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91)
물론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변장을 위해 만들어 낸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리고 사실 난 페리안의 얼굴처럼 어린 사람으로 사는 게 더 어색하기도 하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판데르니안…….’
그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
-뿡쨕뿡쨕
그 한가운데, 빛을 쏘아 대는 미러볼이 음악에 맞춰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걸 보다가…….
‘어!’
번득 탑 안에서의 만남이 뇌리를 훅 스쳐 지나간 것이다!
마치 그림처럼 말이다.
‘판데르니안이 보는 앞에서 내가 죽은 적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찾은 기억이지만…….’
조명과 내 대머리가 동시에 번쩍번쩍거리던 그 지하.
그 강렬한 눈부심이 내 기억속 시각적인 무언가를 건드린 듯했다.
난 최대한 진지하게 대머리를 논점에서 걷어 내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
내가 몇 살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때의 난 사회화도 안 되어 있었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제대로 된 개념도 몰랐으니까.
나는 꽤 일찍부터 이능력을 다루며 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바깥을 구경하긴 했지만, 그 힘으로 탈출할 생각은 못 했다.
아마 짐승을 기르는 방법와 비슷할 것이다. 어린 짐승을 묶어 놓고 탈출하려 할 때마다 벌을 주면, 그 짐승은 몸이 다 자라 도망갈 여력이 생겨도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내 일상이라곤 항상 무언가에게서 도망가거나, 숨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흙사람을 내려 보내서 바깥 바람을 쐬거나, 간수들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밑을 서성거리고 구경하고…….
그러다 본 것이다.
머리도 반짝반짝, 눈도 반짝반짝.
항상 어두컴컴한 탑 안에 갇혀 똑같은 간수들만 보던 내가 처음으로 왕자님 같은 미소년을 본 것이다.
현재의 판데르니안은 흉흉한 흉근과 덩치, 남자다운 선까지 보유하며 그 반짝거리는 색감에도 불구하고 남자답다 못해 난폭해 보이지만…….
아무튼 그때의 내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왕자님 같으니까!
그래서 난 판데르니안에게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갔고…….
‘왕자님이야? 요?’
‘……아닙니다. 혹시 공녀님이십니까?’
‘빤짝거리는데?’
‘후우…….’
아마 판데르니안은…….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던 내 꼴이 말이 아닌 걸 보고 당황해했던 거겠지.’
그러나 그때의 내게 한숨 소리란건 그런 것이었다.
들으면 바로 도망쳐야 하는 신호.
그래! 그래서 나는 바로 도망갔던 것이다!
왕자님도 아니랬으니까.
‘그리고…… 다음이…….’
내 안에서 마치 사진이 인화되듯 기억 조각이 모여 시각적인 이미지로 되살아났다.
‘공녀님! 페리-!’
쥐어 터져 죽기 직전같이 생긴 애가 갑자기 도망갔으니 걔 딴에도 당황했던 것 같은데…….
나는 더 열심히 숨었고…….
그리고 순간 칼을 높이 치켜들어 단숨에 사람을 베어 버린 반짝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날?’
판데르니안이 나를 때렸나? 아니다.
‘맞아. 간수 중 하나가 날 차는 걸 보고, 걔가 화를 내고 다툼이 벌어지다가…….’
그리고 그 기억은 판데르니안을 미는 장면으로 끝났다.
내 작은 손이 판데르니안을 밀쳐서 뒤로 나동그라지게 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괴롭히려고 민 건 아니다. 큰 바위 같은 것이 우리를 납작하게 으깨기 위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깔아뭉개는 암석으로 시야가 가려지는 것과, 그때는 어렸던 놈이 절망하는 눈동자가…….
‘으악.’
난 정말 당혹스러웠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라면 판데르니안도 꽤 어린 나이인 게 분명하고.
그리고, 시기상 따져 보면…….
‘판데르니안이 공식적으로 입양했다고 밝혀진 것이 내가 탑에서 나오기 몇 년 전이니까…….’
그래. 판데르니안은 내가 죽은 걸 본 뒤 돌아가서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밝혀지면 본인도 끝이라고 생각하고…… 아니. 당시엔 입지 자체가 없었을 어린애가 찾아온 이유라 하면…….’
주변 압박으로 힘든 상황에서, 동경하는 마음으로 사랑받는 ‘페리안 공녀’를 보러 온 것 아니었을까.
‘으아아아악.’
내가 오늘 3차까지 놀고 있었던 것은 정말 논 것이 아니다.
지금 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검과 방패 모양의 아티팩트를 둘 다 흡수한 후 내 기운은 하루가 갈수록 엉망이 되고 있었다.
흙사람과 연결해도 계속 끊기고, 자꾸 부스러지고.
하는 수 없이 철거업자 조장으로 위장하여 탑에 직접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놈팽이 같잖아!’
그제야, 젊은 엑저 공작이 그때 가짜 페리안 공녀를 그렇게 혐오하고 미워하던 것이 이해가 됐다.
‘처음엔 착각하고 머리채까지 잡은 것도…….’
진짜가 그렇게 죽는 걸 눈으로 봤는데, 그걸 기만하고 놀리듯 페리안 공녀라고 자청하며 나타난 여자.
나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아니, 나 정말…… 파렴치한 같다.
내일부터는 새 사람이 되리라.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저번에 탑 내부에서 봤던 모습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견적을 내기 위해 카페에 모여 있었다.
38세 막내 제임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탑 내부 분위기는 그렇게 엄격한데, 거기서 멀어질수록 사람들 태도도 말이 아니네요.”
그렇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 않던가.
어린애가 죽은 장소를 부숴서 진실을 찾겠다는 부정 같은 것에 감화된 사람들이 모인 그런 상냥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모두 이걸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고 온 것이지.
지금의 나조차 탑 철거 사건으로 이득을 보기 위해 달려든 업자 역할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마침 옆 테이블에서도 우리랑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보다.
어떤 반반하게 생긴 놈이 낄낄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뒈진 게 확실하니까 찾는 척하는 거지. 살아 있으면 공작 부인이 남긴 유산을 배분해 줘야 하잖아?”
술에 잔뜩 취했는지 어물거리는 발음이었다.
“혹시 몰라. 저들이 탑에서 죽여 놓고 증거 인멸하려고 저러는 걸지도.”
“야, 야, 그만해. 입 걸레 같은 줄 알았더니만 죽은 애기 가지고…….”
“아니면 찾는 이유? 이부동생이랑 화끈하게……”
그놈은 내가 볼 때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먹던 빵을 집기 위해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위화감에 잠시 멈칫했다.
“……?”
시선을 내렸다 올린 그 찰나의 순간.
그놈의 뒤쪽에서부터 날카로운 무언가가 팔을 관통한 채 빼꼼 나와 있었다.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놈의 뒤쪽에서부터 날카로운 무언가가 팔을 관통한 채 빼꼼 나와 있었다.
날붙이의 끝이었다.
그래. 누가 뒤에서 찌른 거다.
이부남매끼리 서로 찾을 이유가 뭐겠냐는 헛소리를 지껄인 그놈은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막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놈의 상완골 부근에서 무언가 빠끔 고개를 내민 것이다.
순두부를 갈라도 그렇게 부드럽게 튀어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조용하고 순식간에 이루어졌는지, 카페 겸 술집 안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흰 셔츠의 슬리브에 붉은 물이 번지기 시작하자.
“으…… 으아, 으……!”
본인에게 벌어진 일이 현실이란 것을 자각한 것인지.
그제야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팔은 옴짝달싹도 못 한 채.
‘뭐야?’
물론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알려진 일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는 미친 놈은 단단히 혼나야 하는 것이 맞지만…….
‘얼마나 과감한 또라이어야 칼부터 나갈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정체불명의 남자를 쳐다본 나는 바로 얼어붙었다.
나뿐만 아니다. 다들 소리 하나 못 내고 경직했다.
“저…… 저…….”
그래. 누가 저 머리를 보고 몰라보랴.
별, 그리고 은하수를 제 머리에 담고 있는…….
그래. 입 경솔한 놈의 뼈를 갈라 버린 놈은 페녹스였다.
그 페녹스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찌른 거다.
‘그’ 페녹스가!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사이에선 이런 말이 있어. 술에 취해도 신사는 신사. 취해서 돌아다니시는데도 사고 한 번을 안 치신단 말이야.’
엑저 성에서 일할 때, 양조장의 톰 아저씨가 자주 말하던 그 소리.
‘취해도 신사는 신사라구요?’
나는 저 먼 곳에 있을 톰 아저씨에게 항변하고 싶었다.
아니에요, 완전 아니라구요!
닭다리 뼈 부수는 것보다 더 감흥 없이 찔렀어요!
‘이번엔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저 자식!’
페리안 공녀가 살았던 탑을 부순다는 것이 그렇게 충격적이고 망가질 일이었나?
그렇게 속으로 경악하면서 찔찔이의 얼굴을 쳐다본 참이었다.
난 훅 다가오는 낯선 이질감에 조금 당황했다.
페녹스는 단정했다. 그것도 무척.
그 누구도 저 꼴을 술 취한 상태라고 우길 순 없을 것이다.
물론 예전에도 깔끔하게 하고 있을 때가 있긴 했다.
내가 엑저 공작가에서 시녀 노릇 할 때, 가짜 페리안 공녀가 부르면 허겁지겁 깔끔하게 변신하고 가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단순히 깔끔하고 번듯한 것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이 누구 하나 찌르기 직전에 예리하게 빛나는 것 같다.
술 취했을 때의 흐트러진 차림새는커녕, 묘하게 인간미 없다고 느껴질 정도의 날카로운 깔끔함.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긴 너무한 비유지만…… 그래. 인간 같지 않았다.
지금 제 앞에서 한 명이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울고불고 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표정까지.
카페 겸 주점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거나하게 술 취해서 알딸딸해진 아저씨들조차 한순간 숨 막고 그저 페녹스를 경의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내게도 정말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지금 술 먹고 해롱해롱한 주변 아저씨들보다 내가 더 놀랐을 거다!
‘능력만 멀쩡했어도 이러진 않았을 텐데.’
나는 언제나 흙사람들과 감각 동기화를 유지하며 남들의 몇백 배는 되는 시야와 정보량으로 항상 우위에 있던 몸.
그러나 지금 흙사람을 마음껏 쓸 여유가 없다 보니, 오히려 남들보다 더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살면서 누구의 등장 같은 것으로 놀란 경험 자체가 없다 보니…….’
난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조차도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답답한 기분이 느껴졌다.
‘당연히 화날 소리긴 했지만.’
페녹스에게 ‘페리안 공녀’는 이미 내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놈의 안에서 그리움과 환상을 먹고 자란 하나의 개념 그 자체지.
그래서 페녹스가 페리안 공녀에게 얼마나 애절하게 구는데.
그렇기는 한데…….
아는 사람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
안 그래도 키도 훤칠한 놈이 등을 곧게 펴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내게로.
“?”
설마…… 나를 찌르려고!
“……안녕하십니까.”
아닌가 보다. 다행이었다.
나도 헐레벌떡 고개 숙여 인사했다.
칼이란 건 나 같은 최강 스파이도 순식간에 공손하게 만들 수 있는 예절 주입기인 법이다.
내가 고개를 들자 페녹스는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이 자리에 이놈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사실은 둘째치고…….
평소에 페녹스가 내 앞에서 허허실실 찔찔이처럼 굴 때 어떻게 웃는지, 봐 왔던 나는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입만 웃고 있는 페녹스가 자기소개를 했다.
“제가 페리안의 둘째 오빠입니다.”
“아, 예. 예. 페녹스 경 맞으시죠?”
“예. 중요한 일을 맡으신 분께 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따라왔습니다.”
“…….”
“잘 부탁드립니다. 아주 꼼꼼히 부탁드립니다.”
내 옆에서 불쌍할 정도로 굳어 있던 우리 폐기물 처리 업체 조원들도 그제야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이며 목숨 바쳐 깨끗하게 분류하고 성실히 청소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가만히 두면 페녹스 방의 먼지까지 처리해 주러 갈 기세다.
좋아! 이때다!
‘나 말고 얘네한테 옮겨 가라!’
그러나…….
페녹스의 눈동자는 또렷하게 나에게 고정된 채 입을 열었다.
“사장님과 둘이서 얘기하게 해 주시죠.”
이 미친놈은 내가 페리일 때나 대머리일 때나 징하게 집착하는구나.
***
사람들은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 말이 나오자마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드르륵 소리가 동시에 화음처럼 울려 퍼지는데 어찌나 어이없던지. 연습을 해도 그만큼은 못할 거다.
그리고…….
“혹여나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흔적이 있다면 바로 제게 오시길 바랍니다.”
카페 사장까지 내쫓은 놈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그것이었다.
‘무슨 소리지?’
물론 나도 흔적을 찾기 위해 폐기물 처리 업자 역할로 등장한 것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