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파동(3)
쇄도하는 메시지.
덕분에 정우의 휴대폰은 쉬지 않고 깜빡였다.
“엄청나군요.”
정우와 함께 옥상에서 대기 중이던 용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쪽지를 보내서 떠보는 정도는 아무 리스크가 없으니까 이러는 거겠죠.”
틱.
정우는 저장해 둔 메시지를 모든 문의자에게 일괄 송출했다.
성역에 관해 대화하고 싶다면 강남 세브란스로 오라고.
설령 접선지가 채널에 유출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실제 성역은 이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그런데 구원자를 다 죽여 버리면 앞으로 진입로를 닫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이미 순위권에 들었거나 순위권에 근접한 자들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겁니다. 잃을 게 너무 많고, 누군가의 밑에 있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용헌은 정우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으면서도 문장을 마저 맺지 못했다.
그래서 정우가 대신 이야기했다.
“상대적 약자들이 오겠죠. 본인 능력으론 더 이상 자기 사람들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다시 말해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찾아오는 중하위권 구원자들을 모조리 흡수하겠다는 거다.
“…….”
또다시 학살인 건가. 용헌은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정우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말을 덧붙였다.
“성역 위치를 공개하겠다는 건 진심입니다. 다만 구원자들을 그리로 보낼 순 없겠죠.”
“……아.”
구원자가 데려온 사람 중 필요한 인재가 있다면 그들만큼은 성역으로 보내 주겠단 의미였다. 성역에서 외부자들을 심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네. 구원자가 굳이 끌고 다닐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그 속엔 온갖 기술자가 섞여 있으리라.
용헌은 정우의 의도를 납득했으면서도 음울한 기분에 계속 빠져들었다.
‘자기 가족들을 위해 구원자가 된 사람도 있을 텐데.’
이런 경우 그 그룹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목숨만 내놓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끼익.
이윽고 옥상 출입문이 열리면서 동훈이 세브란스 측 의사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다들 큼지막한 짐을 품에 안고 있어서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급한 대로 수술 도구와 필수 약제들을 챙겨 왔습니다. 가능하면 기구도 몇 가지 옮기고 싶습니다만…… 일단 사람부터 옮겨야겠죠.”
동훈이 짤막하게 보고해 왔고,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후송 준비가 시작됐다.
헬기 안쪽으로 상자들을 쌓고 그 틈바구니로 의사들이 몸을 구겨 넣었다.
이어서는 헬기를 보호할 각성자, ‘흉터’ 정한일이 나타났다.
진입로로부터 세브란스를 지켜 온 4만 개짜리 각성자.
하지만 지금은 그 힘을 기구 옮기는 데 쓰느라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커다란 캐비닛 같은 걸 짊어지고 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이삿짐 센터 직원.
“저게 방금 말씀하신 기구인가요?”
정우가 나지막하게 물으니 동훈이 저것 말고도 옮겨야 할 게 많다고 일러 왔다.
“지금 보고 계신 건 혈액 냉장고입니다. 보존 가치가 더 높은 기구들도 많지만 사용 빈도가 높은 것부터 챙기는 게 맞겠지요.”
곧 동훈과 한일이 구조용 로프로 헬기와 냉장고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걸 본 정우는 잠시 계산해 봤다. 이곳에서부터 성역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정수로 뚫어낼 경우 얼마나 걸릴까, 하고.
‘못할 건 없지만 당장은 좀 무리겠네.’
병원에서 남양주까지의 도로상 거리는 대략 30킬로.
다른 일과를 제쳐 두고 길 뚫기에만 전념한다면 혼자서도 하루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단,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보안.
도로를 뚫어 놔도 각성자들의 약탈은 막을 수 없지 않은가?
서울 전체를 유령도시로 만들지 않는 이상 당장 구현하긴 어려운 계획이었다.
“저희는 준비 다 됐습니다. 바로 출발할까요?”
그사이 헬기에 몸을 반쯤 걸친 동훈이 정우를 향해 이륙 승인을 요청했다.
“예, 성역에 도착하거든 중성 씨에게 이 말을 좀 전해 주십시오. 이곳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뚫린다고 하면, 그걸 제대로 사용할 방법이 있겠느냐고.”
“……알겠습니다.”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던 동훈이 금세 표정을 다잡았다.
“가요.”
퉁, 하고 정우가 헬기 몸통을 두드리자 프로펠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오후 3시 14분.
정우는 병동 옥상에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몸은 하나뿐인데 해결해야 할 일은 첩첩산중.
강남 세브란스를 구원자들의 집결지로 설정한 것은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백동우의 수술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대략 두 시간.
정우는 그동안 이곳에서 구원자들을 상대할 계획이었다.
‘가급적이면 병동에 피해가 없어야 하니 깔끔하게 끝내야 해.’
동훈이 그러지 않았던가. 병원에 건질 만한 의료 자원이 많이 남아 있다고.
즉, 정우는 전장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이지만 병동을 훼손할 생각까지는 없던 것이다.
1위 구원자이기에 가능한, 대담한 태도였다.
“…….”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몇 분을 더 보냈을 때 즈음.
이윽고 그의 시야에 무언가 감지됐다.
‘손님인가.’
북쪽의 후문 너머에서부터 한 무리의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북문이면 땅바닥에 생성된 진입로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폐쇄돼서 커다란 싱크홀이 생겨난 상태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리로 접근하던 방문객들이 걸음을 멈췄다.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중일 것이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라는 식으로.
‘순위가 높은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정우는 저들이 좀 더 고민하게 내버려 둔 채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주시했다.
반경 10킬로 이내에서 가장 큰 정수를 추적하는 푸른 표식.
현재 이 표식은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각도를 틀어가면서 말이다.
이건 대상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동 중이라는 의미다.
어쩌면 표식이 가리키는 이 녀석도 구원자일지 모르고, 심지어 이리로 오는 중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사이 정우가 처음 발견했던 인간 무리는 용케 싱크홀을 지나 북문으로 진입했다.
파앗!
정우가 단번에 그리로 몸을 날린 것도 이때.
난데없이 기다란 그림자가 뻗치자 북문을 지나던 사람들이 기겁했다.
“뭐, 뭐야……?”
구원자가 하늘에서부터 뚝 떨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방금 거대한 싱크홀을 보고 온 터라 다들 겁에 질려 있던 상황.
콰콱!
정우가 착지하며 바닥을 박살 내자 순간적으로 그의 보호막 밀도가 올라가며 다면체 형태를 띠었다.
“헉…….”
본능적으로 흩어지려던 사람들이 괴상한 보호막을 보고서 걸음을 멈춘다.
이 와중에 가장 놀란 기색을 보인 건 선두에 있던 한 사내였다.
나이는 대략 40대 초반. 남성치곤 키가 상당히 작은 게 특징이었다. 160 정도 될까?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발목, 쩍 갈라진 팔뚝의 근육은 이 사내가 왕년엔 운동깨나 했던 자라는 걸 알려 줬다.
“아…….”
사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정우를 계속 보기만 했다.
2,445,742개.
1위의 정수량을 봐 버린 탓이다.
240만 개……. 반면에 사내의 정수 총량은 17만 개였다.
나름대로 힘을 기른다고 애썼지만 정우가 모은 정수의 1할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정우는 사내의 눈을 바라보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몇 위입니까?”
이에 사내의 초점이 살짝 틀어졌다.
정우로선 상대가 최초의 채널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본인의 순위를 다시 확인하는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채널을 보고 있다 해도 헛소리를 하진 못할 것이다. 지금 1위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자신은 물론이고 여태 고락을 함께해 온 일행도 깡그리 죽게 될 테니까.
“……48위입니다.”
사실상 최하위권.
정우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감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살육 경쟁에 지쳤거나 자신감을 잃은 자들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순위권은 만나 볼 수 없겠군.’
정우가 턱을 긁적이는 사이 사내가 잽싼 동작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저는 김선우라고 합니다! 저희를 성역으로 인도해 주시면 목숨을 다 바치겠습니다!”
다소 어색한 말투, 사극에서나 볼 법한 대사.
1위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사정할지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였다.
“정말 목숨을 바칠 겁니까?”
“예! 물론입…… 예?”
뭔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는지 선우란 사내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정우와 시선을 마주칠 순 없었다. 이 무지막지한 구원자는 이미 선우의 일행을 훑어보고 있었으니까.
‘특별히 대단한 사람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총 4인. 대다수가 피난민 꼴이었다. 자기 몸통만 한 배낭을 진 것도 모자라 양손에 비닐 봉투나 더플백 따위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만, 이제 여러분은 자기 증명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성역에 왜 가야 하는지, 아니 정확히는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죠. 3분 정도 드리겠습니다.”
정우가 이 말과 함께 손목시계를 보자 장내의 분위기가 경직됐다. 눈앞의 존재가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 상황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정우와 마찬가지로 구원자인 김선우가 가장 잘 알았다.
“다들 들으셨죠? 준호 씨부터 차례대로 이야기하세요. 자기 직업과 특기,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요.”
선우가 뒤를 돌아보더니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전에 준비했나 싶을 정도로 적응이 빠른 편. 예전에 정우가 외과의를 구하던 걸 보고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한 것이다.
“수도 설비 보수를 8년 정도 했습니다. 케이블 까는 일도 한 적 있고요. 기본적인 시설 정비도 가능합니다.”
“7년 차 소방관입니다. 당장 어디 불을 끌 일은 없겠지만…… 발화 물질을 다룬다거나 건물을 새로 지을 때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저는 11년 차 수의사입니다. 기본적인 대인 진료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혹시 목장 같은 게 필요해진다면 제가 큰 도움이 될 테고요…….”
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수의사가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정우는 오히려 생각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목장?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네.’
목장이든 뭐든 정말 장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가축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차세대’를 채식주의자로 키울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문제는 소와 돼지마저 정수를 부여받아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선우 일행을 둘러봤다.
어쨌든 이들은 마치 맞춤 패키지 같았다. 각자의 테마가 명확하지 않은가.
그리고 때맞춰 선우가 부연했다.
“제 나름대로 쓸모 있는 사람들을 추린 겁니다. 마주치는 모두를 제가 책임질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뒷맛이 씁쓸한 대사.
그러나 정우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얼추 이 그룹의 상태를 확인한 직후 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김선우 씨의 특기는 뭡니까?”
“예……? 저, 저는…….”
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눈으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들을 당신 앞으로 데려오지 않았는가? 난 이미 ‘티켓값’을 다 했다.
하지만 정우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 더 지나면 당신은 이 사람들과 함께 죽었을 겁니다. 그래서 여길 온 거 아닌가요? 혹시라도 살 수 있을까 싶어서.”
정우는 이렇게 말한 뒤 김선우의 뒤편에 늘어진 사람들을 쳐다봤다.
“전부 데리고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부라도 제가 챙기겠습니다. 대신 당신은 성역으로 갈 수 없어요. 특별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뭣…… 그, 그런…….”
선우는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또 설마 하고 있던 일이 정말 벌어진 거다.
“3분 다 지났습니다. 더 할 말 없습니까?”
슥.
정우가 시계를 보며 최종 선고를 준비했다.
그러자 끝내 선우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안 됩니다! 제발……!”
그가 바닥에 엎드린 채 정우의 소매를 붙들려는 순간.
쉬아아아악!
난데없는 파공음이 현장을 강타했다.
“……!”
정우는 반사적으로 보호막 밀도를 끌어 올렸고, 거의 동시에 짙푸른 정수 창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츠츠츳!
그러곤 멀찍이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뭐해? 너도 당장 싸우라고! 그렇게 뒈질 거야?”
이건 정우를 향한 게 아니라 그의 바로 앞에 엎드려 있는 48위 구원자, 김선우를 향한 제안이었다.
“…….”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이 날아온 방향을 응시했다.
그러자 온몸을 파랗게 빛내고 있는 세 남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스스로 위치를 노출한 1위.
그를 잡기 위해 구원자들이 연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