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방문자들(5)
드르륵, 드그극.
인력거…… 아니, 범력거라고 해야 할까.
정수가 비활성화되자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수레에 실린 300킬로그램짜리 짐승 때문이었다.
“아우.”
민구는 끝내 수레 손잡이를 놔 버렸다.
끼익.
철제 프레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고, 민구를 따라 함께 걷던 나머지 일행도 걸음을 멈췄다.
노량진에서 만난 첫 민간인, 한정혜.
외과의 최성재.
구세군 목사의 아들 김세준.
민구를 포함해 총 4인에 짐승 하나. 누가 봐도 기이한 조합이었다.
그러니 성역의 주민이 이들을 경계한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철컥!
난데없는 장전음에 민구 일행이 고개를 들었고, 곧 이들의 시야에 일렬로 선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뭐, 뭡니까 당신들? 저건 또 뭐고…….”
한 사내가 수레에 실린 호랑이를 향해 총구를 겨누자, 민구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노기를 흘렸다.
그러나 그의 정수는 잿불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식어 있었다.
지구가 나눠 준 이 힘을 사용할 수 없다면 민구는 그저 60대 남성에 불과했다.
“아드님이 말한 곳이 여기가 아닌가요? 이게 어떻게 된…….”
사방에서 총구가 위협적으로 들썩이자 정혜가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성이 총구를 헤치며 걸어 나왔다.
“아버님……? 설마 아버님이십니까?”
키가 제법 큰 셔츠 차림의 사내.
이 자리에서 아버님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민구 하나뿐이었으므로 장내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누구…….”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민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위에 포식자란 문구도 없고, 그새 인상이 너무 변해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던 거다. 이목구비를 자세히 뜯어보니 언젠가 아들과 함께 행운동에 온 적이 있던 사내였다.
“아. 우리 구면이지요.”
민구의 말에 장신의 사내도 비로소 확신한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서 뵙게 되다니…….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선웅이라고 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박민구입니다.”
민구가 거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행운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선웅의 반응은 그때와 많이 달랐다. 이번만큼은 망설임 없이 상대의 손을 맞잡았으니까.
탁.
두 손이 포개지자 민구가 턱을 실룩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생이 많았군요.”
악수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이 완전 달라져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선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고생은 아드님께서 다 하고 있습니다. 일단 안쪽으로 드시죠. 나눠야 할 대화가 좀 많을 것 같습니다.”
이제 선웅의 시선은 민구가 데려온 기묘한 그룹에 닿아 있었다.
* * *
오후 2시 15분.
민구 일행은 임시로 세워진 천막 밑에서 식사를 했다.
물론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성역 주민들에게 둘러싸인 채 말이다.
“그래서 의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겁니까?”
민구가 소시지 포장을 우악스럽게 뜯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에 온 첫 번째 이유는 다름 아닌 냄새의 수술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서울 중부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냄새의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악화됐다.
덕분에 지금은 제대로 걷는 것조차 어렵게 돼서 수레에 태워야 했을 정도.
사실 수레를 끄는 것도 민구가 수준급 각성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인이 무슨 재주로 호랑이와 짐이 실린 수레를 끌고서 서울을 가로지르겠는가.
“죄송합니다. 약품이나 의료 도구 같은 건 제법 있지만…….”
선웅은 정말 죄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재차 숙였다.
현재 성역에서 유일한 의사는 정우가 대동한 상태고, 외부자 중에서 의사 출신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군요. 좀 버겁더라도 혼자 하셔야겠습니다. 손이 필요하면 빌려 드리리다.”
민구는 착잡한 표정으로 최성재에게 수술을 부탁했다.
“예. 기본적인 물품만 있으면… 일단 지금보단 훨씬 나은 처치를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성재가 천막 뒤편에 널브러진 냄새를 흘깃 보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민구의 말에 따르면 저 호랑이는 구원자였다.
“…….”
다들 무거운 침을 삼키며 은근히 긴장하는 사이, 명일이 선웅에게 조심스레 속삭였다.
“두 사람… 아니, 저 아버님과 호랑이 모두 엄청납니다.”
“엄청나다니요?”
선웅은 명일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으면서도 짐짓 되물었다.
이에 명일이 눈꼬리를 위로 바짝 들며 더욱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11만 개, 그리고 21만 개입니다.”
박민구의 정수 총량, 112,403개.
냄새의 정수 총량, 214,751개.
저 두 존재의 정수 합만 30만 개가 넘는 것이다.
‘험난한 여정을 해 오셨군…….’
선웅은 복잡한 눈빛으로 민구를 바라봤다.
물론 성역의 주인인 박정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정우도 어제까진 20만 개 수준의 구원자였다.
게다가.
‘30만 개면 내가 정우 씨에게 청구하는 정수량과 맞먹어.’
즉, 저 정도 화력이면 수색조를 구리시까지도 충분히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민구가 이곳의 위치를 정우에게 직접 들었다고 하니 수색조를 도와 달라는 요청을 무시하지도 않을 테고.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선웅 씨, 잠시 대화 좀 하시죠.”
뒤편으로 슬쩍 빠져나간 중성이 선웅을 긴히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웅이 다소 불안한 기색을 띠며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중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두 사람은 방주에 태울 수 없습니다.”
전직 차관보, 중성이 가리킨 ‘두 사람’은 한정혜와 김세준이었다.
* * *
한편 ‘회랑’에 들어간 정우는 왜소한 몸집의 실루엣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구멍 너머, 저 멀리 떨어진 맞은편 회랑에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존재.
처음엔 설마 어린아이인가 싶었으나, 계속 보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저건…….’
정우는 금방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실루엣의 정체는 침팬지였다.
이 회랑에 들어왔다는 건 상당량의 정수를 가졌다는 의미일 텐데, 고릴라나 사자 따위를 다 제치고 침팬지가 정상에 올라섰단 말인가?
어쨌든 이로써 더욱 확실해졌다.
‘여긴 세계 단위의 모임이구나.’
다시 말해, 이쪽과 엇비슷하거나 더 강한 존재가 국외에 적어도 스무 개체 이상 있다는 뜻인 것이다.
‘북의 1위도 분명 여기 있겠군.’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론 상대의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회랑의 서쪽에도 인간이 아닌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 녀석은 네발짐승이었다. 덩치를 보니 사자 정도일 듯하다.
‘그럼 각국의 강자들이 이렇게 모여서 뭘 하는 거지? 그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대기실 같은 느낌인 건가?’
이곳에선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다른 구원자와 대화를 하는 게 불가능했다.
각국의 구원자 채널과는 용도가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의미 아닐까?
정우가 다소 초조한 마음으로 회랑 중앙의 깊은 구멍을 보고 있자, 드디어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우우웅…….
구멍 안쪽에서부터 푸르스름한 빛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구체가 떠오른 것이다.
영락없는 정수 구체.
다만 그 크기가 사람 수백 명 정도는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미동도 않고 있던 다른 실루엣들이 꿈틀거렸다. 마치 이 현상을 보기 위해 잠시 접속한 것처럼 말이다.
‘……?’
아직 신입에 불과한 정우는 잠자코 눈앞의 기현상을 바라봤다.
곧 정체불명의 구체가 실루엣들의 머리 위치까지 떠올랐고, 이때 갑자기 공간 자체의 느낌이 바뀌었다. 무슨 필터가 걷혀진 것처럼.
사앗.
장내가 시끌벅적해진 것도 이때였다.
* 생존권을. 보장해. 순환이. 되지. 않아.
* 물이. 필요해.
이 소리들은 명백한 짐승 구원자들의 것이었고.
“패스파인더 기능은 더 개선할 수 없습니까?”
“진입로가 너무 많아요. 이대론 제시간에 전부 닫을 수 없을 겁니다.”
“일정 시간 동안 살인을 금지할 방법은 없습니까?”
이건 인간 구원자들의 목소리였다.
이 시간만 기다렸다는 듯이 의견과 불만, 요청 사항을 마구 쏟아 내는 구원자들.
지금 보니 이 공간은 행성 구원자들의 성토를 모아 듣기 위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조금 바꿔 말하면…….
‘맙소사.’
정우의 시선이 허공에 홀로 떠 있는 커다란 구체에 닿는다.
이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게 누구겠는가.
지금 정우는 ‘지구’ 앞에 서 있었다.
* * *
오후 2시 33분.
파주의 동화경모공원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어느 지점.
헬기를 정비 중이던 용헌이 고개를 돌렸다.
기내의 동훈도 머리를 틀어 창밖을 바라봤다.
스아아아앗!
시퍼런 빛 덩어리. 박정우가 엄청난 속도로 복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오시네요.”
용헌의 목소리가 밝다.
일단 자신의 구원자가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를 한 것이 첫째 이유.
둘째 이유는 구원자의 팔다리가 멀쩡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또한 시간상 북의 1위를 불러낸 것 같지도 않으니…….
‘도박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셨군.’
다만 조금 불안한 감은 있었다. 박정우가 몹시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이 확 왔기 때문이다.
당장 무엇에 쫓기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대체 뭘까.
용헌이 생각 많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자, 동훈이 헬기 문을 젖히며 비슷한 감상을 내뱉었다.
“뭐죠? 좀 급해 보이시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 정우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헬기 앞에 정지했다.
쏴아아악!
“윽.”
용헌과 동훈이 급히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데도 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먼저 했다.
“당장 이륙 준비해요.”
이에 용헌이 실눈을 뜬 채 조종석 문간을 더듬거렸고, 동훈도 잽싸게 기내로 몸을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용헌이 조종석에 앉은 채 뒤를 돌아보며 묻자, 정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느려요.”
“……?”
맥락 없는 말에 용헌과 동훈 모두 아리송한 얼굴이었고, 이를 본 정우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일을 너무 쉬엄쉬엄했던 것 같습니다. 더 죽이고, 더 닫아야 해요. 지금 우린 정말 뒤쳐졌습니다.”
여전히 맥을 짚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어느 정도 의미 파악은 할 수 있었다.
앞으론 지금보다 더 인간성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이리라.
“…….”
잠시 기내에 정적이 감돌았으나, 정우가 목적지를 정해 주지 않은 탓에 용헌이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바로 이륙하겠습니다.”
용헌의 보고와 함께 헬기가 천천히 떠올랐고, 정우는 바깥 풍경이 바뀌는 걸 보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선 인터넷은커녕 통화 신호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인터넷이 되는 곳으로 갑시다. 가장 가까운 데면 좋겠군요.”
정우가 이렇게 말하자 용헌이 조수석에 펼쳐 둔 지도를 흘깃 봤다.
“예. 후보지가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슬쩍 질문을 던졌다.
“가나안을 다시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이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 불러야겠습니다. 진척도를 빠르게 올리지 못하면 이 나라에 변수가 많이 생길 겁니다.”
진척도? 변수?
그 짧은 사이에 어디서 무슨 이야길 듣고 온 걸까?
용헌과 동훈은 정우가 지금도 자신들과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창밖을 바라보던 정우가 갑자기 짧게 침음한다.
“……?”
동훈이 정우를 바라봤으나 그로선 구원자에게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리자의 정수 청구 내용은 담당 구원자에게만 공개되는 정보였으니까.
이제 정우의 시선은 창가를 떠나 전방의 허공에 붙어 있었다.
「귀하의 대리자가 44개의 정수를 1분간 차용하길 요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