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괴물(4)
병동 8층의 약제실.
여섯 의사가 긴급 회동을 가졌다.
정확히는 구원자의 헬기를 타고 온 동훈과 강남 세브란스에 잔류해 있던 의사 5인의 대치였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윤재희 교수의 언성이 높아지자 출입문을 지키고 있던 막내 의사가 유리창 너머를 흘깃 봤다.
약제실 바깥에 환자의 가족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환자를 버리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는 중이었다.
“사실 이곳에선 저만 제정신이지요. 왜 눈앞의 환자만 보십니까? 성역으로 가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환자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여기 남으면? 운이 좋아야 이틀일까요?”
윤 교수에게 맞서는 동훈의 음성에도 노기가 실려 있었다.
이 비뇨기과 의사의 입장은 아주 명확했다.
하루가 다르게 생존 환경이 극악으로 치닫는 지금,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사실상 죽음이 확정된 상태라는 거다.
반면 성역엔 희망이 있다. 최소한 박정우가 사망하거나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는 생존이 보장되고, 만약 지구 존속마저 성공한다면 향후 수십 년 동안 의술을 펼칠 수 있다.
후대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을 물려줄 수도 있고 말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곳에서 간신히 연명 중인 환자들보다 훨씬 많은 생명을 구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제발…… 미래를 위해 잠깐만 비겁해지십시오.”
“이……!”
윤 교수는 여전히 진노하고 있었지만 그를 보좌해 온 젊은 의사들은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남은 환자는 크게 두 가지 부류였다.
첫째, 호흡기를 떼면 즉시 사망할 수밖에 없는 중환자.
둘째,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외상 환자.
이중에서 의사들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건 두 번째 케이스였다. 전부를 살리진 못하겠지만 안정화 구간에 접어든 일부는 시간과 자원을 들이기만 하면 회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박살 난 덕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현재 남은 자원만큼은 실무진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러나 최동훈이란 자의 말에 따르면 이 병동에 남은 시간은 외상 환자들을 살려 내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틀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라고 하지 않던가.
“성역이란 곳에 정말 그 정도의 가능성이 있다면…….”
의사 중 하나가 슬그머니 동훈에게 동조하자 윤 교수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쾅!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인간들을 위해 당장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버리겠다고……? 그래, 그렇게 한다고 치자. 그럼 환자들의 가족은 어떡할 텐가? 저들은 여길 절대 떠나지 않을 걸세.”
그러자 동훈이 출입문 쪽을 슬쩍 돌아봤다.
“그럼 죽는 거죠. 지금 바깥에선 얼마나 많은 죽음이 발생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미련하게 처신한 탓에 죽으면 차라리 억울하지도 않지요. 살기 위해 악을 썼는데도 죽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가 얼마나 태연하게 말했는지, 윤 교수가 잠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뭐, 뭣……?”
이 와중에 동훈은 말을 계속 이었다.
“다들 잘 들어요. 지금쯤 이곳의 진입로는 저와 함께 온 구원자가 닫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 사람은 성역으로 데려갈 인재를 제외하곤 아무도 살려 두지 않아요. 어째서? 라는 의문은 그냥 갖질 마십시오. 어차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더니 나머지 의사들을 하나씩 훑어보면서 당부하듯 이야기했다.
“애초에 모두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여기 계신 분 중에 두 분만 자원해서 우릴 따라온다면 나머지는 여기에서 연명 치료를 계속할 수 있게 간청해 보죠.”
곧 돌아올 구원자에게 구걸하겠다는 이야기다. 의료진의 일부라도 건졌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
이 말에 가뜩이나 불안해 보이던 의사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곤.
슥.
의사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고, 이어선 두 명이 거의 동시에 거수했다.
스슥.
“아.”
손을 든 의사들이 난감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윤 교수의 얼굴이 워낙 붉으락푸르락하기에 뒤를 돌아보니 출입문을 지키던 막내도 손을 들고 있었다.
“다들 진심인가?”
윤재희의 눈에 환멸마저 감돈다.
“……죄송합니다.”
이탈을 선언한 의사 중 가장 선배격인 자가 윤 교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 시국에 살길을 찾는 것이 어찌 흠이 되겠는가.
“시간이 없으니 약품부터 챙깁시다.”
동훈의 지시에 네 명의 의사가 상자에 약병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하.”
윤 교수는 이제 더 화낼 기력도 없는지 약제실 구석에 놓인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젊은 녀석들이니 새 기회를 붙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말이다. 사실상 체념에 가까웠지만…….
촤르륵, 드륵.
한동안 약병이 구르는 소리만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러던 중 막내 의사가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을 이야기했다.
“저희가 여길 떠난다고 하면 보호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교수님이 남겠다고 해도…….”
의사 하나론 환자들을 돌볼 수 없음을 저들도 안다, 라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이에 윤 교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생각이 이제야 든 건가?”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지막하게 말을 흘렸다.
“약품 싣는 걸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둘러 대. 그다음엔 옥상에서 잽싸게 헬기를 타고 도망가는 거지. 그 정도 비겁함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
비로소 약품 상자를 들고 모이던 의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겁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여길 떠나고 나면 윤 교수 혼자서 보호자들의 원망을 받아 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대번에 결정을 번복할 마음이 서지도 않았다.
다들 우물쭈물하고 있자 윤 교수가 한숨을 푹 쉬며 약제실 출입문을 가리켰다.
“가라. 그런 정신머리론 여기 남아 있어 봐야 도움 안 돼.”
두어 명이 몇 번 더 머뭇거리긴 했지만 끝내 모든 의사가 상자를 안고서 출입문 앞에 섰다.
“갑시다.”
이윽고 동훈이 문을 열었다.
끼익.
그러자 시커먼 그림자가 약제실 안으로 드리워졌다.
“무슨 짓입니까, 선생님들……?”
보호자들이 입구를 거의 막다시피 하며 서 있던 것이다.
이들은 의사들이 껴안은 약품 상자를 보고선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설마 우리를 버려두고 도망갈 생각이시오? 약까지 챙겨서?”
번득이는 눈빛.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윤재희 교수가 얼른 걸어 나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병원에서 오신 분들이 물자를 지원해 달라기에 조금 나눠 주는 것뿐입니다.”
“아, 그런가요? 그런 일은 저희를 시키시면 될 것을……. 이리 주시고 마저 진료 보십시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사실상 협박조였다.
“…….”
난처해진 윤 교수가 동훈 쪽을 슬쩍 보자 보호자 무리의 뒤편에 서 있던 일부가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낸 것이다.
“엇……?”
막내가 순간적으로 금속체를 본 것 같아 놀란 소리를 냈고, 이와 동시에 입구를 막고 있던 사람들이 숨겨 뒀던 흉기를 들이밀었다.
슉.
메스, 수술용 가위 따위의 의료 도구였다.
“씨발, 정말 우릴 나쁜 새끼들로 만들 거요? 말로 할 때 정신 차립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건 보호자 쪽이었다.
다들 눈이 뒤집혀서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으니까.
“아, 아니 여러분…….”
윤재희 교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숨을 헐떡인다.
아무리 그래도 여태 이들의 가족을 성심성의껏 보살펴 왔는데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당신들이 여길 떠나는 건 우리더러 다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결판을 내자고!”
휙.
선두의 사내가 어설픈 동작으로 메스를 휘둘렀다.
그러나 동작의 정확성과 별개로 위협감만큼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이들에겐 너무나도 강력한 동기가 있음을 의사들 역시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 씹새끼들!”
입구 근처의 또 다른 사내가 지나치게 흥분해서는 문지방 너머로 가위를 깊게 내질렀다.
“헉!”
놈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건 막내 의사였다. 그가 놀라서 황급히 몸을 뒤로 빼자 가위를 찔러 오던 남자가 약제실 안쪽으로 넘어졌다.
“아윽!”
그 바람에 탓, 하면서 수술용 가위가 남자의 손에서 튕겨 나왔다.
“엇, 안 돼!”
뭔가를 직감한 윤 교수가 소리를 질렀으나.
슥.
이미 막내가 가위를 집어 든 뒤였다.
“어어!”
그저 방어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을 뿐이지만 성난 군중은 반격 의사로 받아들였다.
시뻘건 감정이 흘러넘친다.
아까보다 더 길게 드리워진 까만 그림자.
정확히 문지방에 그어졌던 대치선이 점차 실내로 밀리기 시작했고, 보호자 중 몇몇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살의를 뿜어내기에 이르렀다.
“다 같이 죽자!”
사실 단순히 의사가 도망간다고 해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이건 그저 방아쇠였을 뿐이다. 오래된 감정들을 일시에 폭발시킨 방아쇠.
이들은 지구 폐쇄란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충분히 불행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 알 수 없는 환자의 가족이었고, 또 누구는 자식의 영구 장애가 확정된 입장이기도 했다.
“당신들마저! 당신들마저 우릴 버리면! 대체 누가……!”
보병들이 돌격 전에 함성을 지르듯, 흉기를 든 보호자들도 악기 가득한 외침으로 살의를 키웠다.
사태가 이쯤 왔으면 의사들과의 관계를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죽어어!”
드디어 한 사내가 기묘한 형태로 몸을 꼬더니 메스를 역수로 쥐고서 달려들었다.
누굴 노리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산만한 걸음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머, 멈춰!”
아직도 의사 대열의 선두에 있는 막내가 기겁했다.
그리고 이때.
탓!
다소 땅딸막한 실루엣이 막내의 팔꿈치를 스치며 튀어 나갔다.
다름 아닌 최동훈이었다.
“아?”
자신의 손에서 가위가 빠져나갔음을 깨달은 막내가 황급히 동훈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한참 늦은 때여서,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땐 메스를 쥐었던 사내가 옆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동훈이 가위로 놈의 목을 뚫어 버린 것이다.
“후우…… 이 개새끼들아, 적당히 하라고.”
벌컥, 부룩.
바닥에 엎어진 사내의 목에선 피가 식수대처럼 솟아올랐다.
“이…… 이 미친 새끼가…….”
남은 보호자들은 이를 악물면서도 막상 달려들진 못했다. 동훈의 기세에 압도된 탓이었다.
하지만 정말 의외의 복병이 하나 더 있었으니.
딸각.
누군가 허리를 굽혀서 죽은 사내가 떨어뜨린 메스를 주워 들었다.
그러곤 이 쇠붙이를 역수로 쥔 채 천천히 동훈의 옆에 섰다.
“……?”
이에 의사들뿐만 아니라 살기등등하던 보호자들마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흰 가운에 희끗한 머리, 고민이 많아 보이는 미간.
심장내과의 명의, 윤재희 교수가 메스를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