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Family Is Not My Problem RAW novel - Chapter (93)
‘맞아.’
분명 훈훈한 이야기를 듣는 도중이었는데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다. 베개만 한 크기란 건 애초에 페녹스도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당사자인 나는 당연히 유아 시절이고.
그리고 일고여덟 살만 되어도 일 미터까지는 자라 있는 게 애들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베개 크기만 한 페리안은 어디든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틀린 것이다. 왜냐면 나는 죽을 당시 베개 크기도 아니었을…….
“…….”
아니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몇 살에 죽은 것인지.
정확히 표현하자면, 몇 살에 날 빼닮은 육신을 남길 수밖에 없었을지.
***
처음부터 가체를 만들고 그것에 정신을 옮길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 능력이 희한한 면모가 있다지만, 그렇게 쉽게 아기 때부터 쓸 수 있었을 리도 없었을뿐더러…….
분명 처음 들어갔을 적만 해도 제대로 된 사람 모양을 만들지 못해, 남들이 보기에 그저 괴물 같은 흙덩이를 움직이게 만들던 시절 아니던가.
‘이 탑에 오니까 기억이 더 자세히 되살아나는 것 같은데.’
외로워서, 추워서, 엄마와 오빠들을 잔뜩 만들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
그렇게 만든 갈색 덩어리가 아기의 미적 감각으로도 사람을 닮았다곤 할 수 없는 모양이라 실망하고, 혼자 글썽글썽하던.
“…….”
그렇게 옛날 생각이나 하던 와중이었다.
우리를 탑 밑의 휴게 공간으로 안내하던 헬릭 경이 드디어 멈춰 섰다.
문턱을 넘자 누구라 할 것 없이 다들 탄성을 질렀다. 드디어 그만 걸어도 된다는 기쁨으로만 비롯된 환호는 아니었다.
“우와!”
흔해 빠진 꾀죄죄한 탑의 모습이 갑자기 호화로운 시설로 변한 것이다.
몇백 년 전에 건축되었다 보니 지금 와서 보기엔 고풍스러운 면까지 보이는 대단한 곳이었다.
우리 모습을 본 헬릭 경이 설명을 시작했다.
아까 우리가 이런 식으로 헬릭 경을 따라가면서 검수했다간 평생이 걸려도 탑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이 마음 쓰였는지, 아까보다도 더 구체적인 설명이었다.
“이 층부터 아래로 다섯 층까지 옛 연구원들이 사용하던 공간입니다. 삼 층 아래엔 수영장이 있고…….”
그의 설명은 길게 이어지다, 이렇게 끝났다. 역시 아까 우리의 불만이 그의 양심을 찔렀나 보다.
“직접 검수할 시간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말에 우리 모두 속으로 환희하고…….
“형님. 제가 수영장 먼저 둘러보겠습니다.”
발 빠른 막내가 가장 신기하고 재밌을 곳을 먼저 채 가고, 뒤이어 너나 할 것 없이 헬릭 경이 말한 시설 중 탐나는 것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나도 사실 이 탑에 온 본연의 목적을 잊고 역사적인 탑을 현장 학습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
나는 슬픈 마음으로 헬릭 경을 상대하기로 했다. 뭐 좀 알아볼 것도 있었고.
팀원들이 내가 붙잡을까 봐 우르르 빠지고 난 뒤, 나는 곧장 헬릭 경에게 물었다.
“탑 지하인데 공기가 꽤나 깨끗하네요.”
이건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내 허를 찌르기에 충분했다.
아니,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최근에 레리온 공이 다녀가셔서 그렇습니다.”
“레리온 공이요?”
“동생분의 일이다 보니 자주 드나드시는 중입니다.”
헬릭 경은 그렇게 말한 뒤 아차 싶었는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아. 모르실 수밖에 없으시겠군요. 예기 이야기는 아시지요?”
예기라 하면 레서 공작가 직계들이 밤하늘 같은 머리를 타고남과 동시에 덤으로 가지게 되는 기운이 아니던가.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 능력에 비하면 머리색이 덤이고 예기야말로 진짜 축복에 가깝지만.
예기가 그렇게 매번 레서 공작가의 뛰어남을 증명하듯 항상 같이 언급이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재능 있는 검사들이 몇십 년은 수련해야 발현할 수 있는 특별한 기운.
그 기운엔 마법적 효과에 가까운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색도 예기도 가지지 못했으니 못 먹는 빵 보듯 딱히 좋아하지 않는 소재였지만, 이 역시 사람들의 로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예컨대, 나의 친어머니인 앨리스 님의 예기는 속도 제어와 관련이 있었다 한다.
옐베리를 구할 때 보여 줬다는 그 비현실적인 속도도 예기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그리고 레리온은…….’
마침 내 상념에 대꾸하기라도 하듯, 헬릭 경이 입을 열었다.
“레리온 경의 예기는 기체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예?”
“특별히 비밀인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언급하는 걸 꺼리는 분위기가 있지요. 아무래도 레서 공작가와 관련된 이야기다 보니 언론도, 호사가들도 알아서 겁먹고 말을 아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개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니다. 난 당연히 저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놀람을 넘어서서 소름 끼친 사실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어제 페녹스와 있었던 대화.
무슨 소리와 의심을 하는 건지 듣던 나도 어처구니가 없던…….
‘그 가스를 완전히 없앴다면?’
동생이 건물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며 던졌던 그 질문.
그때 내가 레리온의 능력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페녹스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찌르는 모습을 봐서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 전투와 관련된 능력이 아니라 평소엔 얕보고 있었기 때문도 있긴 한데…….
‘페녹스 이 미친놈.’
그러나 페녹스가 마음속에서 이미 결론 내린 그 정황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불가능하다.
이건 내 오빠가 그런 쓰레기일 리가 없다는 믿음 같은 것이 아니라, 진실에 기반한 부정이었다.
내가 파악하고 있는 레리온의 능력엔 지속적인 유지력이 없다.
헬릭 경의 말대로 레리온의 능력은 일반 시민들에게나 괜히 비밀 취급당하는 것이지, 평범한 귀족이기만 해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공공연한 능력이기도 하고.
그만큼 그의 능력에 대한 구체적인 한도까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모르는 그의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람 몸에서 부패 가스가 한두 번 나오고 끝인 것이 아니고, 사흘만 조절했다고 해서 가스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내가 버린 몸이 부패하면서 팽창하는 것?
그건 거의 어른이 되고 나서야 발휘할 수 있었던 고난이도 기술이었다.
그러니 애기 때 사용된 몸이 그럴 리가 없지.
‘물론, 레리온이 가스 따윈 생각 안 하고 묻었다면 또 몰라도…….’
그러나 그놈이 만약 내 시체를 건물에 은닉했다 하더라도 그 간단한 사실을 모르고 넣었으리라.
본인이 기체를 다루는 사람인 만큼 그쪽 방면에서는 도가 텄을 터. 그놈이 정말로 그랬다 하더라도 적어도 건물은 선택지가 아닐 수밖에 없단 뜻이었다.
그리고 그때.
불쌍하리만큼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헬릭 경이 괜히 멋쩍게 변명했다.
“알아도 신변에 해가 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예. 제가 보증할 테니…….”
아니, 아저씨. 그런 보증 할 때가 아니거든요?
“허허허…….”
그런데 뭘 잘못 짐작해도 한참 잘못 짐작하고 있는 듯한 헬릭 경은 ‘기사인 내가 자국민을 핍박하다니…….’라는 후회에 빠지기라도 한 듯, 정말로 괜찮다는 보증을 해 주겠다며 일어섰다.
“제가 보증인들을 데려오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저씨 어디 가요?
그러나 헬릭 경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정말 괜찮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그를 말리려는 순간, 번득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추리가 있었다.
헬릭 경은 정말로 내가 레리온 공의 비밀을 알아서 무서워할까 봐 이 중요한 탑 안내를 하다 말고 갈 사람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능력이 다 제한되어 있어서 모르겠지만…….’
아마 탑 입구에 중요한 사람이라도 온 거 아닐까.
생각해 보니 아까부터 헬릭 경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티 안 내려고 다녀올 방법을 찾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나니 그냥 헬릭 경을 보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탑의 휴게 시설 첫 번째 층엔 나 혼자 남았다.
“…….”
두리번두리번. 이곳저곳을 확인해 봐도 그 모든 곳이 낯설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갇혀 있던 곳인데도 정작 어린 시절의 나는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던 곳.
이상하게 감회가 새로웠다.
어쩌면 내가 이런 곳을 누리면서 자랄 수도 있었던 거구나.
수영장에서 놀기도 하면서.
“…….”
에라 모르겠다. 난 그냥 페녹스 그 찔찔이나 동정하기로 했다.
진짜 관건은 레리온이 나를 감췄느냐 아니느냐가 아니다.
페녹스가 상상하는 그 무시무시한 행위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렇게나 제 형을 따르던 놈이, 자신의 형이 소중한 동생을 밀매장했을 거라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몰렸다는 사실.
‘불쌍한 놈.’
이젠 형제싸움이라 할 수준이 아니게 되어 버렸지 않나.
그렇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순간이었다.
분명 나밖에 없어야 할 곳에서, 등 뒤에서 누군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듯한 오싹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리고 등 뒤를 돌아보려는 그때.
한 남자의 손이 내 목을 움켜쥐는 감촉을 느꼈다.
“……미안하지만…….”
귓가에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우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어 줘야겠습니다.”
레리온의 목소리였다.
나는 내 목을 움켜쥐는 그 생경한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왜 나한테 그래?
페녹스가 자기 형을 의심하는 것이 얼토당토않은 상상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던 방금의 나를 때려 주고 싶었다.
레리온에 대한 의심은 항상 옳다!
그렇게 내가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목이 졸려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벌어지는 이 난데없는 상황만큼이나 더 황당하고 급작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콰아앙!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아까 전 헬릭 경이 올라간 계단을 박차고 내려오는 사내가 있었다.
페녹스가 검을 빼 든 채 우리를 한 번에 통째로 썰어 버릴 기세로 달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발돋움 한 번에 마치 공간을 접기라도 한 듯 말도 안 되는 도약이었다.
그리고 페녹스의 번쩍이는 검날이 내 목을 향해 쇄도하자,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헉!”
-서걱.
다행히도, 페녹스가 잘라 버리려고 한 것은 내 목이 아니었다.
흉흉하게 빛나는 검신은 내 목을 움켜쥐고 있던 레리온의 손목을 그 주인에게서 분리시킬 속셈이었나 보다.
순식간에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레리온은 바로 물러섰지만 그의 소맷자락과 함께 살갗이 꽤 깊숙이 베인 듯했다.
골육상잔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잘했다, 페녹스! 아예 이 김에 네 형을 죽여라!’
내가 지금 변신해 있는 이 대머리 아저씨의 육신으로는 페녹스를 단 한 번 만났을 뿐인지라 대놓고 응원할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시녀였던 페리의 몸이었다면 나도 모르게 등도 두드려 줬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야.’
나는 페녹스가 정중하게 내 안위를 걱정해 주면 엉엉 울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해야 더 피해자처럼 보일지 준비했다.
그러나…….
페녹스의 시선은 내게 단 찰나의 순간만큼도 머물지 않았다.
“…….”
그렇다. 그의 안중에 제 형의 미친 짓에 휘말린 민간인 따위는 없었다.
‘기사 중의 기사는 어디 갔어.’
나는 슬쩍 페녹스를 바라봤다. 왠지 눈알에 광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그 돌아 버린 눈과는 다르게 의외로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형님.”
두 형제의 눈이 마주쳤다.
‘…….’
굉장히 진지한 상황인 것은 정말 틀림없는데, 이 불쌍한 아저씨를 안 챙겨 줄 거면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 나는 빼 주면 안 될까?
아니, 저번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았나.
너희는 왜 남을 가운데다 두고 형제 싸움을 하니?
그렇게 생각하며 레리온을 슬쩍 째려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만인이 보증하는 미치광이 레리온이니까 이번에도 돌아 있을 줄 알았는데.
레리온의 두 눈엔 물기가 서려 있고, 눈가도 울긋불긋하고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봐도 운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냥 눈물도 아니다. 저건…….
‘피?’
난 나도 모르게 내 손을 확인했다.
‘아저씨 손이 맞는데.’
혹시나 내가 미쳐서 원래 육신으로 돌아와 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레리온은 왜 생판 남인 아저씨의 목을 조르려 들기 전에 울었단 말인가?
……진짜 변태인가?
아니. 생판 남을 죽이려고 들면 죄책감 드는 게 당연하긴 하지만.
그렇게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내가 당황하는 사이.
페녹스가 여전히 살짝 미쳐 있는 듯한 눈으로 제 형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형님이. 페리를…….”
이쯤 되니 레리온의 반응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목을 조르려 한 괘씸한 놈을 쳐다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레리온의 두 눈에서 뚝, 그림처럼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내가 본 광경이 착각이 아닌 듯 피 섞인 눈물이었다. 사전적인 표현의 피눈물이 아니라, 진짜 새빨간 눈물이.
‘그새 눈알이 쥐어 터졌나?’
아니면 칼에 베인 건가?
황당한 내가 입을 벌리고 저쪽을 쳐다보는데, 페녹스가 다시 무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고한 척 변명 하나 안 하지.”
“…….”
“이젠 그런 생각도 들어. 이렇게 사람을 죽여서까지 입막음하려 드는 것을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