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붉은 가운(2)
* * *
[1] 인간 : 서울 및 경기 일대에서 내과의와 외과의 구합니다. 순환기, 흉부 계통 우대. 순위 제한은 없습니다. 선착순. mortal.충격.
이 한 단어로 일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태 단 한마디도 뱉지 않던 최상위 구원자가 뜬금없이 구인 공고를 내지 않았는가.
심지어 이 존재의 닉네임은 ‘인간’. 몇몇은 정말 1위답다고 생각했다.
[33] 기사도 : 닉네임 좀 봐……. 저 정도면 초반부터 작정하고 달린 거 아닌가? [23] 매 : 닉을 인간으로 지을 수 있었다는 건 처음부터 순위권이었다는 이야기인데. [29] 초심 : ……저걸 어떻게 이겨.또 일부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1위의 지역 조건에 관심을 보였다.
대개 거래 장소는 본인의 위치에서 도보로 2시간 이내 거리로 정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위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래 지역을 넓게 잡았다.
[43] 청해 : 서울 및 경기 일대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16] 아둔 :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서울과 경기권이면 어디든 가능하다는 이야기겠죠. [43] 청해 : 그게 가능한가요……? [13] 악몽 : 누가 압니까? 1위는 날아다닐 수 있을지.이 와중에 10위권들은 꽤 시니컬했다. 명확히 갈리는 순위별 온도 차.
사실 1위가 날아다닐 수 있을지 모른단 말이 완전 틀린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어쨌든 한 자릿수 번호를 단 닉네임을 보기도 어려운 마당에 난데없는 1위의 등장은 채널을 아주 뜨겁게 달궜다.
최강자의 등장도 등장이지만 더 흥미로운 건 이 존재가 가나안을 이용한 물물 교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
[9] 검 : 하, 순위 제한이 없다고 하네. 저기 가는 사람은 거래 대금으로 뭘 받아야 할지 고민할 게 아니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겁니다. [36] 흑목애 : 엇…….1위가 뜨자 여태 조용히 숨어 있던 한 자릿수 구원자들마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20] 청라가드 : 1위면 사실 교차 검증이 필요 없겠네요. 누가 와도 커버가 가능할 테고 본인도 순위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했으니…….청라가드의 이 진단은 아주 정확했다.
채널에선 그저 각자의 감상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실제 가나안에선 정우를 향한 온갖 쪽지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웅, 웅, 웅, 웅, 우우웅!
휴대폰이 쉬지 않고 진동하는 탓에 정우는 알림 설정을 무음으로 바꿔 버렸다.
“반응이 엄청나군요.”
정우의 부름을 받고 와 있던 용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휴대폰을 바라봤다.
지금 두 사람은 헬기를 세워 둔 병동 옥상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동훈은 다른 의사들과 함께 백동우에 대한 연명 조치를 하기로 했고, 정우가 자리를 비운 동안은 이예나와 정한일이 병원을 지키기로 정해졌다.
즉, 이번엔 용헌과 정우 두 사람만 움직이는 것이다.
“만나자는 이야긴 좀 있나요?”
용헌의 물음에 정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인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날아든 쪽지 중에 쓸모 있는 거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jhk04_ 혹시 지금 계신 지역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이런 건 이쪽과 마주치지 않기 위함일 테고.
monkey99_ 정말 날아다닐 수 있습니까?
winghm0312_ 정수를 몇 개 가지고 계신가요?
wolf_ 성역 위치 좀 알려 주십시오. 제발…….
대개는 이렇게 개인적인 질문이나 부탁을 해 왔다.
“…….”
정우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쭉쭉 밀어내며 그새 백여 통이나 쌓인 쪽지를 빠르게 훑었다.
어떤 놈은 이걸로 채팅을 하고 싶은 건지 계속해서 쪽지를 보내왔는데, 다행히 차단 기능이 있어서 더는 번거롭지 않게 됐다.
그러다 마침내.
“어?”
정우가 짤막한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멈췄다.
방금 도착한 새 쪽지가 그의 시선을 잡아끈 탓이었다.
white_ 만약 거래를 한다면, 저희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습니까?
‘이 녀석, 진짜다.’
정우는 직감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저희’라는 표현을 쓴 것도 그렇고 안전을 먼저 우려하는 것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억지로 이쪽의 전력을 낮출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mortal_ 안전이 보장된다는 걸 확인시켜 줄 방법은 없습니다. 그쪽의 사정도 급하길 바라는 수밖에.
목숨을 걸며 1위와 대면할 정도로 말이다.
곧장 답변을 보내자 잠시 후 쪽지가 도착했다.
white_ 그쪽이야말로 상당히 급한 문제가 생겼나 보군요. 부상자가 발생한 겁니까?
“…….”
정우는 이쯤에서 멈칫했다. 만에 하나 상대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 이 대화는 일방적인 정보 노출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부상자 여부를 알리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대화가 계속되면 이쪽에 이동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제길.’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는 일단 한 단계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mortal_ 예, 중요한 사람이 중태에 빠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사를 보유 중이십니까?
white_ 다 있습니다. 저희를 만나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
정우의 표정이 또 한 번 흔들린다.
용헌도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걸 보고서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덜컥.
이윽고 용헌이 옥상 출입구를 열었고, 세찬 바람이 층계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 비행 준비하겠습니다.”
“예.”
정우는 용헌을 헬기 쪽으로 보내놓고서 ‘white’에게 쪽지를 보냈다.
mortal_ 좋습니다. 거래 장소와 그쪽이 원하는 걸 이야기하면 바로 출발하죠.
그러자 상대가 의외의 답을 내놨다.
white_ 수원 월드컵 경기장으로 오십시오. 원하는 건 이곳에 도착하신 뒤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원……?”
정우의 혼잣말에 기체를 점검 중이던 용헌이 빠르게 부연했다.
“수원이면 15분 이내에 갈 수 있습니다.”
이에 정우가 용헌에게 다가가 상대에게 받은 쪽지를 내밀었다. 조종사도 전후 상황을 알 자격이 있었으니까.
“도착하면 조건을 말하겠다니……. 1위 구원자가 필요하단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군요. 보통 대담한 게 아닌데.”
용헌이 다소 꺼림칙하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처음엔 헬기를 노리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큰 도박이죠.”
정우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쪽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애초에 상대는 이쪽이 뭘 타고 다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막말로 정말 비행이 가능하다거나 공간이동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해도 믿을지 모른다. 이쪽은 그 누구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존재니까.
‘뒤통수를 치겠다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만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럴 이유가 없어.’
차라리 뒤통수면 낫다.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되니까.
오히려 정우 입장에서 최악의 경우는 ‘낚시’였다. 수원에 가 봤더니 아무것도 없는 경우.
“그럼 왕복 30분 정도 걸리는 겁니까?”
정우가 이렇게 묻는 사이 용헌은 이미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예. 착륙까지 한다면 30분 정도 잡아야 넉넉하고, 상공에서 바로 복귀한다면 25분쯤 걸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정우는 마음을 정했다.
최대 30분이 소요된다면 수원에서 허탕을 친다 해도 두어 번의 기회가 더 있는 것이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쪽지가 계속 쌓이지 않겠는가.
mortal_ 출발합니다. 15분 뒤에 도착할 겁니다.
정우는 이렇게 답신을 보내고서 바로 헬기에 탑승했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이라고 합니다. 혹시 가 보신 적 있습니까?”
이 말에 용헌이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어……? 근처에 아주대 병원이 있지 않나요?”
* * *
오후 1시 3분.
수원시 외곽 상공.
헬기는 광교 저수지를 지나고 있었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우는 문득 성역을 떠올렸다.
언젠간 성역에도 가뭄이 오고 또 언제는 홍수 같은 것이 날지도 모르는데 이런 것에 대한 대처가 가능할까 싶어서였다.
물론 보통 인물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니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내긴 하겠다만…….
|현재 17/40 개체를 탑승자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그새 다섯이나 늘었네.’
방주 현황을 띄워 올리자 새 탑승자가 생겨난 것이 눈에 띄었다. 성역에 사람이 몰려들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병동의 진입로 덕분에 방주 좌석이 40개까지 늘어났지만 사실 빈자리가 많은 상태는 아니었다.
강남 세브란스에 남아 있는 의사들과 일부 각성자를 태운다고 치면 실질적으로 현재 가용한 좌석은 열 몇 개라고 봐야 할 것이다.
“혹시 진입로 같은 것이 보이거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온 김에 보이는 건 다 폐쇄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우의 요청에 용헌은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사실 아까부터 진입로를 계속 찾고 있었는데…… 하나도 보이질 않더군요. 물론 운이 좋은 지역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젠 잘 알았다. 진입로는 정수가 많이 모인 지역에 발생한다는 점 말이다.
더군다나 수원의 인구는 남양주의 두 배가량 된다. 따라서 남양주에도 발생했던 진입로가 수원에 없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두두두두…….
헬기는 계속해서 비행했다.
곧 저수지가 자그마한 웅덩이처럼 보이게 됐고, 대신 저 멀리 보이던 시가지가 제법 가깝게 다가왔다.
“저기 파라솔처럼 생긴 건물 보이십니까? 저게 월드컵 경기장입니다.”
“그런데 안쪽에 까만 건 뭡니까? 그림자는 아닌 것 같은데.”
용헌을 따라 경기장을 바라보던 정우가 무심코 물었다.
이에 용헌이 이마를 찡그리며 경기장 안쪽을 유심히 봤다.
“어…….”
정우의 말대로 결코 그림자는 아니었다. 관중석의 가림막을 최대로 펼쳐도 경기장 안쪽까지 그림자가 지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자 정우가 자문자답을 했다.
“사람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사람이요?”
슥.
경기장 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용헌의 고개.
저 넓은 구조물 내부를 가득 채운 저것들이 전부 사람이라면…….
“아니, 저게 다 사람이라고요? 전부?”
용헌이 황당하단 목소리로 되묻는다.
하지만 그새 헬기와 경기장 간의 거리도 상당히 가까워져서 용헌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수천 명의 사람이 경기장 안에 모여 있었다.
팔자 좋게 축구 경기나 보고 있는 건 아니었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기도 일종의 정착지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막 같은 것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으니까.
다만 어떤 천막은 붉은색, 또 어떤 건 흰색, 푸른색인 것도 있었다. 되는 대로 천을 가져왔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천막들이 색깔별로 모여 있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헬기의 소음이 경기장 안쪽까지 닿았는지 새까맣게 몰려 있던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들이 서둘러 천막 밑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경기장 끄트머리에서 신호탄이 쏘아져 올라왔는데, 용헌의 판단에 저건 착륙지 안내였다.
“저곳에 착륙하라는 것 같습니다. 안내에 따를까요?”
“예.”
스아앗.
혹시 모를 요격에 대비해 정우가 보호막을 전개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이 상황에서 목을 내놓고 있는 건 수원 경기장 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