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8)
어쩌다 구원했지만, 책임은 안 집니다 2화(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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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차에서 내렸다.
드디어 엑저 공작령에 도착한 것이다.
선공작은 내게 부족함 없는 대우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건 정말이었다.
난 귀족들이나 받을 법한 호사를 누리며 공작령으로 모셔졌으니까.
기사에 전담 하녀, 선생까지 붙이고 특급 열차의 최고급 객실에 묵으며 이동하는 것은 여행이나 다름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선공작의 언질이 있던 탓인지, 사람들은 성국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공녀님의 시녀로 뽑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내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뒤에서 수군거렸을 뿐.
‘얼굴 봤어?’
‘세상에. 생긴 것 봐. 깜짝 놀랐어.’
엑저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호위받으며 안전하게 이동하는 동시에 계속 뒷말을 들어야 했던 내 심정이란!
물론 공작이 나에게 붙인 사람들은 굉장히 전문적이고 철두철미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내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흙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을 감시하며 뒷말까지 다 엿들었던 것뿐이다.
나라도 반대 입장이었으면 놀랄 것이었다.
내가 여차하면 아티팩트를 사용해 공녀의 대역이 될 사람이란 건 오직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
남들 눈엔 나는 시녀인데 공녀를 쏙 빼닮은 이상한 사람이다.
‘아예 남남인데 비슷하게 생긴 경우면 몰라.’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인데 닮은 경우면 누구라도 뒤에서 입을 놀리고 싶겠지.
그때 여행길 내내 나를 도와준 하녀가 보고했다.
“시녀님. 수속 절차가 끝났으니 바로 입성할 예정입니다.”
“고마워요.”
***
“여기가 공녀님의 접견실입니다. 기다리시면 공녀님이 호출하실 거예요.”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루시안이라는 시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시녀 루시안. 이 사람은 그저 도구로 쓰기 위해 데려온 나와는 달리 진짜배기 인재다.
명문가 이스텔베르 백작가의 차녀로 태어나, 내가 태어나자 공녀의 시녀로 낙점되었었지.
그래. 사실 루시안은 원래대로였다면 내 시녀였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쫓겨났고, 루시안의 시녀 자리도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하지만 일 년 전에 페리안이 돌아왔다.
귀족으로서 자라지 못한 페리안에게 상류사회의 예법과 규율을 익숙하게 만들어 줄 친구가 필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루시안이 가장 먼저 불려 와 페리안의 첫 번째 시녀가 되었다고 한다.
‘만약 내가 공작성에서 이상 없이 자랐다면, 어린 시절부터 친구처럼 자랐을 사람이겠네.’
물론 인생에 가정이란 건 의미 없지만.
그때, 루시안이 조용히 말을 덧붙이고 접견실을 나갔다.
“이 시간이면 공녀님과 레리온 공께서 함께 계실 겁니다. 레리온 공 앞에선 특히 행동을 주의하세요. 그럼 저는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문을 닫고 나가는 루시안의 뒷모습을 보며, 난 의문에 빠졌다.
‘레리온이라고?’
물론 여기 공작가 사람들 모두 다 달갑지 않은 인물들이지만, 그 남자는 그중에서도 더 보고 싶지 않은 상대다.
왜냐면 그 사람은 내 오빠였으니까.
공자, 공녀라는 단어엔 단순히 공작의 자식이란 의미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넓게는 귀족이나 높은 분의 자식이란 뜻도 되고, 좁게는 오등작 중 가장 높은 위치인 공작 가문의 직계 후손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일단 페리안 공녀는 공녀라고 불릴 수 있다. 현 엑저 공작 기준으론 동생이라지만, 선대 공작의 딸이니까. 적용 범위 안에 드는 셈이지.
그러나 페리안 공녀의 첫째, 둘째 오라버니들은 경우가 달랐다.
그 둘은 제국에서 직위를 임명받은 몸. 그렇기에 미성년에 직위 없던 시절 그대로 공자라고 부르면 격식상 맞지 않는 행동이다.
그래서 첫째는 레리온 공. 둘째는 페녹스 경.
셋째인 판데르니안 엑저는 공작님 또는 전하라 불러도, 공작의 형님인 두 남자는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 맞았다.
마지막으로 페리안 공녀는 공녀님.
그렇게 네 남매 호칭이 그렇게 각자 제멋대로인 셈이다. 뭐, 고위 귀족 중엔 안 그런 귀족 가문이 없지만서도…….
‘……잠깐? 왜 지금 이 시각에 레리온이 공녀 방에 있지?’
난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그냥 시계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고,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엄청나게 고풍스러운 회중시계가 접견실 중앙에 있었다.
레리온 공과 페리안 공녀가 첫째 오빠와 막냇동생 사이라지만, 여기가 어디 평민 집인가?
호칭 하나도 그렇게 격식과 예의를 먼저 따지는 대 명문가의 성인들이다.
개인 방에 그렇게 막 들락거리면 안 되지.
근데 조금 전, 시녀 루시안은 그렇게 말했다.
‘이 시간이면 공녀님과 레리온 공께서 함께 계실 겁니다.’라고.
“…….”
에잉.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잠깐 머릿속에서 온갖 해괴한 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난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자극적인 연극 좀 그만 봐야지.
***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루시안이 나를 접견실로 안내해 준 지 벌써 세 시간째.
나는 계속해서 부름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내가 명목상의 시녀라지만, 그렇다고 시녀가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될 자리는 아닌데.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외교 전략에서도 쓰이는 수지.’
간단하고 고전적이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상대를 초조하게 만들고, 그저 기다리기밖에 못 하며 휘둘리는 을의 처지란 걸 각인시키고.
유치해 보여도 효과는 좋은 수단이다. 어쩌면 유치하기 때문에 효과가 좋은 걸지도.
‘……근데 고작 시녀인 나를 견제할 이유는 없지 않나.’
내가 본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침투한 스파이란 걸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기선 제압이나 서열 정리를 하고 들어갈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그때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놓인 음성 교환 마도구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음기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방으로 오는 길 열어 줄게. 방에서 보자.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접견실 한쪽 구석에 그야말로 마법처럼 길이 열렸다.
소리 하나 없이 감쪽같이 길이 열린 그 광경은 감탄이 나올 만큼 멋있었지만, 반대로 내 머릿속엔 의문이 하나 더 생겼다.
‘왜 접견실을 놔두고, 방으로 직접 부르나.’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난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내 걸음은 문 앞에서 멈췄다.
통로 끝, 보석과 은으로 장식되어 고전적이지만 화려한 두 개의 문. 그러나 단지 비싸다고 끝이 아니다.
문에 음각된 복잡한 문양들. 이건 평범한 장식이 아니다. 색이 바래지 않는 마법 염료로 새겨진 문장들은 단어 하나하나가 거대 마법진 하나만 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수준은 지금의 기술로선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난 이렇게 호화로운 방이 무슨 방인지 알고 있었다.
‘대대로 공작 부인들이 써 오던 방이다.’
문이 열리자, 방의 화려한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마법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층고는 웬만한 호화 저택과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았고, 타운하우스를 통째로 옮겨 놓은 크기다.
그러나 감상할 때는 아니다. 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들렴.”
조근조근한 말투로 허락이 떨어지고, 나는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그제야 방 안의 풍경과 그 안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넓디넓은 방에 시녀나 시종이라곤 아무도 없다. 오로지 딱 두 명뿐.
그리고 그 둘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숨겨야 했다.
‘진짜 미친 것 같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페리안 공녀.
맑고 깨끗한 보랏빛 눈동자는 강아지 눈동자처럼 순해 보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처연하고 안쓰러운 인상을 준다.
밝은 연갈색으로 굽이굽이 물결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은 채 수건에 감싸여 있었다.
벽난로 옆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페리안 공녀의 모습은 천사의 화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순하고 깨끗해 보였다.
물론 내가 페리안 공녀가 편안해 보이는 게 싫어서 욕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두 명이었다. 날 안내해 준 시녀의 말이 맞았다.
가짜는 정말로 레리온과 같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 시선이 그의 머리로 향했다.
천년 명맥을 이어 온 혈통을 자랑하는 검은 머리카락.
현 공작도 가지지 못한 적통의 증거.
“…….”
무심한 눈길이 날 향했다.
가운만 입은 페리안 공녀 옆에서 완벽한 정장 차림으로 서 있는 남자.
매섭게 잘생긴 얼굴에,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훤칠하다.
남을 하찮은 것 보듯 훑는 시선이 그를 더 오만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첫째였다.
원래대로라면 공작위를 이어받았을, 엑저 공작가의 첫째 도련님.
와, 잠깐만. 생각해 보면 이거 감동의 남매 상봉 장면 아닌가? 그러나…….
‘못 알아본다는 것에 주먹 건다.’
그리고 난 나와의 내기에서 이겼다.
한때 내 첫째 오라버니였던 사내는 곧바로 내게 흥미를 잃었다.
날 평가하듯 훑어본 뒤, 더 볼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바로 시선을 떼는 걸 보면.
그러나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아비도 딸을 못 알아보는데 뭘 알아보겠냐.
오히려 웃으며 날 반기는 것은 페리안 공녀였다.
“안녕? 반가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난 페리안이야. 성국에서 왔다면서? 오느라 힘들었겠구나.”
‘음…….’
“너도 들었겠지만, 난 가문 바깥에서 자랐거든. 그래서 아직 귀족들의 예법에는 서툴러. 참, 이쪽은 우리 오라버니야. 날 정말 아껴 주신단다.”
“……그렇군요.”
‘정말 아끼는 것 같기는 한데…….’
아낀다고 다 좋은 게 아니지.
페리안 공녀는 방금 막 씻고 나온 상태였다.
긴 목욕 가운 아래로는 맨발이 보였고, 머리카락은 아직도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였으니 분명하다.
그리고 뭣보다, 레리온 엑저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려 주고 있었다.
‘어떤 근본 없는 집안이 다 큰 남매끼리 머리를 말려 주냐.’
그게 바로 내가 둘의 모습을 보고 미쳤느냐며 속으로 욕을 삼킨 이유였다.
하다못해 방 안에 시종이라도 있었으면 ‘좀 역겹네…….’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방 안에는 오직 둘뿐이었다. 단둘.
공녀의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야 정상이다. 목욕 한 번 하는데 열 명이 수발드는 일도 흔하다.
그리고 막 씻은 상태로 이성을 방 안에 들인다?
이건 남매 사이가 좋고 나쁘고 이전의 문제지.
원래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들을 모조리 물리고, 명목상 오라버니인 상대에게 목욕 후 시중까지 시킨다? 이건 흡사…….
‘유사 연애 아니냐.’
게다가 저 가짜 입장에선 꺼릴 이유도 없었다.
어쨌거나 저 첫째의 외관이나 배경은 매력적이다 못해 최상급이었고, 둘은 실제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성인 남녀니까.
그걸 가짜 공녀만 알고 있어서 문제지만.
그때 페리안이 내게 물었다.
“근데 너는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페리입니다, 공녀님.”
“……페리?”
가짜 공녀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귀엽게 기울어졌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그건 좀 이상하다!”
“네?”
“바꾸는 게 좋겠어. 내가 지어 줄게.”
페리안은 음음, 하고 고민하다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브라운. 브라운이 좋겠다.”
성격이 이상한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꽤 어마어마한 강적의 등장 같은 걸 기대했었다.
그 엑저 공작가의 눈을 속이고 일 년째 연기를 계속하는 대담한 사기꾼이니까!
막 고상하고, 품격 있고, 능력 있는 우아한 아가씨를 상상했었는데.
‘아니, 오히려 예상외라 더 당황스럽다…….’
숫제 무서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 이상한 가짜의 성격에 기함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난 내 이름을 ‘브라운’이라고 바꾸겠다는 페리안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 네. 브라운이라니……. 영광입니다.”
“그럼 이제 가 보렴. 일할 거 없어.”
“네?”
난 순간 이상한 착각에 빠졌다.
혹시 선공작과 그의 가짜 딸 사이에서 의사소통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시녀 겸 비상시 목숨이란 걸 말 안 하고 보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물론 일 안 하면 좋긴 하다. 엄청나게 좋지. 진짜 좋지. 그래도 말이지.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암담함을 느끼며 페리안에게 공손히 여쭸다.
“공녀님. 혹시 저에 대해 미리 들으신 이야기가 없으신지요.”
“아니, 나도 알아. 알지만 필요 없다는 거야.”
“…….”
“말해 봐. 내가 위험에 빠질 일이 그리 쉽게 생길까?”
“아니겠지요.”
“게다가 아무리 비상시래도, 한낱 평범한 민간인인 네가 애써 봤자 뭐 하겠어. 내 주변엔 너보다 뛰어난 기사님들이 가득한걸.”
뜻밖에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선공작이 그걸 몰라서 나를 붙였겠나.
그런데도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그 연극까지 해 가며 날 데려온 거다.
바로 널 위해서 말이지.
“아버님이 날 사랑하시는 건 알지만, 굳이 그런 마법적 도구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걱정 말렴. 아버님이 돌아오시면 내 독단적인 결정이었다고 따로 전해 드릴게.”
그 양반은 그럼 그냥 나를 쓱싹하려고 들 것 같은데?
상황 돌아가는 꼴에 당황하는 사이, 페리안 공녀는 계속해서 상냥한 웃음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이제 가 봐.”
***
닮은 것이 나가자 방 안엔 자연스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일부러 화젯거리를 꺼내면서 대화를 계속 이을 필요도 없다.
아무 말 없이 가만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경우가 있다.
페리안과 레리온 사이는 그만큼 자연스러운 관계였다.
페리안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흔들리는 채로 상념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