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괴물(1)
오전 11시 31분.
성역의 보호막이 진동하자 선웅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방금 도착한 외부인들도 아직 처리를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선웅의 눈앞엔 20명 가까이 되는 외부인이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저마다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연신 둘러보는데, 정작 발밑의 대지가 왜 움푹 파여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후……. 이번엔 어느 쪽에서 오죠?”
선웅의 물음에 그를 보조하던 중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 경고음은 없지 않았습니까?”
“아, 그러네요.”
선웅도 뒤늦게 깨닫고서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역을 감싼 이 보호막은 여태 단 한 번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외부인이 침입할 때 경고음을 내보내서 인원수를 알리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게 오류일 리는 없지 않은가?
“수색조가 복귀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군이 진입하는 걸 굳이 소리까지 울려서 경고해 줄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중성은 이 말을 하면서도 불현듯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사실 수색조가 복귀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은 나가서 해결하라고 일부러 식량을 챙겨 보냈는데…….
‘설마 누가 다친 건 아니겠지.’
오전 동안 백 명 가까이 되는 외부인을 더 받아 봤지만 그중에 쓸 만한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다시 말해 지금 성역엔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수색조가 급한 환자를 업고 온대도 민간요법 선에서 대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우선 여기부터 처리하시죠.”
중성의 말에 선웅이 다시 외부인들을 바라봤다.
이번 그룹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기술자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지만 대신에 임신 중인 부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가급적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하는 선웅으로선 간만에 대리자 권한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된 셈. 그러나 이게 의외의 복병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가 훗날 태어날 아이를 위해 부부만이라도 살려 주겠다고 하자 오히려 임산부 쪽에서 이렇게 조건을 건 것이다.
“저, 저희 둘만요? 여긴 제 동생도 있어요! 저 아이도 살려 주세요.”
“……?”
이에 선웅이 여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저 아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장성한 사내 아닌가?
‘차세대 할당제엔 배우자까지만 살려 준다고 되어 있을 텐데.’
난감해진 선웅이 중성을 바라보자 이 전직 차관보가 뒤편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명일에게 손을 뻗었다.
“명일 씨, 그 노트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예.”
명일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배낭에서 규칙 노트를 꺼내어 건넸다.
촤락.
아직 규칙을 많이 정한 게 아니라 어렵게 찾을 필요가 없었다. 차세대 할당제는 공백 페이지 한 장을 넘기자마자 나타났다.
「차세대 할당제.」
1. 방주의 전체 좌석 중 30%를 ‘차세대 할당 좌석’으로 지정한다.
2. 차세대 할당 좌석에는 아래에 해당하는 인원만이 탑승할 수 있다.
가) 임산부 또는 임산부와 그의 배우자.
나) 10세 이하의 아동.
다) 출산 및 육아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인원.
“음.”
중성이 턱을 쓰다듬더니 선웅에게 규칙 노트를 내보였다.
“굳이 저쪽의 요구를 들어주자면 안 될 것까지는 없습니다. 2조 ‘다’항의 해석을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확대 해석하면 말이 아주 안 되진 않으니까요.”
다) 출산 및 육아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인원.
본래는 산부인과 의사나 관련 계통 종사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저 임산부가 ‘동생을 태워 주지 않을 경우 난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한다면 그 동생 또한 출산 및 육아를 위해 필수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거다.
“……그건 너무 억지이지 않습니까?”
선웅이 표정을 구기자 중성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확실히 억지죠. 아주 안 좋은 선례가 될 겁니다. 그렇다고 규칙대로 한다면…….”
중성은 굳이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선웅도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대로 한다면 임산부가 죽음을 불사하든 말든 동생이란 자를 태워 줄 수 없는 것이다.
“동생을 포기하고 둘이라도 살든지 아니면 다 함께 그냥 죽든지…….”
선웅이 착잡한 목소리로 읊조리자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부부가 사색이 됐다. 자신들이 주제넘은 딜을 걸었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런데 결정적인 쐐기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날아들었다.
“저기……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다름 아닌 조선희였다. 용헌의 전처이자 성호의 아내, 동시에 투표권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예, 말씀하시죠.”
선웅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발언을 허락했고, 이에 선희가 은근히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입을 열었다.
“가능할까요? 자신의 형제를 죽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지낸다는 게? 저라면 하루가 지날수록 속이 시뻘겋게 타오를 것 같아요. 언젠간 반드시 복수할 거고요.”
이 말에 중성이 자신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반면 선웅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에 멍하니 선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우려한 바는 자신도 염두에 두고 있던 차다. 하지만 선희도 저 부부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밴 상태 아닌가? 같은 입장임에도 저격을 감행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저것도 일종의 모성애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식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라면 가차 없이 제거하려 드는…….
“아, 아, 아니에요!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저희만이라도……!”
결국 동생을 살려 달라던 임산부가 제자리에 납작 엎드리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배가 너무 불러 있어서 곧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이를 본 남편이 기겁하며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더 비참한 입장에 처한 건 바로 임산부의 동생이었다.
그는 넋 빠진 모습으로 자신의 누나가 바닥에 엎어진 꼴을 보다가 선웅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리 누나는 복수니 뭐니 그런 거 할 배짱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냥 살려 주세요. 무슨 규칙이 있다면서요. 저만 빠지면 아무 문제없는 거 아닌가요?”
“…….”
이에 선웅이 중성과 선희를 차례로 쳐다봤다.
중성은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선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인 이상 여기서조차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동생’이 선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곤 자신의 마지막 혈육을 향해 건조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순리대로 살아. 우리가 알던 그런 세상은 이제 없으니까.”
그러더니 조용히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며 선웅을 응시했다. 지금 끝내란 소리다.
그러자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원아?”
‘동생’의 이름은 세원.
선웅은 이미 세원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를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다음엔.
파아앗!
망설임 없이 정수를 뿜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누가 제지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
푸아아악!
특유의 파열음과 함께 세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완만한 구덩이가 생겼다.
“어…….”
이를 본 나머지 외부인들이 비로소 발밑의 땅이 울퉁불퉁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앞서 이 자리에서 수많은 외부인이 저렇게 죽어 간 것이다.
“어, 잠깐.”
잔혹한 진실.
몇몇이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기회는 없었다.
푸아아악! 푸아악!
“아…….”
끔찍한 광경에 명일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멀리서부터 접근 중인 세 사내를 보게 됐다.
성역 바깥으로 파견됐던 수색조였다. 중성의 추측대로 아까 그 진동은 방주 탑승자의 출입을 알리는 것이었던 거다.
성호는 큼지막한 양수기를 혼자 둘러업은 채였고, 태휘와 성태는 발전기 손잡이를 하나씩 나눠 들고 있었다.
처음엔 세 사람 모두 몹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역 중심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곤 메마른 얼굴이 됐다.
하지만 현재 성역에서 가장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살인자인 선웅이었다.
이제야 갓 반나절.
앞으로 얼마나 더 대리자로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데, 벌써부터 영혼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안 돼……!”
“으아악!”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사력을 다해 달음질하는 사람들.
선웅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정우를 떠올렸다.
“…….”
대체 어떻게 견뎌 온 걸까. 어떻게 하면 견딜 수 있는 걸까.
그는 끊임없이 물었다.
* * *
오전 11시 40분, 역삼동 남부의 상공.
정우가 갑자기 눈을 크게 깜빡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동훈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물었고, 곧 정우가 성역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방주에 사람이 늘었습니다. 어떻게든 굴려 가고 있나 보군요.”
정확히는 두 사람. 아마 부부이지 않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현재 12/30 개체를 탑승자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 봐야 성역을 떠나온 뒤로 두 명이 더 늘었을 뿐이긴 하다.
‘꽤 신중하게 고르고 있구나.’
일부러 중성을 남겨 두고 왔으니 그가 자신을 대신해 이성적인 조언을 해 주고 있을 거라 믿었다.
두두두두…….
한편 머리 위쪽에선 프로펠러의 회전음이 계속해서 났다.
지금 이 헬기는 정우의 지시에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처음으로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과 진입로 표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대성 본부를 박살 낸 뒤 이렇다 할 먹잇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정우에겐 이것보다 더 흥미로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슷.
그가 습관적으로 정수 총량을 점검하자 이전과 달리 묵직해 보이는 숫자가 떠올랐다.
1,237,406.
무려 120만 개. 단위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그럼 지금쯤 2위는 몇 개나 가지고 있을까?
“…….”
정우는 창밖에 시선을 걸어 둔 채로 생각에 잠겼다.
슬슬 다른 순위권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치고 있었다.
단순히 더 많은 정수를 원해서가 아니다. 실은 호기심이 더 컸다. 다른 ‘괴물’들은 대체 어떤 사람일 것인가? 이쪽과 비슷한 느낌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유형?
또한 국내의 모든 진입로를 제때 닫으려면 폐쇄 권능을 가진 자끼리 어느 정도 협력을 할 필요성도 있었다. 이를테면 특정 시점까지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다든가.
“흠.”
그사이 동훈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사내를 슬쩍 쳐다봤다.
감히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남성.
이름이 주영재라고 했던가. 정우가 대성 본부의 연구동에서 유일하게 살려 준 사람이었다.
연구동에서의 직책은 시설 관리 과장.
본인의 말에 따르면 서울 화력 발전소에서 관리팀장으로 있다가 이리로 이직을 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방주 탑승까진 시키지 않은 상태였다. 일종의 수습 기간이라고 해야 할까.
나름의 협상 과정이 있던 용헌의 경우와 달리 이번은 정우가 일방적으로 채용한 터라 좀 더 두고 볼 필요가 있었다.
“괜찮습니까? 혹시 눈이 자꾸 돌아가는 것 같으면 바로 말하십시오. 그거 쇼크가 올 전조니까.”
동훈이 괴이한 웃음을 보이며 ‘덕담’을 건넸고, 이에 영재가 고개를 연신 꾸벅거리며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더니 또 정우의 눈치를 본다. 다음엔 아주 빠르게 그의 몸을 훑었다. 연구동에서 가시를 뿜어 대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였다.
“정우 씨, 저기인 것 같습니다.”
이번엔 조종석의 용헌이 저길 보라는 듯 손을 살짝 들어 전면을 가리켰다.
“그러네요.”
정우도 조종석 쪽의 창문을 통해 전방을 내다보고선 동의했다.
정황상 저기 말곤 다른 후보지가 있을 수 없었으니까.
땅바닥에 싱크홀처럼 자리를 잡은 대형 진입로. 그리고 그 앞에 요새처럼 버티고 있는 거대한 건물.
“와…….”
그림자처럼 존재감을 죽이고 있던 영재도 창밖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육중해 보이는 회백색 건물이 다름 아닌 강남 세브란스였기 때문이다.
연세대의 대학 병원임과 동시에.
“아, 잘못하면 스승님들을 뵐 수도 있겠군요.”
동훈이 레지던트 생활을 했던 곳.
“……?”
정우가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자 동훈이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