황제가 처음으로 건국을 선언한 장소였다.
대략 이천오백 년 전의 일이지만, 이 섬엔 그 당시의 유물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섬 한가운데에 깊게 박힌 채.
유물은 건국왕이 남긴 검이었다.
‘제국이 혼란해질 때, 정당한 황제가 섬으로 가거라. 성검을 뽑으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은 저 유언에서의 ‘성검’이 ‘황제의 검’으로 정정된 상태로 퍼져 있지만.
사실 박힌 검에 대한 전설은 지금 와서는 조금 진부해진 감이 없잖아 있다.
다른 왕들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건국설화에 좀 멋진 전설을 섞어 넣기만 해도 없던 정통성이 생긴다는 사실을!
지금에 이르러서는 비슷한 후발주자 설화들이 차고 넘친다.
저 멀리 어느 나라에도 비슷한 건국설화가 있고, 또 그 옆의 나라에도 뽑히지 않는 검에 대한 전설이 있고, 또 다른 어디에도 얼추 비슷한 전설이 있으니…….
하지만, 아무리 흔해졌다 해도 이곳은 그런 흔한 전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섬.
그러니…….
“너무 아름다워요!”
“뛰지 마렴, 아가.”
작금의 이 풍경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 귀한 곳에, 아무리 귀족들이라지만 사람들이 몰려와 즐겁게 웃고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심지어 섬 여러 군데에선 공사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결혼 예식장을 지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철거할 때 섬이 크게 훼손되지 않을 만한 단단한 지반만 측정해 그 크기만큼 홀 여러 개를 짓겠다는 계획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원래 황제의 요람은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귀족들의 접근조차 엄중하게 금지하는 장소.
그리고 항해가 해양마물들의 존재로 거의 불가능해진 이후, 이 섬에 접근하는 일은 더더욱 힘들어졌다.
비행 몬스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사가 아니면 도달할 방법 자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긋지긋한 웬덤.’
사방이 시끄럽고 활기찬 가운데, 그늘 아래에 조용히 앉아 있던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연한 보랏빛 단발에 핏빛 홍채, 그리고 사나운 인상까지.
원래대로라면 황제가 되어야 했을 비극의 황녀.
알로 웨스트였다.
알로는 섬 위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 지긋지긋한 웬덤의 조상이 만든 부상열차 덕분에, 전설 속 장소도 한낱 관광지처럼 보이지 않나.
알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었다.
‘그래. 실존하는 황제도 우스운데, 고작 고전설화 따위가 별거일까.’
참으로 한심한 인생들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한심한 본인이다.
열차 내에서의 일들은 모두 굴욕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크루즈 열차 내부 온갖 연회장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갖가지 주제로 호화 파티와 행사를 수십 개씩 열었지만, 그 누구도 황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록사르의 방에 갇혀 있느니 바깥에서 한심한 것들을 구경하는 것이 나았지만…….’
그나마 가끔씩 옆에 얼쩡거리려던 것은 혼테인의 신부뿐.
그러나, 웬덤의 계집이다.
얼굴을 마주해도 짜증 날 뿐이었다.
‘재수없는 여자.’
아군 하나 없는 외로운 황녀는, 패배감을 마음 깊은 곳으로 숨기고 망루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망루의 외관을 보고 우뚝 멈췄다.
그동안 대부분의 귀족들은 크루즈 열차를 숙소로 사용했다.
밤이 되면 크루즈 열차에 탑승해 기존에 배정됐던 방에 돌아가 숙면을 취하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나오는 것이다.
몇몇 특별히 중요한 사람들만 섬에 건축된 숙소를 이용하곤 했다.
그런데 마침 오늘 아침, 알로에게도 섬 위에서의 방이 배정되었었다.
‘황녀님께서는 오늘 저 망루 안의 방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명백한 모욕이었다.
멈춰 서서 망루의 생김새를 훑어본 알로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별 준비를 다 해 놨군.”
***
“아이구우-”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지금 이 섬에서 그나마 내 본체라고 할 만한 가장 튼튼한 가체는, 혼테인의 방에 감금당하다시피 갇혀 있다.
‘산책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그 몸으로 하는 것은 오로지 혼테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하지만 감금이 나한테 소용이 있을 리가.
난 자유를 잃은 우울함에 계속 잠으로 도피하는 척하면서 흙사람 모양으로 이리저리 쏘다녔다. 준비할 게 너무 많았다.
“맞다.”
난 잠시 아군 둘의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흙사람의 뿌연 시야로 세이비어 님이 보인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상대는 황제파 귀족이었던 거물 귀족 중 한 명이었다.
‘세이비어 님의 친정은 대표적인 친황제파 귀족이었던 셀버스 공작가…….’
후에 진짜 황제님이 즉위하게 되면, 중요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황제님은 사실 아직도 어리니까.
그리고 난 섬을 샅샅이 훑어보며 유리스를 찾았다.
유리스는 섬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가 부탁한 작업을 하러 멀리까지 나가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힘내라, 유리스!
난 지금 문어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유리스에게 마음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
한참 후, 밤 늦은 시각.
헉헉거리며 돌아온 유리스의 어깨를 쭈물쭈물해 주며 고생했다고 칭찬해 주고.
“그럼 내가 할 건 이제 다 된 거지?”
“다 했어, 다 했어. 충분해.”
“진짜 죽는 줄 알았다. 검은 것이 나를 덮친 순간…….”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던 우리 대화는, 어쩌다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리스가 혼테인을 욕하고 싶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질문했다.
“근데 그, 네 패륜아 남편은 왜 웬덤 부부를 하필 여기서 죽이려고 한 거야? 굳이 결혼식장에서. 너랑 혼인한 것도 특별히 이유가 있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정권을 물려받기 위해서 죽일 거면 이런 이상한 쇼를 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사고사로 부모 둘을 처리하면 그만이다.
“결혼식에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내가 죽으면.”
“죽으면?”
“원수를 갚기 위해 공격적인 행동을 해도 되잖아.”
동제국의 음모라면서 뒤집어씌워서 전쟁의 빌미로 삼아도 된다.
후에 동제국과는 관련이 없단 것이 밝혀져도 의외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테인 측을 이해하려 들 것이다.
그럴 만했겠다, 라고.
“물론 그냥 전쟁을 시작해도 되지.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쟤넨 명분까지 다 가지고 싶은 거야. 정의롭고 완벽한 공작의 이미지를.”
덤으로, 굳이 건국설화가 있는 섬을 선택한 건 그냥 록사르가 음습해서 그런거 아닐까.
내 해석을 들은 유리스가 혼테인의 욕을 시작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약 5분간 이어진 유리스의 욕은 중간에 단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오직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언어만으로 설계되어 언어로만 구현된 예술 그 자체다!
와, 하고 놀라는 사이 문이 열렸다.
세이비어 님이 들어오신 것이다. 하지만 우린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 둘이 먼저 세이비어 님 방에 놀러 온 것이기에.
세이비어 님은 가방에서 원통형 모양의 케이스를 꺼내시고 내게 건냈다.
“얻어왔다.”
“와! 감사합니다.”
“웬 분유야?”
케이스를 본 유리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농담 삼아 내가 분유 가루를 좋아한다 했는데 둘 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는 과정 후.
나는 양손으로 각각 둘의 손을 붙잡고 만세하듯 들어 올리며 외쳤다.
“우리가 이긴다!”
***
영웅은 분유 냄새와 함께 나타난다.
“…….”
알로 웨스트는 뒷짐을 지고 망루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세심하게 만들어 놨구나.”
나자마자 황위를 이을 몸으로 교육받으며 자란 적통 후계자는 갑자기 800년 전의 전통이었다는 장남 상속법으로 인해 ‘황녀’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록사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힘과 권력이 누구에게 옮겨졌는지 과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였다.
약 이 년 전, 황녀와 아기 황제가 망루로 방을 옮긴 것은.
“…….”
뚜벅 뚜벅.
알로는 무표정으로 계속해서 걸었다.
‘완전히 똑같군.’
이 년 전, 지긋지긋하게 봤던 그 망루의 내부와.
그 망루는 이미 건물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상태였다.
철거하지 않은 것은 역사적 유물로 후세에게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록사르 웬덤은 섭정이 되자마자 그 망루를 ‘별성 이라 명명하고 황녀의 거처로 지정했다.
자신들이 승리했음을 서제국 모두에게 경고하는 퍼포먼스였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정말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막 갓난아기를 벗어난 유아와 열세 살 소녀가 그곳에서 방치당해야 했다.
무섭고도 슬픈 나날들이었다.
망루의 옥상에선 황제궁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황제궁을 차지한 웬덤 쪽 귀족파 놈들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 매일같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알로는 그걸 망루 첨탑 꼭대기에서 지켜보며 울분을 삼켰다.
‘네놈들을 언젠가 다 찢어 죽일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