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붉은 가운(3)
* * *
두두두두…….
헬기가 착륙을 시도하자 근처에 세워져 있던 천막 일부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
용헌이 미안하다는 듯 바깥을 쳐다본 반면 정우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이곳의 관리자가 썩 똑똑하진 않은 것 같군요. 착륙지를 미리 정해 놓고도 저런 꼴을 당하다니.”
둘 중 하나 정도는 미리 조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착륙지 일대의 천막을 미리 철거하거나 풍압에 쓰러지지 않도록 더 단단히 고정시키거나.
스륵.
이윽고 쓰러진 천막 끄트머리가 꾸물거리는가 싶더니 그 밑에서부터 사람들이 기어 나왔다.
식사 중이었는지 각자 손에 밥풀이 비쳐 보이는 비닐 봉투나 쇠그릇 따위를 든 채였다.
꼬르륵.
때맞춰 소리를 내는 용헌의 위장.
“…….”
그러고 보니 벌써 오후 1시가 지나지 않았는가.
텅.
헬기의 스키드가 잔디 위에 내려앉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곧 한 무리의 사내가 헬기 앞쪽으로 도열했다.
“전투원들은 아니군요.”
창밖을 내다본 정우가 짧게 이야기하고선 헬기 출입문을 젖혔다.
드르륵!
정우를 마중 나온 사내들의 평균 정수량은 일곱 개 수준. 몇몇은 살인 경험이 있어 보였지만 대다수가 ‘순정’ 상태였다.
척.
정우가 잔디밭에 발을 딛자 사내들이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용케 뒤로 물러서진 않았다.
“어……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께서는 저 안에 계십니다. 먼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최선두에 서 있던 자가 저 멀리 보이는 흰색 천막을 가리켰다.
이에 정우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날 불러 놓고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고?’
예의가 없어 괘씸하다는 게 아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무려 1위 구원자를 불러들이지 않았는가? 점심 식사로 정수를 거하게 대접하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얼른 나와서 꼬리라도 흔드는 게 정상일 텐데…….
“뭐죠? 겁도 안 나나.”
용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
평소의 정우였다면 일단 천막 하나를 날리는 것으로 상대를 불러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정우도 상대에게 받아 낼 것이 있는 입장. 게다가 쪽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백동우의 수술을 집도해 줄 의사가 있는 거 아닌가? 차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설마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겠지. 지능캐는 사양하고 싶은데.’
정우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사내들을 향해 앞장서란 손짓을 했다.
저벅, 저벅.
얌전히 안내원들의 뒤를 따르는 동안 두 사람은 경기장 전경을 훑어봤다.
아까 상공에서 봤듯이 수십 개의 대형 천막이 사방에 드리워진 채였고, 그 밑엔 민간인들이 잔뜩 모여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푸른 천막은 숙소, 붉은 천막은 배급소, 흰 천막은 병실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눈대중으로 봐도 이곳에 모인 민간인이 4천 명은 족히 될 듯.
심지어 ‘대표’가 있다는 천막까지 가는 동안 의사로 보이는 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도 서너 차례 보게 됐다.
“세브란스의 확장판인 것 같습니다.”
용헌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고, 정우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깁니다. 들어가시죠.”
드디어 백색 천막 앞에 도착한 안내원들이 가림막을 걷어 내며 길을 열었다.
이에 정우가 보호막을 확장시켜 용헌을 덮었다.
그러나 안쪽에서 튀어나온 것은 일반적인 보호막으론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극심한 악취가 풍겨 나왔으니까.
땀과 오줌 등의 분비물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결과였다.
천막 안에 온갖 종류의 병자들이 줄지어 누워 있던 것이다.
“으.”
대번에 용헌이 코를 막았고, 정우도 광대를 일그러뜨리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실내 맞은편에서부터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일찍 오셨군요.”
분홍색 의사 가운을 걸친 사내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객을 반겼다.
다시 보니 가운이 본래 분홍색은 아니었던 듯 살짝 들어 보인 팔의 소매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즉, 피에 잔뜩 절었던 가운을 다시 빨아서 입은 탓에 분홍빛을 띠게 된 거다.
‘사람을 죽이느라 피를 뒤집어쓴 게 아닐까? 톱을 들고 수술한 게 아닌 이상 저렇게까지 피가 튀진 않을 것 같은데.’
정우는 사내가 환자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참 어색하단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434,254.’
놈은 무려 43만 개짜리 각성자…… 아니,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이놈을 죽이면 정수 총량이 백만 개 후반까지 치솟을 텐데.’
정우는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밀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저자를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이 근처엔 진입로가 없어. 이놈이 전부 닫았다고 봐야 한다. 폐쇄 권능 확보에 성공한 녀석을 처음 만나는 거라고.’
더군다나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거래’를 하기로 약속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백동우의 수술 건이 박살 날 것은 둘째치고 저 사내를 죽이면 여태 자신을 지탱해 오던 어떤 것도 함께 죽으리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
한편 정우가 내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용헌과 이 공동체를 꾸리고 있는 ‘대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구원자를 감싼 다면체 보호막이 훨씬 더 잘게 쪼개졌다가 복원되길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엄청나군요…….”
정우의 정수량을 확인한 분홍빛 가운의 사내가 입을 슬쩍 벌렸다.
1,360,385.
단위부터가 다른 1위 구원자의 정수량.
이 방문객에게 단순히 힘으로 맞서려는 건 정말 미련한 짓이리라.
슥.
사내는 양팔을 천천히 들면서 정우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때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기회가 더 없을 수도 있으니 먼저 인사드리지요. 아주대 병원의 흉부외과 전문의 장석표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이곳의 유일한 외과의이기도 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라는 듯 장석표가 눈빛으로 호소했다.
* * *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유일한 회색 천막.
정우와 용헌은 장석표를 따라 이리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게.”
장석표의 요청에 천막 안에서 식사하고 있던 의사들이 그릇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워낙 바쁘다 보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테이블 위를 치우는 장석표의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의원이었다.
대체 이런 인물이 어떻게 수십만 개의 정수를 모으게 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테이블 위엔 의사들이 식사하며 살펴보던 진료 차트가 잔뜩 쌓여 있었고, 정우는 이것만 봐도 이곳의 의료 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앉으시지요.”
끼릭.
석표가 자신이 앉을 간이의자를 펼치며 다른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
이에 정우가 먼저 상대의 맞은편에 앉았고, 용헌이 바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괜찮으시다면 간단히 뭐라도…….”
“그럴 시간까진 없습니다.”
정우는 상대가 형식적으로 해 온 말인 줄 알고 대번에 잘라 냈으나 석표는 진지했던 것 같았다.
“저는 일단 뭐라도 먹어야겠습니다. 수술 도중에 기력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
“실장님, 계십니까? 식사 좀 부탁드립니다.”
석표의 주문에 천막 바깥에서부터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더니 알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드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동식 선반에 식사가 담겨서 들어왔다.
멀건 흰죽에 소량의 김치, 연두부 한 모. 포장을 뜯지 않은 소시지는 외부인인 정우와 용헌을 위해 올려 둔 걸로 보였다.
덜거덕.
수저가 그릇과 마찰하며 아주 익숙한 소리를 낸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소리인 것 같아 정우와 용헌 모두 귓속이 찌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몇 위입니까?”
마침내 시작된 정우의 질문.
이에 석표가 젓가락으로 두부를 쪼개면서 이야기했다.
“4위입니다. 방주 좌석은 20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방주를 더 확장하려면 이 지역을 떠나야겠더군요.”
장석표, 52세.
채널 닉네임은 ‘광명’. 현재 구원자 4위.
앞머리가 벌써 희끗해지기 시작한 이 사내는 자신보다 압도적인 괴물 앞에서 잘도 음식을 삼켰다.
실은 본인도 잘 알 것이다. 밥상에 함께 앉은 상대방이 이곳의 모두를 죽이려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그럼에도 왜 굳이 이런 모험을 감행한 걸까?
“저 많은 사람은 다 뭡니까? 날 이곳에 부른 이유는 뭐고.”
정우가 본인의 앞에 놓인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묻자 석표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구원자께서는 얼마나 되는 사람을 데리고 계십니까?”
“아직 30명이 안 됩니다. 방주에 태울 만한 자만 걸러 내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석표의 시선이 다시 멀건 죽에 닿았다.
그러자 정우가 천막 바깥을 힐끗 보더니 질문을 바꿨다.
“안 된다는 걸 깨달았군요. 수천 명씩 되는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거.”
“…….”
역시 석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자코 대화를 엿듣던 용헌도 슬슬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열의만으론 어쩔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구나.’
수천의 인간이 매일 필요로 하는 음식, 그리고 이들에게 입힐 피복.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저것만 해결된다고 해서 끝인가?
괴물과 각성자를 포함한 외부 침입자에게서 이 공동체를 지켜야 하고, 내부 분열도 막아야 할 것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본 바로는 병자도 수백에 달했다. 이들의 연명을 위해 다수가 직간접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으리란 건 자명한 사실. 과연 분쟁이 없었을까?
“불가능하진 않지만…… 결코 쉽지도 않은 일이지요. 일단 저희는 앞으로 2일 이내에 거주지를 옮겨야 합니다.”
결국 석표가 속마음을 실토했다.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식량 수급이었다. 더는 일대 상가 지구에 먹을 것이 남지 않게 된 거다.
지구 폐쇄 1일 차에 전국적인 상가 약탈이 벌어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이 때문에 사실 다른 지역으로 가도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다른 이들이 전부 털어 갔을 테니까.
“그러니 이주를 한다고 해도 그곳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공동체를 약탈해야겠지요.”
석표가 흰 죽을 한 술 떠서 입에 들이붓는다. 식사를 한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래서, 제게 해결법을 자문하는 겁니까?”
정우가 상대의 말을 받자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니요, 나름대로 고민은 충분히 했습니다. 1위라고 해서 식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 어쩌자는 거죠? 난 여기 의사를 구하러 온 겁니다. 쓸데없는 하소연이나 할 거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니면 이곳에서 강제로 골라가는 방법도 있겠지.”
정우가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갑자기 석표가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정우의 팔을 붙들었다.
“……!”
깜짝 놀란 정우가 눈을 파랗게 빛냈지만 석표는 보호막조차 감지 않고 있었다.
“환자분 집도는 제가 직접 할 겁니다. 그러니…….”
이에 정우는 조용히 다음 대사를 기다렸고, 곧 석표의 입이 들썩였다.
“이 자리에서 저희 인구를 줄여 주십시오. 붉은 천막만 남겨 두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