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s Lady RAW novel - Chapter 9
8
본 필자의 귀에 브리저튼 가족 전부(게다가 공작을 포함해서!)가 토요일에 그리니치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공작과 브리저튼 가의 한 사람이 흠뻑 젖은 채 런던으로 돌아왔다는 소문도 입수했다.
레이디 휘슬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3년 5월 3일.
“다시 한 번만 더 사과를 하면 당신을 죽여 버릴지도 모르오.”
사이먼은 손을 깍지끼고 머리 뒤에 대며 말했다.
다프네는 어머니가 빌린 조그만 요트 갑판 의자에 앉아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온 가족이 요트를 타고 그리니치로 가는 중이었다.
“어머님이 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법을 쓰신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린 것이 거북하시다면 죄송하군요. 원래 우리 계획은 공작님을 딸과 결혼시키려고 눈이 벌건 어머니들에게서 보호하자는 게 아니었던가요?”
사이먼은 손사레를 치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내가 즐겁지 않을 때만 문제가 되는 거요, 그런 건.”
다프네는 놀라서 턱을 약간 치켜들었다.
“오.”
그녀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어리석은 반응이었다.
“그럼 잘된 일이군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난 요트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한다오. 비록 그리니치까지밖에 가지 않는다 해도 말이오. 게다가 바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뒤라 그리니치 자오선 위에 있는 왕실 천문대를 방문하는 것도 흥미롭게 느껴지고.”
그는 고개를 젖히고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항해와 경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몰라요. 사실은 그리니치에 있다는 자오선이 뭔지도 모르는걸요?”
“모든 경도를 나누기 시작하는 점이오. 예전에 항해사들과 선원들은 출발점에서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떨어져 있나를 재어 왔지만, 지난 세기에 왕실 천문원에서 그리니치를 시작점으로 잡기로 결정을 내렸지.”
다프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것은 좀 자기중심적인 결정 같은데요, 안 그래요? 우리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다니 말이죠.”
“사실 공해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준점이 하나인 쪽이 훨씬 더 편리하다오.”
그녀는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로 그리니치를 그 기준으로 삼는 데 동의했다는 건가요? 믿기 어려운걸요. 프랑스 사람들은 반드시 파리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테고, 교황님은 분명히 로마가 기준점이 되길 원하셨을 테고……”
“정확하게 말하면 동의를 한 것은 아니었지.”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공식적인 조약 같은 건 없다오, 당신이 알고 싶은 게 그거라면 말이오. 하지만 왕실 천문원은 해마다 완벽한 해도와 일람표를 모아 간행하지. 항해 연감이라고 부르는 건데, 항해 연감 하나 없이 바다를 항해하겠다는 선원은 미친 사람이지. 항해 연감이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경도를 나누었기 때문에……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거라오.”
“이런 일에 대해 상당히 해박하시군요.”
그는 어깻짓을 했다.
“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 그런 것들을 배우게 되지.”
“적어도 브리저튼 가의 어린이방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이로군요.”
그녀는 왠지 스스로를 조롱하듯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제 지식의 대부분은 제 가정교사가 알던 것뿐이니까요.”
“딱하군.”
그가 중얼거린 뒤 물었다.
“대부분이라 함은?”
“뭔가 흥미로운 게 생기면 서재에서 그에 관련된 책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기하학이나 수학 분야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 것 같은데.”
다프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님처럼 말이에요? 불행히도 아니에요. 어머님은 제가 덧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감지덕지하시는데요.”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알아요, 알아요.”
그녀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공작님처럼 수학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숫자를 딱 보고 답을 맞추지 못하는, 아니면 답을 얻는 방법조차 모르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죠. 콜린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일 좋아하던 분야는 뭐였소?”
“음. 아, 역사와 문학이오. 다행이지 뭐예요, 그런 책들은 서재에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그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역사에는 한 번도 큰 흥미를 느껴 본 적이 없소.”
“그래요? 왜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사이먼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가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공작 작위와 그에 관련된 모든 전통에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작위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물론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소. 그냥 별로 좋아지지가 않았기 때문이겠지.”
두 사람은 잠시 편안한 침묵을 지켰다. 부드러운 강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다프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다시 사과하지는 않을게요. 공작님 손에 죽기엔 전 제 삶을 무척이나 사랑하니까. 어찌되었건 제 어머님의 계략에 빠져 여기까지 함께 오게 되어 비참하지 않으시다니 기뻐요.”
그는 약간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일 함께 오고 싶지 않았다면 당신 어머님께서 무어라 말씀을 하셨든 오지 않았을 거요.”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친구 아내들의 초청을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의가 발라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저한테 구애하는 척하는 분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군요.”
그는 짜증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이라니, 무슨 뜻이오?”
“글쎄요, 전……”
다프네는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그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만둬요.”
그는 퉁명스럽게 말한 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프네는 미소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배 난간의 한 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이먼은 툴툴댈 때가 제일 귀엽다.
“뭘 보고 있는 거요?”
그녀는 입술에 경련을 일으켰다.
“아무것도요.”
“그럼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는 거요?”
그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미소짓고 있지 않은데요.”
“그게 미소를 짓는 게 아니라면, 발작을 일으키거나 재채기를 하기 일보직전인 것 같군.”
“둘 다 아니에요.”
그녀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저 기막히게 좋은 날씨를 만끽하고 있는 것뿐이죠.”
사이먼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함께 있는 상대도 나쁘지 않고?”
그가 넌지시 말했다.
다프네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갑판 반대편 난간에 기대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앤소니를 바라보았다.
“함께 있는 상대 모두를 말하는 건가요?”
“만일 당신의 호전적인 오빠를 뜻하는 거라면, 난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재미있소.”
다프네는 미소를 억누르려 애썼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별로 상냥한 말이 아니군요.”
“내가 상냥하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소. 게다가 좀 보라고……”
사이먼은 고개로 앤소니 쪽을 가리켜 보았다. 앤소니의 얼굴은 아까보다도 훨씬 더 찌푸려져 있었다.
“우리가 자기 얘길 하는 줄 아는 모양이오. 그래서 더욱 괴로운 게지.”
“난 두 사람이 친구인 줄 알았는데요.”
“우린 친구요. 원래 친구들은 서로에게 그렇게 대하는 법이지.”
“남자들이란 정말 모두 미친 것 같아.”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그도 동의했다. 그녀는 눈을 굴렸다.
“우정의 첫째 규칙은 친구의 여동생을 집적거리면 안 된다는 것인 줄 알았는데요.”
“아, 하지만 우린 희롱하는 게 아니잖소. 그저 희롱하는 척하는 것뿐.”
다프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앤소니를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오빠는 괴로운가 봐요. 진실을 이야기했는데도.”
“알고 있소.”
사이먼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것 아니겠소?”
그 순간 바이올렛이 갑판 저편에서 다가왔다.
“얘들아! 얘들아! 아, 실례했어요, 각하.”
그녀는 그를 쓱 보며 덧붙였다.
“공작 각하를 제 자식들과 뭉뚱그려 부르다니, 제 실수군요.”
사이먼은 그저 웃으며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선장님이 거의 다 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바이올렛이 설명했다.
“이제 짐을 챙겨야겠어요.”
사이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프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프네는 그 손을 선뜻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리가 아직 뱃길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바다도 아니고 고작 강일 뿐인데.”
그가 중얼댔다.
“야만인. 제게 우아함과 균형 감각이 모자란다는 점은 지적하시면 안 되는 거라고요.”
다프네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그에게 돌렸다. 순간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기에, 사이먼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햇빛 아래 머리카락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답답한 무도회장을 떠나 신선한 공기가 몸을 감싸는 강 위에서, 그녀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사이먼은 바보처럼 그저 웃고만 싶었다.
만일 배가 선창에 닿지만 않았던들, 그녀의 가족들이 두 사람 주위를 부산스레 왔다갔다하지만 않았던들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을 것이다. 그녀와 희롱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절대 그녀와 결혼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의 몸은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거칠게 잡아당겨서 중심을 잃을 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건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앤소니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았기에, 약간은 거칠게 사이먼과 다프네 사이로 끼여들어 동생의 팔을 세게 낚아채 버렸다.
“내가 네 큰 오라비니만큼, 널 배에서 에스코트하는 것은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
사이먼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앤소니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자신이 순간적으로 자제력을 잃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고 화가 나서 뭐라 반박을 할 기운도 없었다.
배는 선창 옆에 멈춰 섰고, 배다리(강둑과 배를 연결하는 나무 판자)가 놓여졌다. 사이먼은 브리저튼 가족들이 내리는 것을 지켜본 뒤, 맨 마지막에 그 뒤를 따라 템즈 강변의 잔디밭 위로 내려갔다.
언덕 꼭대기에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왕실 천문대가 보였다. 탑의 꼭대기는 회색 돔형이었다. 다프네의 말대로 사이먼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구 곳곳을 꽤나 헤매고 다닌지라 그는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여기서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두 다 있니?”
자작 부인이 외쳤다.
“다들 가만히 있거라. 모두 다 왔는지 세어 보자꾸나.”
그녀는 머리 수를 세어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열 명! 모두 다 왔구나.”
“나이순으로 줄을 세우시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노릇이지요.”
사이먼이 왼쪽을 바라보니 콜린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이와 키가 비례할 때까지만 해도 어머님께서는 우리를 나이순으로 줄을 세우셨지요. 그러다가 베네딕트 형님이 앤소니 형님보다 몇 센티미터가 더 커져 버렸고, 그레고리가 프란체스카를 앞질러 버렸고……”
콜린은 어깻짓을 했다.
“어머님도 포기해 버리셨죠.”
사이먼은 브리저튼 가 사람들을 쓱 훑어본 뒤 한쪽 어깨를 치켜올렸다.
“그저 내가 어디쯤 서야 하는 건지 둘러본 걸세.”
“굳이 짐작을 해보자면 앤소니 형님 근처가 아닐까 싶어요.”
콜린이 대답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콜린은 호기심과 재미가 반반씩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앤소니!”
바이올렛이 외쳤다.
“앤소니는 어디 간 거지?”
앤소니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끙 소리를 내며 자신의 위치를 표시했다.
“아, 거기 있었구나, 앤소니. 와서 날 에스코트하거라.”
앤소니는 마지못해 다프네의 팔을 놓고 어머니 곁으로 걸어갔다.
“정말이지 우리 어머니는 부끄러운 줄을 모르신다니까요?”
콜린이 속삭였다.
사이먼은 아무 소리 안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자, 어머님을 실망시키면 안 되죠. 어머님이 그토록이나 노력을 하셨는데, 공작님께선 적어도 다프네의 팔을 잡으셔야겠죠.”
사이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네도 자네 어머님만큼이나 나쁘군.”
콜린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안 그런 척하지는 않는다구요.”
다프네는 그 순간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제 에스코트가 없군요.”
“그럴 줄 알았지.”
콜린이 말했다.
“자, 두 분께서 절 좀 양해해 주십시오. 저는 가서 히아신스나 찾아보렵니다. 만일 엘로이즈를 에스코트해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런던까지 다시 수영해서 가는 게 낫지요. 열네 살이 된 이후로는 걷잡을 수 없이 말괄량이가 되어 버렸다니까요.”
사이먼은 눈을 깜박였다.
“유럽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줄로 아는데?”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엘로이즈의 열네 번째 생일은 1년 반 전의 얘기라고요.”
콜린은 눈을 굴린 뒤 형제들에게 다가가며 히아신스의 이름을 불렀다.
다프네는 사이먼이 팔을 내밀자 그의 팔꿈치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직도 겁먹고 도망가고 싶지 않으세요?”
“뭐라고 했소?”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브리저튼 가족 소풍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없지요.”
“아, 그것 말이군.”
사이먼은 진흙이 어쨌네 복수가 어쨌네 소리를 지르며 히아신스의 뒤를 쫓아가는 그레고리를 피하기 위해 얼른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뭐랄까, 아, 새로운 경험이오.”
“매우 예의바르게 말씀하시는군요, 각하. 정말 감동적이에요.”
“그렇소?”
이번에는 히아신스가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며 런던의 모든 개들을 깨울 만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내겐 형제가 없으니까.”
다프네는 꿈결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가 없으시다구요. 그 말이 천국의 음악소리처럼 들리네요.”
그녀는 그 후로도 몇 초 동안 아련한 눈빛을 짓다가 몸을 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가 두 사람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다프네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나가며 소년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꾸짖었다.
“그레고리 브리저튼! 사람들 사이를 마구 헤치고 다니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잖니? 그러다가 누군가 다칠라.”
“어떻게 한 거요?”
사이먼이 물었다.
“뭐 말인가요? 그레고리를 잡은 것 말인가요?”
“그렇소.”
그녀는 어깻짓을 했다.
“다년 간의 훈련 덕분이죠.”
“다프네 누나!”
그레고리가 칭얼거렸다.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녀는 팔을 놓아 주었다.
“자, 이제 좀 천천히 다니렴.”
소년은 뒤로 성큼성큼 물러나더니 다시 뛰기 시작했다.
“히아신스는 혼나지 않는 거요?”
사이먼이 물었다.
다프네는 어깨로 저쪽을 가리켰다.
“히아신스는 어머님이 잡으신 것 같군요.”
사이먼은 바이올렛이 자못 격렬하게 히아신스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다시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그레고리가 나타나기 전에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지?”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요.”
“형제가 없는 삶을 떠올리는 것 같던데.”
“아, 그랬죠.”
식구들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며 그녀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가끔씩은 끝없는 고독이라는 개념이 참 유혹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래도 가족이 없으면 꽤 외로울 것 같아요.”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역시 아이를 딱 한 명만 낳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 문제는 인간의 권한 밖일 때가 많지.”
사이먼이 건조하게 말했다.
다프네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오, 죄송해요.”
그녀는 발까지 헛디뎠다.
“잊고 있었어요. 공작님의 어머님께선……”
사이먼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깻짓을 했다.
“난 어머님을 모르오. 그래서 슬프지도 않소.”
그의 푸른 눈동자가 기묘하게 공허하고 폐쇄되어 보였다. 다프네는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말을 100퍼센트 믿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프네는 의아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토록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가 어쩔 수 없이 뒤로 살짝 젖혀졌다. 바람에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고, 검은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불편해하지 않는 듯했다. 그가 마침내 끙 소리를 냈다.
“어느새 뒤쳐졌구만.”
언덕을 올라가며, 다프네는 자신의 가족이나 천문대, 혹은 경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왜 자신이 공작에게 팔을 두르고 절대로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충동을 느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몇 시간 뒤, 모두들 템즈 강둑으로 돌아와 브리저튼 가의 요리사가 준비해 준 맛있는 점심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사이먼은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시끌벅적한 다프네 가족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하지만 히아신스는 다른 생각이 있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각하.”
그녀는 하인이 깔아준 모포 위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천문대를 즐겁게 둘러보셨나요?”
사이먼은 대답을 하면서도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즐거웠습니다, 히아신스 양. 당신은?”
“아, 무척이나 즐거웠지요. 특히 경도와 위도에 대한 공작님의 강의, 인상 깊었습니다.”
“그 정도를 강의라고 부르기는 힘들겠지요.”
사이먼이 말했다. 왠지 진부한 듯한 말투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모포 저편에서 다프네가 그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히아신스는 그 순간 유혹적으로 – 유혹적이라고? –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니치에 매우 로맨틱한 사연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신지요?”
다프네는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배신자 같으니.
“그렇습니까?”
사이먼이 간신히 말했다.
“그렇답니다.”
히아신스가 어찌나 세련된 목소리로 말을 하는지, 사이먼은 이 소녀의 몸 속에 나이 지긋한 부인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월터 롤리 경이 엘리자베스 여왕께서 신발에 진흙을 묻히지 않도록 자신의 망토를 바닥에 까신 곳이 이곳이랍니다.”
“그렇습니까?”
사이먼은 일어서서 주위를 훑어보았다.
“각하!”
히아신스는 다시 열 살 먹은 아이의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뭘 하시는 거죠?”
“주위를 둘러보는 겁니다.”
사이먼이 대답했다. 그는 남몰래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웃음기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말은 뭘 찾고 계시냐는 거예요.”
히아신스가 말했다.
“진흙탕을 찾고 있습니다.”
“진흙탕이라고요?”
그의 말을 깨닫고 히아신스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진흙탕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제가 레이디의 신발에 흙이 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망토를 벗어야 한다면, 히아신스 양, 미리 어디서 벗어야 할지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망토를 입고 계시지 않아요.”
“다행이지요.”
사이먼의 과장된 목소리에 다프네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제가 셔츠까지 벗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실 테지요?”
“무슨 말씀을!”
히아신스가 외쳤다.
“아무것도 벗으실 필요가 없어요. 이곳엔 진흙탕이 없답니다.”
“다행이지 뭡니까.”
사이먼이 한숨을 내쉬며 일부러 가슴팍에 한 손을 얹었다.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이 이토록 즐거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귀하의 집안 레이디들께서는 꽤 요구 사항이 많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히아신스는 기쁨과 의심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의심이 승리를 거둔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그만 엉덩이에 양손을 가져다대고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지금 제게 장난을 치시는 겁니까?”
그 역시 곧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신 것 같아요.”
“전 그저 주위에 진흙탕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뿐이랍니다.”
히아신스는 잠시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혹시 제 언니와 결혼하실 갱각이라면,”
다프네는 비스킷을 먹다가 사레가 들렸다.
“허락해 드리겠어요.”
사이먼은 숨을 쉬다가 사레가 들렸다.
히아신스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실 거라면, 꼭 절 기다려 주셨으면 해요.”
어린 소녀들과 만나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사이먼에게는 천만다행히도 그레고리가 갑자기 좇아와 히아신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히아신스는 얼른 그 뒤를 쫓았다. 얼굴에는 꼭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조금 전 제 남동생에게 구원을 받으신 것 같군요.”
다프네가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여동생, 나이가 몇이오?”
사이먼이 물었다.
“열 살이요. 왜요?”
사이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잠시 동안 난 그 애가 마흔 살쯤 먹은 줄 알았다고.”
다프네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때 보면 어머님을 너무 닮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라고요.”
그 순간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여인이 일어서서 자식들을 불러 요트에 태우기 시작했다.
“어서 오너라! 시간이 늦어지고 있어!”
바이올렛이 외쳤다.
사이먼은 회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겨우 3시인데.”
다프네는 어깨를 으쓱하고 일어섰다.
“어머님껜 이게 늦은 시간이에요.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레이디란 다섯 시 전까지 집에 돌아와야 한대요.”
“왜?”
그녀는 몸을 굽혀 모포를 집어들었다.
“전혀 모르겠어요. 저녁 식사를 위해 몸단장을 해야 하나 보죠. 자라면서 내내 들어서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않는 규칙 중 하나예요.”
그녀는 몸을 펴고 가슴에 모포를 가져다 대며 미소지었다.
“우리도 이제 가야겠죠?”
사이먼은 팔을 내밀었다.
“물론이오.”
요트로 몇 걸음 다가가다가 다프네가 물었다.
“히아신스를 꽤 잘 대하시던데,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셨나 봐요.”
“아니오.”
그가 짧게 말했다.
“아.”
그녀의 얼굴에 살짝 주름이 갔다.
“형제분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행을 하시는 중에 아이들을 만나신 줄 알았어요.”
다프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대화를 계속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이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고, 왠지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 히아신스와 말장난을 주고받던 남자와 너무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은 뒤 말했다.
“뭐, 경험이 많은 건 아니라 해도 확실히 재능은 있으신걸요. 가끔 아이들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어른들도 있거든요.”
그녀는 그의 팔을 두드렸다.
“언젠가는 어떤 운 좋은 아이의 멋진 아버지가 되실 거예요.”
그는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다프네는 심장까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을 전에도 한 것 같소만.”
그는 물어뜯듯 말했다.
“절대로.”
“하지만 공작님께선……”
“따라서 아이를 가지게 될 일도 전혀 없을 것 같소.”
“아……알겠어요.”
다프네는 침을 삼키고 미소를 지어 보려 했지만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의 관계가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라지만, 그녀는 왠지 실망 비슷한 걸 느꼈다.
두 사람은 다른 브리저튼 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강둑에 다다랐다. 몇 명은 이미 배에 올랐으며, 그레고리는 배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레고리!”
바이올렛이 날카롭게 외쳤다.
“당장 그만둬라!”
그레고리는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얼른 요트에 타거나 강둑으로 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거라.”
사이먼은 다프네의 팔을 놓고 중얼거렸다.
“배다리가 젖은 것 같은데.”
그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머니 말씀 안 들려!”
히아신스가 외쳤다.
“오, 히아신스.”
다프네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이번만큼은 좀 참아 주면 안 되겠니?”
그레고리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다프네는 끙 하고 신음했다. 그리고 사이먼이 여전히 배다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의 옆으로 쫓아가 속삭였다.
“사이먼. 그레고리는 괜찮을 거예요.”
“행여나 미끄러져 넘어져서 밧줄에 걸리기라도 하면 안 되지.”
그는 요트 옆에 매달려 있는 밧줄 더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사이먼이 배다리 끝에서 자연스런 태도로 그레고리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할 거니?”
그는 좁다란 나무 판자 위로 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건너갈 수 있게 좀 비켜 주겠니?”
그레고리는 눈을 깜박였다.
“다프네 누님을 에스코트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이먼은 끙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순간, 요트 위에 이미 타고 있던 앤소니가 배다리 반대쪽에 나타났다.
“그레고리!”
그가 날카롭게 외쳤다.
“당장 보트에 타!”
강둑에서 다프네는 그레고리가 놀라서 몸을 빙글 돌리는 광경을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미끄러운 판자 위에서 균형을 잃었다. 앤소니가 동생의 팔을 잡으려고 얼른 몸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그레고리는 이미 바닥에 엉덩이를 부딪힌 상태라 앤소니는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앤소니가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그레고리는 배다리를 타고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가며 사이먼의 정강이에 정통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사이먼!”
다프네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이먼은 템즈 강의 뿌연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레고리는 처량하게 죄송하다는 소리만 연달아 외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 주춤거리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게처럼 뒤뚱뒤뚱 몸을 옮겨갔다.
그래서 아마도 자기 뒤에 간신히 중심을 잡은 듯한 앤소니가 있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레고리는 앤소니에게 쿵 부딪혀 버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앤소니 역시 사이먼 바로 옆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프네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커다랗게 치켜 떴다.
바이올렛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된다.”
다프네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려고 억지로 입술을 꼭 다물었지만, 참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어머님도 웃고 계시잖아요.”
“무슨 소리!”
바이올렛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의 목이 웃음을 참으려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난 엄마다. 감히 내게 뭐라 하지는 못할 거야, 두 사람 다.”
앤소니와 사이먼이 비척거리며 물에서 기어나왔다. 둘 다 물을 뚝뚝 흘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배다리를 끝까지 기어올라가 배 안으로 몸을 감춰 버렸다.
“네가 가서 좀 중재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바이올렛이 넌지시 말했다.
“제가요?”
다프네가 가냘프게 비명을 지르고 말했다.
“저러다가는 서로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아서.”
“하지만 왜요? 모두 그레고리가 잘못한 건데요?”
“물론이지.”
바이올렛이 초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남자잖니. 둘 다 몹시 화가 난데다가 창피하고, 게다가 열두 살 난 어린아이에게 분풀이를 할 수는 없잖니.”
아니나다를까 앤소니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 혼자서도 그 애를 돌볼 수 있었는데.”
사이먼도 동시에 으르렁대고 있었다.
“자네만 그 애를 놀라게 하지 않았어도……”
바이올렛은 눈을 굴리며 다프네에게 말했다.
“너도 곧 알게 되겟지만, 남자들이란 자신이 바보짓을 했을 경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습성이 있단다.”
다프네는 얼른 두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 사이로 뛰어들어갔지만, 그들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해도 그 어떤 말이나 논리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환한 미소를 띤 채 사이먼의 팔에 매달려 버렸다.
“절 배 위까지 에스코트해 주시겠어요?”
사이먼은 앤소니를 노려보았다.
앤소니는 사이먼을 노려보았다.
다프네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직 안 끝났네, 헤이스팅스.”
앤소니가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지.”
사이먼도 지지 않고 외쳤다.
다프네는 두 사람이 주먹을 날릴 핑계거리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면 사이먼의 팔을 잡아 빼기라도 할 각오로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마지막으로 불타는 시선을 교환한 뒤, 그는 순순히 그녀를 배 위로 안내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길었다.
그날 밤늦게 잘 준비를 하던 다프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다시 로브를 입고 따뜻한 우유나 말동무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형제가 많으니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부엌으로 가다가 그녀는 앤소니의 서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큰오빠가 책상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편지를 쓰고 있었는지 손가락에는 잉크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서재에 있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는 따로 밖에 나가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브리저튼 저택의 서재를 애용하는 편이었고, 대부분의 사무는 낮에 보는 편이었다.
“오빠는 그런 일을 해줄 비서도 없나요?”
다프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앤소니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바보 자식이 결혼을 해서 브리스톨로 이사가 버렸다 이거지.”
그가 내뱉었다.
“아.”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 책상 반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이렇게 이상한 시간에 여기 있는 거로군요.”
앤소니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자정은 이상한 시간이라 부르기 어려운 시간이야. 게다가 오후 내내 템즈 강의 진흙을 씻어내느라 바빴잖아.”
그는 뒤로 몸을 기댔다.
“그러는 너야말로 안 자고 뭐하는 거냐?”
“잠이 안 와서.”
다프네는 어깻짓을 했다.
“따뜻한 우유나 마실까 하고 왔는데 오빠가 뭐라고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려서요.”
앤소니가 툴툴거렸다.
“망할 놈의 깃펜 때문이야. 정말이지 이건……”
그가 수줍게 웃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나머지는 대강 알아듣겠지?”
다프네 역시 미소를 지었다. 오빠들은 원래 여동생 앞이라고 해서 말을 삼가는 편이 아니었다.
“곧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가 말한 따끈한 우유도 괜찮을 것 같구나. 누굴 불러서 부탁할까?”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 우리가 직접 해보는 게 어떨까요? 우리 둘 다 바보가 아니잖아요. 우유를 데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하인들도 지금쯤은 모두 자고 있을 거라고요.”
앤소니는 그녀를 따라 서재밖으로 나왔다.
“좋아. 하지만 귀찮은 건 다 널 시킬 테다. 우유를 어떻게 끓여야 하는지 난 도대체 상상도 안 간다고.”
“우유가 끓을 때까지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다프네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는 부엌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창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제외하고는 방안이 컴컴했다.
“내가 우유를 찾는 동안 오빠는 램프를 찾아봐요.”
그녀는 앤소니에게 말하고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설마, 오빠도 램프 정도는 찾을 수 있겠죠?”
“아,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기분 좋게 말했다.
다프네는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을 더듬어 머리 위쪽에 걸려 있던 조그만 냄비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녀와 앤소니는 원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앤소니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기분 좋았다. 지난 주 내내 앤소니는 어디가 아픈 맹수처럼 암울하기만 했다. 그의 신랄함은 온통 그녀에게만 퍼부어지고 있었다. 물론 사이먼에게도 화살은 돌아갔지만, 앤소니가 기분이 나쁠 때 보통 주위에 있는 것은 다프네지 사이먼이 아니었으니까. 등뒤에서 불빛이 일렁거려 고개를 돌려 보니 앤소니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넌 우유를 찾았니? 아니면 차라리 내가 밖으로 나가서 젖소를 데려오는 게 나을까?”
다프네도 웃음을 터뜨리며 병을 치켜들었다.
“찾았죠!”
그녀는 병을 들고 최근에 요리사가 산 최신식 스토브를 바라보았다.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요?”
“전혀. 너는?”
다프네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전혀.”
그녀는 몸을 굽혀 반짝거리는 스토브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뜨겁지 않은데요.”
“조금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차가운 편인데.”
남매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내 생각엔 말이야.”
앤소니가 마침내 말했다.
“차가운 우유를 마시는 것도 상쾌할 것 같아.”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에요!”
앤소니는 씩 웃으며 머그 잔을 두 개 찾았다.
“자, 네가 따라.”
다프네가 우유를 따르자 두 사람은 의자에 걸터앉아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앤소니가 먼저 잔을 비운 뒤 한 잔을 더 따랐다.
“너도 더 마시련?”
그는 입술에 묻은 우유를 닦으며 말했다.
“아니오. 난 아직 반도 못 마신걸.”
다프네가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핥고 의자에서 꼼지락거렸다. 앤소니가 평소의 기분 좋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까 지금이라면……글쎄,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 망할. 그녀는 생각했다. 그냥 물어봐 버리는 거야.”
“앤소니 오빠?”
그녀가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
“공작님에 관한 일인데.”
앤소니는 머그 잔을 소리나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공작이 어쨌다는 게냐?”
“오빠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야.”
앤소니가 기운 빠진 한숨을 쉬었다.
“그 녀석은 내 제일 친한 친구 중 하나란 말이다.”
다프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빠의 최근 행동을 보면 그렇다고 생각하기 힘들어요.”
“그저 그 녀석이 여자와 있을 때는 안심을 할 수가 없어서 그래. 특히 네 곁에 있을 때는.”
“오빠, 지금 한 말이 오빠가 한 말 중 제일 멍청한 말이란 건 알고 계시겠죠? 공작님이 한때는 난봉꾼……뭐, 지금도 여전하겠지만……난봉꾼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은 절대 날 유혹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구요. 내가 오빠 동생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에요.”
앤소니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비록 남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그런 계율 따위가 없다 해도 말이에요.”
다프네는 눈을 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내게 손이라도 대는 날엔 오빠가 자길 죽이리란 걸 잘 알고 있다구요. 바보는 아니니까.”
앤소니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뭐냐?”
다프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오빠는 혹시 왜 공작님이 결혼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고 있을까 해서.”
앤소니는 하마터면 마시던 우유를 그대로 뱉어버릴 뻔했다.
“세상에, 다프네! 두 사람의 일이 그저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 게 아니었니? 그 녀석과 결혼할 생각을 왜 하느냔 말이다!”
“그게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외쳤지만, 아마도 자신의 말이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낱낱이 분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그저 궁금해서 그렇단 말이에요.”
그녀가 방어하듯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너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꿈 따위는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앤소니가 툴툴거렸다.
“왜인지는 지금 당장 말해 줄 수도 있어. 그 녀석은 절대 결혼하지 않아. 절대. 내 말 알아듣겠니, 다프네? 그 녀석은 너와 결혼해 주지 않아.”
“오빠 말을 이해 못하면 정말 멍텅구리일 거야.”
다프네가 투덜거렸다.
“잘 됐군. 그럼 그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자.”
“아, 안 돼요!”
그녀가 외쳤다.
“내 질문에는 하나도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앤소니는 엄한 시선으로 탁자 건너편의 동생을 노려보았다.
“공작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을 작정이냐구요?”
그녀가 끈질기게 물었다.
“왜 궁금한 거지?”
그가 힘없이 물었다.
진실. 다프네가 두려워하는 그 진실은 아까 앤소니가 한 비난에 근접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에요. 게다가 난 알 권리가 있어요. 만일 적당한 구혼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정말이지 공작님이 날 버렸을 때 난 사교계에서 따돌림당할지도 몰라요.”
“네가 공작을 차는 역할을 맡은 줄로 아는데?”
앤소니가 의심스런 투로 물었다.
다프네는 코웃음을 쳤다.
“그걸 누가 믿겠어요?”
앤소니도 얼른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고, 다프네는 그래서 좀 속이 상했다. 그가 말했다.
“나도 헤이스팅스가 왜 결혼을 싫어하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내가 그 녀석을 알게 된 이후 쭉 그래 왔다는 거지.”
다프네는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앤소니가 먼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할 때의 그를 볼라치면, 그건 그저 이러저리 시달려서 진저리가 난 독신 남자의 푸념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무슨 뜻이죠?”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그가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면 그건 진심이라는 거지.”
“그렇군요.”
앤소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프네는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약간의 근심 같은 것을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너에게 달려드는 구혼자들 가운데 한 명을 골라. 헤이스팅스는 잊어버려. 그는 좋은 녀석이지만, 네게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야.”
다프네는 그가 한 말의 첫 번째 부분을 공략했다.
“하지만 오빠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는 네게 어울리지 않아.”
앤소니가 되풀이했다.
하지만 다프네는 자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이지 어쩌면 앤소니 오빠의 말이 틀릴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