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지옥에서 온 적임자(2)
확실히 ‘아버지’들은 달랐다.
여태 거쳐 온 상대 중에서 가장 질겼다.
정우는 하반신이 날아간 사내가 이쪽을 향해 팔을 뻗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한 번이라도 더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끝까지 붙들고 있기엔 신체 손실 정도가 너무 심했다.
푹.
결국 사내의 몸에서 힘이 빠지더니 빳빳이 세워져 있던 고개가 땅으로 처박혔다.
쓸쓸하고 무력한 죽음.
“…….”
정우는 조용히 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요원 중 여섯을 쓰러뜨리는 동안 대략 1분이 지났다.
그러니까 이들은 각자의 목숨을 10초란 시간과 바꾼 셈이다. 가족들이 도망갈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나름 숭고한 죽음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로는 어느 정도 납득했지만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이들도 이쪽과 마찬가지로 손에 무수한 피를 묻힌 자들이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해도 극악무도한 살인자였던 이들이 오늘은 가련한 희생자가 됐다.
여긴 이런 세계다. 그래서 정우는 더 생각하길 그만뒀다.
슥.
이윽고 구원자의 시선이 마지막 한 사람에게 옮겨 갔다.
다름 아닌 특수전단 3팀장, 김형수.
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목숨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동료들의 생명이 10초란 시간과 교환되는 걸 목도한 마당에 뭘 더 바랄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구원자가 자신을 쓰러뜨린 뒤 가족들을 쫓아갈 거란 생각을 하자 견딜 수 없이 비참해졌다.
“조,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마지막 부탁이다.”
형수는 보호막조차 두르지 않고 자비를 구걸했다. 싸움이 시작되는 즉시 자신의 시간이 끝나리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한마디라도 더 말을 거는 게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일 터.
“그쪽도 사람을 많이 죽인 걸로 아는데 억울해하면 안 되지.”
정우의 음성은 싸늘했다.
당신도 살려 달라며 애원하는 사람들을 죽여 오지 않았느냐는 뜻이었다.
“…….”
이에 형수는 할 말이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민간인들을 죽일 필요는 없잖아……? 피를 보는 건 우리끼리도 충분할 텐데.”
형수가 어떻게든 대화를 더 끌어가려 한다.
그러나.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다른 녀석이나 괴물들이 죽이려 들 거다. 이참에 다 함께 죽는 게 깔끔해. 적어도 내가 입수한 정수는 외부로 유출되지 않을 테니까.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내게 죽는 게 가장 현명하다.”
정우가 대번에 입장을 정리하며 동공을 파랗게 태웠다. 대화를 끝내려는 거다.
“진짜 미친 새끼군…….”
형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뒷걸음쳤다.
그러다 정우가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모든 정수를 신체 강화에 쏟았다. 측방으로 고속 도약하기 위해서였다.
타앗!
그의 몸이 번개처럼 튀어 올랐고, 동시에 시퍼런 정수 파동이 장내를 휘감았다.
“어……!”
예상보다 훨씬 거대한 파동에 형수가 경악한다. 그러곤 왜인지 모를 거북함에 고개를 떨어뜨려서 아래를 봤다.
“…….”
아니나 다를까, 오른쪽 정강이 밑의 모든 게 사라져 있었다.
꾸득.
그리고 우습게도 반대편 다리엔 쥐가 났다.
“제길!”
형수는 일그러진 얼굴로 곤두박질하는 와중에 시퍼런 빛 덩어리가 달려드는 걸 봤다. 섬뜩할 정도의 정수를 머금은 구원자였다.
“너도 업보를 치르게 될 거다!”
이게 최후의 순간임을 직감한 형수가 악을 쓰며 저주를 내뱉었다.
그러자 정우가 짤막하게 대꾸하며 그의 머리를 송두리째 소멸시켰다.
“일단 지금은 아니지.”
앞으로도 아닐 거다,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언제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를 계속 대비해 왔고, 그 결과로 지독할 정도의 업보를 쌓게 됐다.
툭.
마침내 머리와 오른쪽 발이 없는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정우는 이 시체 앞에 서서 곧 튀어 오른 정수 구체를 바로 빨아들였다.
티틱, 스아아…….
머릿속이 살짝 뻐근해진다 싶더니 정수 총량이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제저녁만 해도 28만 개.
반면 지금은.
‘804,228.’
무려 80만 개.
정우는 의식 속에 새겨진 숫자를 거듭 읽었다.
새로운 성취에 감격해서가 아니다. 80만 개를 달성하자마자 어떤 변화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짚어서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몸속에 큼직한 공간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에 정우가 평가관을 호출하려 들자 상대가 먼저 기척을 드러냈다.
-인간, 박정우 님의 내부 구조가 보유하신 정수량에 맞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내부 구조…… 가 변화하고 있다고요?’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물론 장기가 뒤틀리고 있다는 뜻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유쾌한 일까진 아니지 않은가.
-정수가 박정우 님의 특질을 보다 정확하게 투영할 것입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설명.
정우는 더 물어보길 포기했다. 변화가 진행 중이라면 조만간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우선은 여기 일부터 끝내자.’
일곱 요원이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특수전단 3팀의 나머지 일행은 정우의 시야를 벗어나 있었다.
그새 수십 킬로를 이동한 건 아닐 테고, 아마 근처 건물 사이로 이동 중일 거다.
‘한 명이 경호원 역할로 빠진 것 같던데 그리 강하진 않나 보네.’
정우는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다시 대성 본부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걸 봤다.
현시점 반경 10킬로 이내에 탈주자들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우는 이것이 인접 지역에 머물고 있던 각성자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지, 정말 본부 쪽에 새로운 누군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오전 10시 28분.
대성 그룹의 종합 연구동 3층.
용헌과 동훈은 정신없이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정우와 다시 합류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전리품’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개별 포장된 각종 식물의 씨앗.
손바닥만 한 팩에 든 씨앗들이 8평 크기의 창고 안에 가득 차 있었고, 두 사람은 이걸 보자마자 대성도 나름대로 ‘방주’를 구축 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끼릭, 끼릭.
용헌이 이동식 선반을 끌고 오자 동훈이 박스째로 씨앗을 옮겨 싣기 시작했다.
“공간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일단 중요한 것부터 챙깁시다.”
용헌의 말에 동훈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다시 뒤를 돌아봤다.
“나무 씨앗.”
“예?”
“여기 나무 씨앗도 있는데 챙겨 가는 게 좋겠습니다.”
“나무도 씨앗이 있어요?”
용헌이 일순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여태 나무를 심는다고 하면 묘목을 옮겨 심는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식목일에 나무 심기 안 해 보셨습니까? 우리 땐 학교에서 매년 챙겼는데.”
동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요즘은 모르겠으나 자신이 어릴 때만 해도 학교에서 종종 나무 씨앗을 나눠 주곤 했기 때문이다.
동훈의 올해 나이는 42세. 그러니 40대 후반인 용헌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줄로 알았다.
“그, 글쎄요. 학교마다 좀 달랐나 보죠. 전 화단에 꽃을 심은 기억밖엔…….”
“예, 그럼 이번에 보십시오.”
동훈은 짧게 호응하고서 선반 위에 나무 씨앗 박스를 올렸다.
툭.
“한 10년은 더 지나야 우리가 심은 나무를 볼 수 있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 그렇지요.”
용헌은 동훈의 방금 대사가 참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왜인지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 세계에서 10년 후를 대비해 나무 씨앗을 챙기다니…… 뭔가 낭만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 낭만적인 기분이 오래가진 않았다.
두두두두…….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바깥에서부터 들려온 프로펠러 소리.
용헌과 동훈 모두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죠?”
동훈이 표정을 구기며 물었고, 이에 용헌이 창밖을 내다봤다.
소리의 발원지는 이쪽의 의료 헬기가 세워진 대성 본부 옥상이었다.
시커먼 헬기 한 대가 그리로 접근 중이었던 거다.
‘외근을 나갔던 팀이 있었나?’
용헌이라고 해서 본부 측 스케줄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대성에서 부장이라고 해 봐야 상급 실무자일 뿐이었으니까.
“다행히 우린 연구동에 있으니까 바로 발각되진 않을 겁니다.”
용헌이 이렇게 말하자 동훈이 부연했다.
“바로 우릴 찾아 나서긴 하겠죠. 타고 온 헬기가 저기 있는데.”
“……맞습니다.”
그사이 검은 헬기가 본부 건물에 착륙을 시도하는 게 보였다. 지금쯤이면 옥상에 널린 대성 측 요원들의 시체 일부를 발견했을 것이다.
“당장 우리 헬기를 어떻게 하진 않을 겁니다. 대성 마크가 찍혀 있으니까.”
용헌은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정우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대성이 자리 잡고 있던 지역답게 통화 신호가 바로잡혔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몇 차례 연결음이 나더니 곧 휴대폰 너머에서 구원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무슨 일 있습니까?
“저, 정우 씨……! 대성 쪽에서 다른 팀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방금 본부 옥상에 착륙하는 걸 봤습니다.”
-다른 팀이라니요? 두 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연구동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럼 그 안에 숨어서 기다려요. 괜히 밖으로 나갔다간 눈에 더 띌 겁니다. 지금 가면 5분쯤 걸려요.
그러더니 푸아악, 하는 파열음이 흘러나왔다.
“5분이요……?”
용헌의 시선이 다시 본부 옥상으로 향한다.
그러나 더 이상 헬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미 착륙을 마쳤다는 의미.
저자들이 5분 동안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일단 엘리베이터가 멀쩡히 작동하므로 옥상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예.
통화는 빠르게 끝났다.
용헌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여느 때처럼 침착한 모습의 동훈이 보였다.
“시키는 대로 해야죠. 우선 우리도 위로 더 올라갑시다. 다른 층에 뭐가 있는지도 볼 겸.”
그러면서 등 뒤로 돌려 놨던 소총을 품 안으로 옮겼다.
“어……. 이 위론 정우 씨가 온 뒤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용헌이 불안한 표정으로 동훈을 만류했다.
정우가 여길 떠나기 전에 모든 층을 훑어보긴 했으나 당시만 해도 시간이 촉박해서 모든 방을 열어 본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긴 무려 6층짜리 건물이다. 내부 구조를 잘 아는 누군가 마음먹고 숨으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여기서 5분까진 못 버틸 텐데요.”
동훈이 주변을 둘러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으음.”
용헌도 3층 전경을 보고선 어느 정도 납득했다.
전체 면적의 반 이상이 사무실이었는데, 통유리로 된 파티션을 쓰고 있어서 사실상 개활지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창고로 쓰이는 방은 대략 다섯 개. 한 20초면 다 열어 볼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억!”
창밖을 힐끔대던 용헌이 뭔가를 발견하고서 자세를 낮췄다. 이에 동훈도 그를 따라 주저앉으면서 태연하게 물었다.
“벌써 옵니까?”
“……예. 정확히 이쪽으로, 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