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지옥에서 온 적임자(4)
다면체는 빛을 굴절시키기 마련이지만 지금 정우의 시야는 아주 말끔했다.
지구의 성명문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리 법칙 따위가 간단히 무시되는 느낌 말이다.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던 내면의 공간도 어느새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정수량에 맞게 신체의 내부 구조가 변화 중이라고 했던가.
심지어 이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뭐가 다른 거죠? 아직 잘 모르겠는데.’
정우는 장내를 슥 둘러보면서 평가관에게 물었다.
그러나 역시 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보호막의 형태가 처음 변한 것은 탈주자들을 처리할 무렵이었다.
민간인 무리를 경호하던 마지막 요원이 정우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가 이에 맞서 보호막을 전개하는 순간 몸에서 흘러나온 정수가 복잡한 다면체를 구성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당시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내기까지 했음에도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정말 형태만 변한 걸까?
‘좀 더 제대로 된 상대와 싸워 봐야겠어.’
과감한 등장과 달리 정우가 얌전히 서 있기만 하자 그를 피해 멀찍이 후퇴했던 두 요원이 눈빛을 교환했다.
‘대체 저게 뭐야……?’
‘저라고 알겠습니까?’
난생처음 보는 보호막. 아니, 실은 보호막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슥.
요원 중 하나가 슬그머니 무전기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정우가 그리로 시선을 줬다.
그러면서도 제지하진 않았다. 그저 상대가 자신의 상사에게 연락하는 걸 지켜봤을 뿐.
치익.
“팀장님, 서둘러 주십시오.”
-뭐?
칙.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에서 불쾌감이 살짝 묻어 나온다 싶더니 이내 물음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야?
“A가 여기 도착했습니다. 5층입니다.”
-……알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납득 속도.
그러더니 곧 층계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츠측.
이에 정우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돌아갔다.
요원들의 무전기에서 짤막한 암구호가 흘러나온 것도 이때였다.
-태풍.
“……!”
무전과 동시에 두 요원이 층계를 등지며 잽싸게 엎드렸다.
“지금 무슨.”
이를 보고 가장 놀란 건 사무실 안에서 인질을 잡고 있던 동훈.
그는 황급히 용헌을 발로 밀어 넘어지게 한 뒤 본인은 근처의 대성 직원 뒤에 숨었다.
반면 정우는 더 이상 이곳에서 위협적인 상대를 만날 수 없을 거라 여겼기에 층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층계 아래쪽에서부터 튀어 올라오는 까만 깡통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투웅.
공교롭게도 이미 겪어 본 무기였다. 섬광탄 말이다.
‘아, 저건 좀.’
총알은 쉽게 막을 수 있지만 빛과 소리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정우는 사무실 쪽으로 몸을 물리면서 당장 눈에 보이는 두 요원을 향해 정수를 뿜었다.
파아앗!
힘이란 건 상대적이다.
앞서 3팀을 송두리째 먹어 치운 정우의 정수 총량은 83만 개나 됐다.
이에 반해 두 요원의 정수 평균은 4만 개.
두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푸아악.
살점이 파열하는 특유의 소리와 함께 허공의 섬광탄도 굉음을 뿜어냈다.
콰아아앙!
정우로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제길.’
이를 꽉 물며 보호막의 밀도를 더 끌어 올리자 시야가 일순 수천 조각으로 쪼개졌다가 도로 복원됐다.
“……?”
예기치 못한 현상에 정우가 눈을 껌뻑인다.
자신이 섬광탄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뭐야, 방금 보호막이 막아 준 건가?’
눈이 부시거나 이명이 있지도 않았고, 모든 정수 역시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건물 외부에서부터 뭔가 날아들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완전 방어에 성공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슥.
정우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세 발의 정수 창이 외벽을 뚫고 들어왔다.
츠츠츳!
두어 발이 정우의 어깨와 머리에 들이박혔지만 보호막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섬광탄에 노출되어 정수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진입한다.”
이윽고 층계 아래서부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정우도 상대를 맞이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섬광탄에 사전 폭격까지. 여태 마주친 특수전단 중에선 가장 조심스럽게 싸우는 놈들이었다. 그만큼 여러 변수를 겪어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
뒤를 돌아보니 섬광탄 탓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훈과 용헌, 그리고 수십의 대성 직원이 보였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혹시 특이 사항이 있습니까?”
정우의 질문에 용헌이 바닥에 엎어진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 삼 층은 보존해 주셔야 합니다. 그곳에 씨앗들을 놔두고 왔습니다.”
박정우가 작심하고 싸우면 이런 건물 정도는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음을 잘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예.”
정우는 짧게 대답한 뒤 실내를 다시 둘러봤다. 앞으로 이 건물이 어느 수준의 손상까지 더 견딜 수 있을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방출은 그만 사용해야겠네.’
5층 내부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앞으로 더 난장판이 될 테고. 이 안에서 너도나도 정수를 뿜어 대다간 건물 자체가 무너질 거다.
타탓!
층계 쪽에선 정장 차림의 사내 넷이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쪽이 반격할 상태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지 신체 강화에 정수를 쏟아부은 채였다.
그러나 정우가 멀쩡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팀장님.”
선두의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어떤 신호를 보냈고, 곧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나타나서는 정우를 노려봤다. 다름 아닌 장태원이었다.
“아.”
태원이 곤란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
구원자가 섬광탄을 맞고 쓰러지기는커녕 괴상한 형태의 보호막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정우도 사내를 멍하니 바라봤다.
상대가 웬 가죽 구두를 들고 있는 데다가 다른 요원과 달리 정수 보유량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14만 개……? 제정신인가?’
최초의 채널에 들어와 있는 구원자 중에서도 저만한 정수를 가진 자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저런 강자가 대기업의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다니…… 정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뭐냐, 할 말 있으면 해라.”
정우의 표정을 본 장태원이 마치 선심 쓰듯 발언권을 허락했다.
수적으로 우세하니 아직 할 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자존심?
정우는 바로 정수 칼날을 뽑으려다가 한 가지를 물었다.
“만약 여기서 날 쓰러뜨리고 나면 앞으로 뭘 할 생각이지? 부산에 있다는 다른 본부로 내려가서 또 하수인 짓거리를 하나?”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태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사이 층계를 뛰어 올라온 요원 셋이 추가로 합류했다. 아마도 조금 전 바깥에서 정수 창을 던졌던 자들일 것이다.
이제 장내에 모이게 된 요원은 총 7인.
장태원은 부하들을 병풍처럼 거느린 채 구원자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덕분에 우린 더 이상 대성에 목을 맬 필요가 없게 됐다.”
정우가 특수전단 3팀을 쫓는 과정에서 초토화시킨 직원 숙소를 말하는 거다.
끄득.
태원이 이를 갈더니 말을 이었다.
“널 짓이기고 난 뒤엔 네 수하들을 아주 천천히 죽여 주마.”
이 말에 정우가 막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용헌과 동훈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내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특수전단 쪽에서부터 거친 기척이 일었다.
홰액!
정우가 고개를 돌린 사이 놈들이 일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뒈졋!”
일곱 요원의 손끝에서 제각기 다른 밀도의 정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들의 정수 총합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거물급 구원자여도 일격에 죽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터.
실제로 이들의 일제 공격은 대성의 최종 병기라고 할 만했다.
팀장인 장태원만 해도 단독으로 14만 개 보유, 나머지 6인의 정수까지 모두 합치면 무려 40만 개 가까이 됐으니까.
파아아앗!
사실상 섬광탄이 터졌을 때보다 지금이 더 눈부셨다.
일곱 겹으로 이루어진 푸른빛이 사위를 가득 채웠고, 최후를 직감한 사무실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단 두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으그급……!”
용헌은 꽉 맞물린 앞니 사이로 우스꽝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정우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봤다.
바로 뒤편의 동훈도 마찬가지.
적어도 이 둘은 박정우의 전투 능력…… 아니, 살인 능력을 맹신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상대의 정수량을 볼 수 있는 그가 이쪽을 돌아보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의미 아니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정우의 보호막이 확장되면서 일곱 겹의 정수 파동을 받아 냈다.
츠츠츠츳!
“……?”
상상도 못한 광경에 요원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지만 이들이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방금 일격에 각자 가진 모든 정수를 쏟아 낸 참이었으니까.
심지어 장태원은 본부장의 복수를 대신 한답시고 여전히 그의 구두를 손에 쥔 채였다.
“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일곱 요원은 무력한 모습으로 서서 정우가 정수 칼날을 뽑아내는 걸 봤다.
스아앗.
그런데 칼날이 뽑혀 나온 뒤 가장 놀란 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정우였다.
‘어? 방금…….’
팟. 스아앗.
정우는 칼날을 회수했다가 다시 뽑았다.
그러자 확실해졌다. 팔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 일부가 정수 칼날에 스며들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칼날 근처의 보호막을 곤두세웠더니.
까드득.
보호막에서 난생처음 듣는 소리가 나며 팔뚝 주변에 가시가 돋았다.
말 그대로 가시였다. 보호막 표면이 변형되며 생겨난 가시.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요원들은 이제 겁에 질려 있었다. 구원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다면체 보호막이 이젠 촘촘한 가시 비늘처럼 바뀌어 있었으니까.
뚜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보호막의 점유율을 늘리기 시작한 가시들은 정우의 전신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더는 사람으로 볼 수 없는 형상이었다.
“으…….”
지독한 위화감 속에서, 요원들의 몸에 정수가 다시 차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그 누구도 정우를 향해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자원을 신체 강화에 쏟아붓고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쉬이이잇!
정우가 탈주자들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가 두르고 있던 가시들이 전방 200도로 뻗어 나갔다. 마치 촉수처럼 말이다.
콰쾃! 콰득!
수백, 아니 수천 개의 길쭉한 가시가 단번에 여섯 요원을 꿰뚫었다.
몇몇은 도약하던 그대로 공중에서 붙들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수십 가닥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전신에 수백 개의 구멍이 나서 더는 본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츠르릅.
할 일을 마친 가시들이 본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 대체 이건.”
벌집이 되지 않은 건 본능적으로 보호막을 감았던 장태원이 유일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형상으로 널브러진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손에 쥐고 있던 본부장의 구두는 일찍이 바닥에 떨어뜨렸고, 가시 세례를 받아 낸 보호막 역시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특질을 더 반영한다는 게 이런 소리였나.”
구원자가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지껄이며 난데없이 건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태원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저자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이쯤 오니 그 어떤 예측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확실한 점이라면, 자신이 여기에서 살아나갈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죽은 뒤엔 저 끔찍한 가시들의 양분으로 쓰일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