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파동(2)
* * *
“으아아아!”
세준마저 사라지는 걸 본 민구는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64세의 노쇠한 신체론 자신을 붙든 두 사내를 떨쳐 낼 수 없었다.
‘……제기랄.’
성호는 이를 꽉 물며 근육질의 팔로 민구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그저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반면 성호와 함께 민구를 붙잡고 있던 선웅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맙소사. 끝내 모든 걸 내려놔 버렸구나.’
선웅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있는 정우를 멍하니 바라봤다.
성역의 바탕이 된 규칙.
그리고 정우 본인이 학살을 시작하며 세웠던 나름의 원칙.
최대한 공평하려고 노력 중이라던 그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나뿐인 아버지마저 원칙 앞에 세울 정도로…….’
선웅은 이제 박정우를 어떤 생물로 분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의 범주는 벗어났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능력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내적인 면까지 말이다.
슥.
이윽고 정우가 두 사내에게 붙들린 자신의 아버지에게 시선을 줬다.
“방금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특별한가요? 아녜요, 아버지에게만 의미가 있는 거죠. 우리에겐 이미 수없이 죽여 왔고, 앞으로도 죽여야 할 사람 중 일부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더니 민구를 지나쳐 헬기로 향하며 나지막하게 말을 흘렸다.
“아버지가 무심히 죽였던 어떤 사람도 누군가에겐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겠죠. 제가 죽인 사람들도 그렇고. 그래서 전 죽음을 차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현명하게 선택하세요.”
정우는 이 말을 끝으로 용헌과 동훈을 대동하고서 헬기에 올라탔다.
성역의 그 누구에게도 전언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
투두두두…….
구원자를 태운 헬기가 다시 날갯짓을 시작했고, 성역의 모두는 넋이 나간 얼굴로 백색 기체가 떠오르는 걸 지켜봤다.
‘책임감 있는 미치광이.’
중성은 감탄에 가까운 마음으로 자신이 방금 본 것들을 되새김질했다.
선웅과 달리 그는 박정우가 그 누구보다도 인간답다고 생각했다.
도덕, 의리 같은 것만이 인간성인가? 주어진 환경에 맞춰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인간의 특질 중 하나다. 괴사가 시작된 다리의 절단을 결정하는 등의 행위 말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요.”
“아무 말씀도 없이 가 버리셨네.”
서서히 어수선해지는 성역의 분위기.
이에 중성이 박민구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호랑이의 치료가 끝날 때까진 수색조 임무를 도와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호랑이가 회복을 마치게 되면…….”
아무리 중성이 냉철하다고 해도 정우에 비할 순 없었다. 끝내 목이 살짝 메었고, 이를 듣던 민구가 중성의 대사를 마저 읊어 줬다.
“……알겠소. 그때까지도 내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면, 죽여 주시오.”
그러자 장내 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누군가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다름 아닌 최성재였다.
민구가 노량진에서 구출한 외과의이자 현재 성역의 유일한 의사.
“예, 말씀하시죠.”
“그게…….”
중성이 발언권을 주기 무섭게 성재의 표정이 비굴하게 변했다.
“제 목숨은 별개인 거지요? 전 무조건 여기 남고 싶습니다.”
“…….”
* * *
비슷한 시각, 남양주 외곽.
용헌은 가능한 빠른 속도로 성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정우를 배려해서라기보다는 본인부터가 성역에 남아 있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용헌은 조종간을 붙든 자신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느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일컬어 ‘천륜’이라 하지 않던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부모와 척을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용헌이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정우에게 물었다. 이때만큼은 인생의 선배로서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우는 일찍이 생각을 정리한 상태였다.
“누군가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구원자일 수는 없어요. 그럼 뭘 택해야 합니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겠죠.”
“…….”
정우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제가 보기에 이 나라에서 저보다 더 뛰어난 구원자는 아직 없습니다. 여태 2위가 추월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즉, 제가 하는 게 성공률이 가장 높다는 겁니다.”
구원자가 되면 이 나라에서만 최소 수백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정우는 용헌이 말한 ‘천륜’을 지키는 것보다 구원자로서 존재하는 게 더 옳다고 생각한 거다.
“천륜에 대한 예우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이미 다른 외부자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할당받았어요.”
여기까지 이르자 용헌도 더는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래도 아버님이 성역에 남길 바라고 계시지요?”
“…….”
정우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그는 1일 차 행운동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줬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각자 재주껏 살다가 재주껏 죽자던 그 이야기 말이다.
세상이 박살 나고 있으니 서로 험한 꼴 보기 전에 찢어지자는 의미였다.
‘결국 아버지가 옳았군.’
정우는 휴대폰의 까만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가나안에 접속해야 합니다. 신호가 살아 있는 지역을 찾아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정우의 주문에 용헌이 기수를 살짝 틀었다.
“구원자를 다 불러 모으겠다고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건 동훈의 질문.
이에 정우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보고 있는 건 ‘최초의 채널’이었다.
1위부터 50위까지, 이 나라에 흩뿌려진 정수를 악착같이 모아 온 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
구원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잠시 구경하던 정우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오늘 제가 지정한 장소로 도착하는 구원자들을 다 죽일 겁니다. 최대한 빠르게 정수를 쌓고, 이방인들과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가 먼저 넘어가거나.”
“이방인이라 하시면……?”
동훈이 되묻자 정우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뱉었다.
“일부 지역은 벌써 정리가 다 되어 가고 있어요. 조만간 자신의 기본 임무를 마친 각국의 최강자들이 ‘약소국’을 방문하기 시작할 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은 진입로를 닫기 위함이지만…….”
과연 그들이 정말 진입로만 닫을까?
정우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27] 구패 : 진심인가? [13] 악몽 : ……. [43] 청해 : 무슨 의도죠? 함정? [33] 기사도 : 일행 숫자까지 적으라고 하는 걸 보니…… 단순히 함정 같지는 않은데요. [20] 청라가드 : 어차피 서울 근처가 아니면 제시간에 도착하지도 못하겠네요. [36] 흑목애 : 저걸 뒤집어 보면 서울 어딘가에 1위가 머물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오히려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야 할 타이밍인지도 모릅니다.오후 3시경.
최초의 채널이 다시 들썩였다.
1위 구원자가 올린 메시지 때문이었다.
[1] 인간 : 서울에 계신 구원자 다섯 분에게만 성역 위치를 공개하겠습니다. 반드시 성역으로 데려가야 하는 일행의 숫자를 적어서 쪽지 부탁드립니다. mortal.목숨 보장 여부 이전에 무려 1위가 직접 성역의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가족을 데리고 유랑 중이거나 장석표처럼 민간인 무리를 이끄는 구원자들에겐 어마어마한 제안이 될 터였다.
채널에 성역 위치가 직접 공개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오히려 신뢰도를 높였고 말이다.
적어도 성역으로 가는 길에 다른 구원자들에게 기습을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따라서 저 제안에 응한다면 각 구원자가 우려해야 할 것은 ‘정말 1위가 날 살려 줄 것인가?’라는 점 하나뿐이었다.
[14] 아둔 : 말이 다섯이지, 가나안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실제론 수십 명을 부른다 해도 우린 알 수 없죠. 함정일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9] 검 : 성역 위치를 전해 들은 사람이 여기에 불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13] 악몽 : 그야 그렇지만, 정말 저게 함정이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겠죠. 다 죽었을 테니.확실히 순위가 높은 구원자일수록 의심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폐쇄 권능에 근접한 자들인 만큼 순위권 구원자를 견제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7] 음양 : 당장 굶어 죽을 상황이 아니라면 가지 마십시오. 제가 폐쇄 권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순위권자가 다른 구원자들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없습니다.무려 7위마저 처음으로 채널에 모습을 드러내며 1위의 제안을 경계했다.
이에 채널의 여론이 확 기울기 시작했으나 정우조차 예상하지 못한 지원군이 나타나 균형을 바로잡았다.
[4] 광명 : 저는 현 1위를 직접 만나고도 여태 살아 있습니다. 목적의식이 확실한 사람이니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단순히 정수만 모으는 괴물은 아닙니다.구원자 4위, 광명. 본명은 장석표.
아주대의 외과의이자 지금쯤 강남 세브란스에서 백동우의 수술을 집도 중일 사내였다.
‘뭣……?’
채널을 주시하던 정우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지금 헬기가 착륙 중인 곳이 바로 강남 세브란스였기 때문이다.
벌써 수술이 끝났을 리는 없고…… 설마 집도 중에 채널을 본 걸까?
그건 또 그것대로 걱정이 됐다만, 어쨌든 석표가 이쪽에 엄청난 힘을 실어 준 건 확실했다.
게다가 그는 채널에 단 한마디의 거짓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불필요한 말을 삼갔을 뿐.
석표도 정우의 저 부름이 어떤 의미인지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챘을 거다.
퉁.
마침내 헬기가 병동 옥상에 완전히 내려앉았고, 동훈이 노파심 담긴 의견을 내놨다.
“다음번엔 언제 떠나실 겁니까? 이곳에서 수술이 끝나고 나면 세브란스 측 의사들을 옮길 방법도 생각해야 할 텐데요.”
병동 혈투에서 살아남은 의사 4인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현재 수술을 받고 있는 내과의 백동우가 끝내 사망한다면 3인방이 된다.
그러자 정우가 옥상 난간으로 걸어가더니 주변을 슥 둘러봤다.
“지금 수술실 인원은 대부분 아주대 소속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바로 우리 쪽 의사들을 이송하세요. 각성자도 붙여 주겠습니다. 고도에 신경을 좀 써서 비행한다면 요격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
정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동훈이 고개를 갸웃한다.
“같이 가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전 여기에 남아 있을 겁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성역에 의사들을 내려주고 다시 이리로 오세요.”
정우의 머릿속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차곡차곡 정돈되고 있었다.
당장 확정된 스케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백동우를 포함한 세브란스 측 의사들을 성역으로 후송할 것.
둘째, 수술을 마친 장석표와 그의 팀원들을 수원으로 돌려보낼 것.
다만 백동우의 생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으므로 현재 살아 있는 의사부터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데 굳이 여기 남아 계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의사들을 전부 후송한다면 더는 장석표 씨를 견제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백동우 씨야 이미 수술 중인 상태고.”
동훈은 이렇게 물으면서도 정우가 석표마저 정리하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우가 이곳에 남기로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니까요.”
“예?”
“구원자들을 여기로 불러 모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