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Lady RAW novel - Chapter 3
2
새로운 헤이스팅스 공작은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다. 그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심지어 본 필자조차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4월 26일.
그 주 금요일, 다프네는 레이디 댄버리의 무도회장 끄트머리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겼을 것이다. 다프네 역시 다른 젊은 레이디들처럼 파티를 좋아했으니까. 몇 시간 전에 나이젤 버브룩이 이틀 전 큰오빠에게 다프네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말을 듣지만 않았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다시 청혼을 한 것이다. 물론 앤소니는 다시 한 번 거절했지만, 나이젤이 생각 외로 끈질기게 나올 것 같다는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2주 동안 두 번 청혼을 한 것만 봐도, 거절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남자인 것 같지 않았다.
무도회장 저편에서 그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프네는 몸을 움츠리며 방구석에 몸을 숨겼다.
도대체 저 불쌍한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나이젤의 집착에 종지부를 찍어줘야겠지만, 다프네는 겁쟁이처럼 그를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차라리 여자 휴게실로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걸음을 옮기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이봐, 다프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들어 보니 큰오빠가 다가오고 있었다.
“앤소니 오빠.”
오빠를 보아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일에 일일이 간섭해서 화가 치미는 것인지 그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오빠가 참석하실 줄은 몰랐어요.”
“어머니.”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아.”
다프네는 안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다 이해하니까.”
“어머니께서 적당한 신부감의 명단을 주셨어.”
그는 여동생에게 짜증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정말 어머님을 사랑해 마지않지, 안 그래?”
다프네는 쿡쿡 웃었다.
“그래요, 오빠. 정말 그렇지요.”
“잠시 정신이 나가신 게야. 그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는 설명이 되질 않아. 어머님은 네가 결혼 적령기가 되기 전까지는 지극히 정상적이셨다고.”
“나요?”
다프네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그래서 이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오빠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잖아요.”
“그래. 하지만 네가 나이가 차기 전엔 단 한번도 결혼 문제로 우리를 들볶지 않으셨잖니.”
다프네는 코웃음을 쳤다.
“오빠를 별로 딱하게 생각해 드리지 않아 죄송하군요. 나도 작년에 명단을 받았어요.”
“너도?”
“물론이죠. 최근에는 아예 일주일에 한 번씩 명단을 써주시겠다고 협박까지 하시는걸요? 결혼 문제라면 오빠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구요. 독신남은 멋지지만, 독신녀는 초라할 뿐이에요. 여태껏 모르셨다면, 참고로 전 여자랍니다.”
앤소니는 낮게 웃었다.
“난 네 오라비다. 그런 것을 알 턱이 있나.”
그는 곁눈질로 그녀를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가져왔어?”
“내 명단 말이에요? 무슨 말씀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그가 활짝 웃어 보였다.
“난 가져왔거든.”
다프네는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정말이야. 그저 어머니를 괴롭혀 드리려고. 난 말이지, 어머니 앞에서 그걸 펼치들고 외알 안경을 낀 다음……”
“오빠는 외알 안경이 없잖아요.”
그는 브리저튼 가의 남자들이라면 모두들 가지고 있는 나른하면서도 몹시도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쓰려고 하나 샀지.”
“진심은 아니시겠죠, 앤소니 오빠? 그랬다간 오빠를 죽이시고도 남을 걸요? 그리고 나서는 모든 책임을 내게 돌리실 거라구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나.”
다프네는 오빠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앤소니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꽤 매서운 펀치로구나.”
앤소니가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남자 형제가 넷이나 있는 여자애는 그런 걸 배우지 못하면 오래 살지 못한다구요.”
그녀는 팔짱을 꼈다.
“명단 한 번 봐요.”
“네가 날 때렸는데 내가 보여줄 것 같아?”
다프네는 갈색 눈동자를 굴린 뒤 고개를 젖히고 발을 까딱거렸다.
“아, 알았어.”
그는 상의 안에 손을 넣어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동생에게 건넸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다오. 너라면 할 말이 많을 거야.”
다프네는 종이를 펴고 어머니의 깔끔하고 우아한 필체를 들여다보았다. 브리저튼 자작 부인은 총 여덟 명의 이름을 써놓았다. 상당히 부유한 여덟 명의 미혼 여성의 이름.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예상했던 대로네.”
“내 예상처럼 그렇게 끔찍하냐?”
“더 심한데요. 필리파 페더링턴은 바보 천치라구요.”
“나머지는?”
다프네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무튼 올해에는 장가들 마음이 없는 거 아니에요?”
앤소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 명단은 어떻게 했는데?”
“너덜너덜해져서 버렸죠. 다섯 명 중 세 명이 지난 시즌에 결혼을 했어요. 어머니는 그들을 놓쳤다고 날 여전히 탓하시죠.”
남매는 똑같이 한숨을 내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바이올렛 브리저튼은 자식들을 모조리 결혼시켜 버리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장남인 앤소니와 장녀인 다프네는 그 압력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열 살 난 히아신스에게도 적당한 혼처가 나오기만 하면 선뜻 결혼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세상에, 두 사람 정말 처량해 보이는군. 이 구석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누군지 금세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목소리.
“베네딕트 오빠.”
다프네는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어머니께서 오빠마저 무도회에 가라고 윽박지르신 건 아니겠죠?”
베네딕트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아예 달래는 게 아니라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법을 택하시더군. 이번 주만 해도 세 번씩이나 앤소니 형님이 꾸물대면 나라도 다음 대의 자작을 생산해야 한다고 성화를 하시더라고.”
앤소니가 신음했다.
“형님이 무도회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죠? 어머니를 피하기 위해?”
“아냐.”
앤소니가 대답했다.
“다프가 구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 걸 보고……”
“살금살금 걸어가요?”
베네딕트가 짐짓 놀란 척을 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난 나이젤 버브룩을 피하려고 이쪽으로 온 거예요. 어머니는 레이디 저지와 함께 계시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 날 괴롭히시지는 못한다구요. 하지만 나이젤은……”
“그 녀석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원숭이에 가깝지.”
베네딕트가 말했다.
“그건 좀 심하네요.”
다프네가 말했다.
“어쨋거나 그 사람, 머리가 아주 좋은 건 아니죠. 그러니까 그 사람 감정을 상하게 하느니 피하는 게 낫다구요. 하지만 오빠 두 분께서도 절 찾으셨으니 그 사람 눈에 띄는 건 시간 문제겠네요.”
앤소니가 말했다.
“오, 그래?”
다프네는 두 오빠를 바라보았다.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키에 넓은 어깨, 녹아드는 갈색 눈. 다 수람 모두 그녀와 똑같은 밤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어딜 가든지 재잘거리고 킥킥대며 그들을 따라다니는 젊은 레이디들을 달고 다닌다.
그리고 나이젤 버브룩은 바로 그 재잘거리고 킥킥대는 여자들 뒤를 좇을 것이다.
벌써 사람들이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야망을 불태우는 어머니들은 딸들을 쿡 찔러 두 명의 브리저튼 형제를 가리켜 보였다. 게다가 두 사람 곁에는 여동생 외에 다른 경쟁자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여자 휴게실로 갔어야 하는 건데.”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손에 든 종이는 뭐야, 다프?”
베네딕트가 물었다.
그녀는 멍하니 베네딕트에게 앤소니의 신부감 명단을 건네주었다.
베네딕트가 껄껄 웃어대자 앤소니는 팔짱을 꼈다.
“너무 좋아하지 마. 너도 다음 주면 이 비슷한 명단을 받게 될 테니까.”
“의심할 나위가 없겠지.”
베네딕트가 말했다.
“참 이상하단 말야. 왜 콜린은……”
그의 눈이 반짝였다.
“콜린!”
또 다른 브리저튼 가의 남자가 다가왔다.
“아, 콜린 오빠!”
다프네는 콜린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오빠를 보게 되어 정말 기뻐.”
“우리는 이렇게까지 환영하지 않았지?”
앤소니가 베네딕트를 보며 말했다.
“오빠들이야 언제나 보잖아요. 콜린 오빠는 근 1년 동안 못 봤고.”
다프네는 콜린의 팔을 꼭 쥐더니 뒤로 물러서서 말했다.
“다음 주나 되어야 돌아올 줄 알았는데.”
입술의 한쪽 끝만 치켜드는 미소와 한쪽 어깨만 치켜올리는 몸짓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파리가 지겨워져서.”
“아.”
다프네가 눈을 반짝였다.
“그 말은 돈이 떨어졌다는 뜻?”
콜린은 웃음을 터뜨리며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치켜들었다.
“정답입니다.”
앤소니는 동생을 포옹한 뒤 투덜거렸다.
“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쁘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보낸 돈으로는 적어도……”
“그만.”
콜린이 장난스레 말했다. “꾸중은 내일 실컷 들어 드릴게요. 하지만 오늘밤은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랍니다.”
베네딕트가 코웃음을 쳤다.
“사랑하는 가족이라 부르는 걸 보니 정말로 돈이 다 떨어진 모양이군.”
그러면서도 그는 몸을 앞으로 구부려 동생을 따스하게 끌어안았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가족 중에서도 제일 장난스러운 콜린이 눈을 반짝였다.
“돌아와서 기뻐요. 비록 날씨는 유럽 대륙보다 좋지 않지만. 하긴 여자들도 시뇨리타들에 비하면……”
다프테가 그의 팔을 때렸다.
“이 자리에 숙녀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구.”
하지만 다프네는 전혀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형제 중에서는 콜린이 제일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다. 딱 18개월 먼저 태어났으니까. 어린 시절 두 사람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였고, 항상 둘이서 사고를 쳤다. 콜린은 타고난 장난꾸러기였으며, 다프네를 설득해 자신의 계획에 동참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프네가 물었다.
“돌아온 거 어머니도 아셔?”
콜린은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보니 텅 비었더라고. 그리고……”
“응. 어머니는 동생들을 일찍 재우셨어.”
“가만히 앉아서 모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긴 싫었어. 험볼트가 모두들 어디에 갔는지 말해 줬지.”
다프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와줘서 정말 기뻐.”
“도대체 어머니는 어디 계신 거야?”
콜린은 목을 빼고 두리번거렸다. 모든 브리저튼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키가 상당히 컸기에 사실 목을 길게 뺄 필요도 없었다.
“저쪽에 레이디 저지와 함께 계셔.”
다프네가 대답했다.
콜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래. 저 용에게 산채로 껍질을 벗기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용이라는 말을 하니, 저기 하나 오는군.”
베네딕트가 고개는 고정시킨 채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레이디 댄버리가 손에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프네는 초조하게 침을 삼킨 뒤 어깨를 곧추세웠다. 레이디 댄버리의 날카로운 혀는 사교계 전체에서도 전설적이었다. 다프네는 언제나 그분의 신랄함 뒤에는 부드러운 마음이 감추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이디 댄버리는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달아날 곳이 없군.”
다프네는 오빠 중 한 명이 신음하듯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프네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노부인에게 머뭇머뭇 미소를 보냈다.
레이디 댄버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브리저튼 남매들 앞에 멈춰선 뒤 우렁차게 외쳤다.
“날 못 본 척하지 말아라!”
그리고는 지팡이로 쿵 하고 바닥을 찍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다프네는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 베네딕트의 발가락을 밟아 버렸다.
“아야.”
베네딕트가 말했다.
오빠들이 갑자기 병아리가 된 듯하였기에, 다프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저희가 그런 인상을 드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이디 댄버리. 저희는 그저……”
“아가씨말고.”
레이디 댄버리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녀는 지팡이를 수평으로 치켜들어 콜린의 배 부위를 찌를 듯이 흔들어댔다.
“저 사람들 말이야.”
그 말에 웅얼거리는 인사말이 합창하듯 흘러나왔다.
레이디 댄버리는 남자들을 흘끗 바라본 뒤 다시 다프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버브룩이 아가씨를 찾아다니던데.”
다프네는 자신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이오?”
레이디 댄버리는 고개를 까딱했다.
“내가 아가씨였다면, 그런 인간은 싹트기 전에 뽑아 버릴 거야, 브리저튼 양.”
“혹시 제가 어디에 있는지 말씀하셨어요?”
레이디 댄버리가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난 진작부터 네가 맘에 들었지. 아니, 아가씨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네.”
“감사합니다.”
다프네가 진심으로 말했다.
“아가씨가 그런 머저리에게 묶인다면 그거야말로 커다란 손실이지. 사교계에는 아가씨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하거든.”
“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네들.”
레이디 댄버리가 지팡이를 다프네의 오빠들에게 흔들었다.
“자네들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를 내리지 않았어. 자네.”
그녀는 앤소니에게 지팡이 끝을 돌렸다.
“자네는 좀 마음에 들어. 버브룩의 청혼을 자네가 여동생 대신 거절했다는 말을 들어서 말일세. 하지만 나머지들은……으흠.”
그 말을 끝으로 레이디 댄버리는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으흠?”
베네딕트가 되풀이했다.
“으흠이라고? 그러니까 내 지성과 가치를 말 한 마디 “으흠”으로 요약하신다 이거야?”
다프네가 자랑스레 미소지었다.
“난 마음에 드신대요.”
“좋겠구나.”
베네딕트가 툴툴댔다.
“네게 버브룩에 대한 경고를 하시다니 정말 놀라운데.”
앤소니가 말했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자리를 피하라는 뜻이겠지요.”
그녀는 앤소니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만일 그 사람이 날 찾으면……”
“내가 알아서 하마. 걱정하지 마.”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오빠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그녀는 무도회장을 나섰다.
레이디 댄버리의 런던 저택 복도를 조용히 걸으며, 사이먼은 자신이 놀랍게도 기분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부터 사교계 무도회에 참석하여 앤소니 브리저튼이 경고했던 그 끔찍한 처지가 될 것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다.
오늘 이후로는 이런 모임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다소 위안이 되었다. 앤소니에게 말했듯, 그는 레이디 댄버리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이 무도회에 참석한 것이다. 심술궂기로 악명이 높지만, 그가 어릴 때 항상 잘해 주셨던 분이니까.
그는 지금 자신이 기분이 좋은 것은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 기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여행한 것은 즐거웠다. 그는 유럽 구석구석을 훑고 푸르른 지중해를 항해했으며, 북아프리카의 신비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아직은 집에 돌아갈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뒤,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 제도를 탐험했다. 그 이후에는 미국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끝없이 영국과 마찰을 빚고 있던 터라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바로 그때, 그는 몇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마침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상당히 역설적이다. 그 시간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6년 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남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 스물두 살의 사이먼이 영국을 떠났던 이유는 아버지가 갑작스레 아들을 인정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사이먼은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짐을 싸서 영국을 떠났다. 공작의 위선적인 애정을 받느니 조국을 떠나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것은 그가 옥스퍼드를 졸업할 무렵 시작되었다. 공작은 원래 아들의 학비를 대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이먼은 아버지가 이튼스쿨의 교사에게 멍텅구리 아들이 가문에 먹칠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쓴 편지를 본 적이 있었다. 사이먼은 고집스러움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차를 타고 이튼스쿨을 찾아간 뒤 교장실 문을 두드리고 스스로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평생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었지만, 어쨌거나 교장에게 착오는 학교의 탓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학교측이 그의 입학 지원서와 학비를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다며. 그는 아버지의 말버릇과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었다. 거만하게 눈썹을 치켜올리고, 턱을 치켜들고, 내리깐 눈으로 쳐다보며 마치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다. 행여나 말을 더듬기 시작할까 봐 두려웠다.
“난 클라이브던 백작이오. 이 학교에 다니기 위해 왔소”가 “난 클라이브던 백작이오. 이 하, 하, 학교”로 나올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평생을 영국 귀족 교육에 몸바쳤던 교장은 사이먼이 바셋 가의 자제라는 것을 금세 깨닫고 군소리 없이 서둘러 그를 입학시켰다. 아들이 이튼스쿨에 입학했다는 것을 공작이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였다. 공작은 언제나 자기 일로 바빴으니까. 하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학교에 잘 적응해 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아들을 학교에서 빼내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공작은 이상하게 보이기를 원치 않았다.
사이먼은 종종 왜 아버지가 그때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이튼스쿨을 다닐 당시만 해도 말을 더듬는 버릇은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아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당장에 교장 선생한테서 소식을 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때만 해도 가끔 말이 헛나오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를 기침으로, 만일 운 좋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면 우유나 홍차를 마심으로써 감추는 데 놀랍도록 익숙해졌다.
그러나 공작은 단 한 번도 사이먼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무시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아들이 바셋 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건 말건 아무런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고 사이먼은 생각했다.
이튼스쿨을 졸업한 뒤 사이먼은 다들 그렇게 하듯 옥스퍼드에 입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수재와 반항아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대학에 다니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굳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초연하고 차가운 태도가 모두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던 모양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들은 점점 사이먼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지적이었으며 운동에도 능했지만, 그 어떤 것보다 그의 태도가 그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짓는 것 같았다. 말을 할 필요가 없으면 말을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사이먼을 오만하다고 여겼다. 미래의 공작이라면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있어서 정말 편한 사람 외에는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친구를 고를 때 몹시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공작이라면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말을 할 때면 짧고 재치 있게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다른 사교계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말은 끝없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기에 모두들 더더욱 그의 말에 신경을 썼다.
그는 놀랄 만큼 자신만만했으며, 가슴이 뛸 만큼 잘생겼고, 영국 신사의 완벽한 표본이라 불렸다. 남자들은 모슨 일이든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여자들은 그의 발 아래 쓰러졌다.
사이먼 자신조차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런 상황을 즐겼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졌으며, 친구들과 방탕한 생활을 즐겼고, 그의 주의를 끌려고 노력하는 모든 젊은 미망인과 오페라 가수들과 어울렸다. 아버지가 들으면 못마땅해할 것이 뻔했으므로 더욱 재미있었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사이먼은 몰랐지만 헤이스팅스 공작은 이미 외아들의 행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사이먼의 대학 성적표를 보았고, 심부름꾼을 고용해 사이먼의 학교 밖 생활을 관찰했다. 결국 공작은 아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심경이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어느 날, 공작은 아들이 꽤 잘난 녀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작은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그러하듯,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인간이 잘못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셋 가의 혈통에서 바보가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고 말이다.
수학 과목에서 전체 수석으로 옥스퍼드를 졸업한 뒤, 사이먼은 친구들과 함께 런던으로 왔다. 아버지와 살 의향은 전혀 없었기에 따로 집을 구했다. 사이먼이 사교계에 진출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거만할 정도로 의미심장하게 말을 끊는 버릇과 몇몇 친구들과만 어울리는 이유를 착각하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그 당시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던 리더 보 브룸멜이 당시 유행하던 패션에 대해 사소한 질문을 했을 때 확고해졌다. 브룸멜은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로 젊은 백작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모든 런던 사람들이 알다시피, 브룸멜은 영국 귀족들을 바보로 만드는 게 취미였다. 마치 사이먼의 의견이 꼭 듣고 싶다는 듯 그는 질문을 하며 느릿하게 덧붙였다.
“백작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브룸멜이 던진 미끼에 집중되었고, 황태자와 크러벳(넥타이의 일종)이 어떻게 되었건 관심도 없는 사이먼은 브룸멜에게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돌리고 대답했다.
“네.”
설명도 없고 다른 말도 덧붙이지 않고 그저 “네”라고만 말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날 오후, 사이먼은 사교계의 황제가 되어 있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우스운 일이었다. 사이먼은 브룸멜이나 그의 말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말을 더듬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들 그를 꾸짖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간결함이 더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기나긴 연설보다 짧은 말 한 마디가 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머리가 좋고 보는 사람을 괴롭게 할 정도로 잘생긴 헤이스팅스의 후계자에 대한 소문이 당연히 공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당장 사이먼을 불러들이지는 않았지만, 사이먼은 곧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조금씩 듣게 되었다. 브룸멜 사건을 듣고 공작은 웃음을 터뜨린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 애는 바셋의 피를 타고났으니까.”
누군가는 사이먼이 옥스퍼드에서 수석을 한 것을 공작이 자랑하더라는 얘기를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런던 무도회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공작은 사이먼이 자신을 모르는 척하게 내러벼두지 않았다.
사이먼은 노력했다. 아,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던가. 하지만 그 누구도 아버지처럼 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사이먼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나이 차를 제외하면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닮은 두 사람. 사이먼은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혀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입안의 느낌이 이상했다. 온몸으로 기묘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당황스러웠다.
공작은 사이먼이 얼어붙은 틈을 타 그를 끌어안고 따뜻하게 말했다.
“아들아.”
사이먼은 그 다음날 영국을 떠났다.
영국에 머문다면 아버지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아버지 없이 자랐는데, 이제 와서 그의 아들인 양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안 그래도 런던의 삶이 슬슬 지겨워지려던 참이었다. 비록 사교계의 반항아로 명성을 날리고 있기는 했지만, 사이먼은 진정한 난봉꾼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런던의 밤을 즐기기는 했지만, 옥스퍼드에서 3년, 런던에서 1년, 끝없는 파티와 매춘부들의 행렬이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와서 기뻤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6년 동안 혼자 여행을 한 뒤라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도 퍽 기뻤다.
그는 조용히 복도를 걸어 무도회장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도착한 것을 떠들썩하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앤소니 브리저튼과 대화를 나눈 뒤, 그는 런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더욱 굳혔다.
결혼할 계획도 없었다. 영원히. 아내를 찾는 게 아니라면 사교계 파티에 참석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디 댄버리에게는 그분이 어린 시절에 베풀어 준 친절함 때문에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게다가 사실 그는 직선적인 레이디에게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일 것이다. 초대장에 친필로 귀국을 환영한다고까지 하셨지 않은가.
저택의 구조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옆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운만 좋으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도회장으로 들어가 레이디 댄버리께 안부를 전한 뒤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모퉁이를 도는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이먼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눌렀다. 연인들의 밀회를 방해한 모양이었다. 제기랄.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만일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들키면 보나마나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구석에 숨어서 연인들이 갈 길을 가게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사이먼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데 뭔가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싫어요.”
싫다고? 어떤 젊은 레이디가 아무도 없는 복도로 억지로 떠밀린 걸까? 영웅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을 그냥 모른 체 지나갈 수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빼고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누군가를 구출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머리가 빈 바보처럼 무작정 밀고 들어갈 필요도 없다.
“나이젤.”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지 마셨어야 해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남자가 열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당신과 결혼하는 것뿐이에요.”
사이먼은 신음을 뱉을 뻔했다. 바보 같은 녀석. 듣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나이젤.”
여인이 다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침착하고 다정했다.
“제 오라버니께서 제가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는 말씀을 이미 하셨잖아요. 저는 우리가 친구로 남아 있었으면 해요.”
“하지만 당신 오라버니는 이해하시지 못해요!”
“아니오. 이해하고 계세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두십시오! 당신이 아니면 누가 나와 결혼해 주겠습니까?”
사이먼은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청혼하는 것치고 이렇게 로맨틱하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다.
여자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글쎄요.”
그녀가 조금 짜증이 난 듯 말했다.
“지금 레이디 댄버리의 무도회장에도 다른 레이디들이 꽤 있답니다. 적어도 그 중 한 사람은 당신이 청혼하면 몹시 기뻐할 거예요.”
사이먼은 좀더 자세히 보려고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여인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똑똑히 보였다. 남자는 처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가 비참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모르시겠어요? 그들은……그들은……”
남자가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 애쓰자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격한 감정과는 달리 그리 심하게 더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문장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처럼 친절하지 않아요.”
남자가 마침내 말했다.
“내게 미소를 지어 준 건 당신뿐이에요.”
“오, 나이젤.”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닐 거예요.”
하지만 사이먼은 여인이 그저 친절하게 말하려는 것뿐임을 알고 있었다. 여인이 다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며, 그는 자신이 끼여들 필요는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인은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었고, 사이먼은 가련한 나이젤이란 사람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남을 훔쳐보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서재로 향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서재 반대편에 또 다른 문이 있고, 그 문은 온실로 연결된다. 그곳에서 메인홀로 들어가 무도회장까지 갈 수 있다. 두 남녀가 막고 서 있는 복도보다는 사람들의 눈에 띌 위험이 크지만, 적어도 불쌍한 나이젤은 비참한 모습을 남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막 서재로 들어가려는 참에 여인의 비명을 들었다. 나이젤이 외쳤다.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해요! 반드시! 난 절대 다른 사람을 찾지……”
“나이젤, 그만하세요!”
사이먼은 신음을 뱉으며 돌아섰다. 결국 그 여자를 구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같았다. 그는 복도를 뛰어가며 가장 근엄하고 공작다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께서 그만하라고 하셨잖소”란 말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불행히도 오늘밤에는 영웅 노릇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젊은 레이디가 오른팔을 뒤로 뻗었다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펀치를 나이젤의 턱에 꽂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이젤은 팔을 허공에 퍼덕거리며 무릎을 꺾고 쓰러지고 말았다. 사이먼은 가만히 서서 여인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놀란 표정으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오, 이런.”
그녀가 약간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젤, 괜찮아요? 그렇게 세게 때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사이먼은 웃음을 터뜨렸다. 참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사이먼은 숨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는 그림자에 가려서 숱 많은 밤색 머리밖에 볼 수 없었다. 이제 그녀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니, 그녀가 머리카락과 같은 갈색 눈에 무척이나 탐스러운 입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하트형 얼굴은 사교계 기준으로 보아 썩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뭔가가 그의 숨을 앗아갔다.
짙지만 섬세한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그를 본 것이 전혀 기쁘지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누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