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파동(5)
오후 4시 정각.
정우는 병동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시계를 보고 있었다.
4인으로 구성된 ‘구원자 연합’의 궤멸 이후로 손님이 거짓말처럼 끊겼고, 덕분에 간만의 휴식을 취하게 된 거다.
현재 정우의 정수 총량은 3,526,410개.
김선우란 구원자는 끝내 자신이 성역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본인의 일행을 일부나마 살릴 수 있게 됐으니 조금은 안도했을까? 선우가 최후에 지어 보인 표정은 아주 오묘했다.
“…….”
정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자 근처에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던 사내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성역행이 확정되어 살아남은 두 사람 중 하나, 배관공 서준호였다.
“예, 말해요.”
“그……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이 말에 또 다른 생존자, 수의사 김경채가 살짝 황당하단 얼굴로 동료를 바라봤다.
물론 어지간히 급해서 꺼낸 말이긴 하겠다만.
이에 정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요.”
“감사합니다.”
용변을 보는 것조차 허락을 구하게 되는 어색한 관계.
그러나 눈앞에서 자신들의 구원자가 사라진 것이 불과 수십 분 전이었기에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관계를 수긍했다. 어쩌면 이것 역시 본능일지도 몰랐다.
“그, 그럼 저도…….”
경채가 정우의 눈치를 보면서 준호를 따라 옥상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정우는 둘을 그렇게 보낸 뒤 다시 건물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동우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앞으로 약 1시간.
이 시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장 마감을 해야겠다고, 정우는 생각했다.
‘다음은 진입로 폐쇄. 서울부터 싹 정리하고 타 지방 상황이 어떤지 알아내야 해.’
평온해 보이는 그의 표면과 달리 내부에선 거대한 소용돌이가 꿈틀대고 있었다.
다름 아닌 회랑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 * *
수 시간 전, 회랑.
‘유력한 행성 구원자’들을 불러 모은 지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들의 성토를 듣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진입로에선 어떤 것까지 나오게 됩니까?”
“정수를 부여받은 종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 물을. 내려!
“구원자 권한이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갑자기 모두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신호음이 울렸다.
삐이……!
1일 차, ‘설문’이 시작될 때 들었던 그것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다.
모든 구원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 소리를 듣고서 떠올리고 만 것이다. 허겁지겁 설문에 응하던 자신의 옛 모습을.
「지금부터 전이 방식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마침내 지구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전이……?’
정우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우주를 포함해 지구나 평가관 같은 녀석들은 하나같이 기묘한 단어 선택을 해 왔다.
이를테면 매일 각국의 1위에게 강제하는 투표를 ‘선두 특혜’라고 명명한다든가.
그러니 ‘전이’라는 단어도 결코 좋은 의미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스슷.
회랑 중앙에 홀연히 떠 있는 푸른 구체, 다시 말해 지구의 형상이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정수 덩어리처럼 파랗기만 하던 구체 표면에 얼룩 같은 것이 여럿 생겨났고, 그게 곧 뚜렷한 형태를 찾아갈 때쯤엔…….
‘아.’
정우는 녀석이 뭘 보여 주려는지 알 것 같아서 침음했다.
놈은 문자 그대로 ‘지구’를 보여 주고 있었다. 대륙과 반도, 섬으로 이루어진 이 행성 자체 말이다.
그러더니 지역별 경계선이 그어지기 시작했고, 다음엔 각 지역 위에 숫자가 나타났다.
이에 회랑을 따라 나란히 선 20여 개의 실루엣이 상체를 이리저리 틀어 대며 숫자들을 읽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금 보고 있는 건 회랑 출입자들만이 습득할 수 있는 엄청난 정보였기 때문이다.
‘지구가 분류한 나라…… 아니, 지역의 개수구나.’
귀가 찌릿해지는 느낌이 든다. 정우도 서둘러 숫자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당혹감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백 단위 숫자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육십육……. 칠십일, 칠십사…… 칠십사. 이게 다야?’
74까지 찾고 나니 이것보다 더 큰 숫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몇 번을 다시 훑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지구는 행성의 구역을 74개로 나눠놨던 것이다.
193개의 UN 가입국과 팔레스타인, 바티칸 시국…… 이런 인간식 추산은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다시 말해서.
‘정신 나간…….’
매일 아침 투표로 진행되는 ‘선두 특혜’의 5번 항목.
[5]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1명 희생.이걸 고른다는 건 74분의 1에 해당하는 확률로 자살하겠다는 뜻이었던 셈.
‘그럼 각 나라의 최상위 구원자는 74명일 테고, 이 자리에 대략 20명 정도 있으니까…….’
정우는 비로소 자신의 입지를 확인했다.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위로 스무 존재 가까이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면적 대비 인구 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정우가 이제야 회랑 출입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건 많은 걸 시사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전이는 모든 진입로가 사라진 지역의 폐쇄 권능자만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팟.
일부 지역에서 짙푸른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맥락상 전이 선택을 앞둔 지역일 것이다.
그런데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나라는 거의 없어 보였다.
유라시아 모퉁이의 어딘가와 아프리카 대륙의 일부 정도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외진 곳에서 솟아오른 또 하나의 빛줄기.
‘맙소사.’
그건 북한이었다.
「전이는 잔류와 파견,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잔류를 선택할 경우 소속 지역에 남을 수 있으며 하루가 지난 뒤 전이 재선택이 가능합니다. 파견을 선택할 경우 타 지역으로 즉시 이동할 수 있으나, 해당 지역의 진입로를 모두 닫기 전까진 전이 재선택이 불가능합니다.」
지구의 설명이 계속된다.
「다음은 지역별 진척도 현황입니다.」
스아앗!
지구의 몸체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싶더니 74개 지역에 색깔이 입혀졌다.
특별히 순위가 매겨지거나 하진 않았기에 정우는 바로 북한부터 봤다.
전이를 앞둔 지역이니 진척도가 가장 높지 않겠는가.
‘흰색…… 지구 입장에선 정화됐다는 의미인 건가?’
그리고 그런 북한과 마주 보고 있는 대한민국의 색깔은 짙은 회색이었다.
“진척도의 구체적인 의미가 뭡니까?”
좌중의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고, 곧 대답이 나왔다.
「지역에 생성된 진입로의 폐쇄 비율과 폐쇄 권능자들이 수집한 지역 내 정수량의 합산 결과입니다.」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은 진입로가 많이 닫히지도 않았고, 순위권의 구원자들이 정수를 악착같이 모으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정우도 이를 부정할 수 없었고 말이다. 4위가 아직도 43만 개를 가지고 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아, 그럼…….”
지구에게 질문을 던졌던 자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굳이 들을 필요까진 없었다. 정우를 포함한 좌중의 모두가 잘 알았으니까.
‘파견을 선택한다면 진척도가 낮은 지역으로 가야 유리하겠지. 거긴 순위권자들의 수준도 낮고, 덕분에 정수가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어딜 쑤시든 계속 성장할 수 있을 테니.’
우습지만 소위 말하는 ‘맛집’인 거다.
‘문제는 그게 우리 지역이라는 거네.’
정우는 진척도 현황을 꼼꼼히 살폈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대륙도 회색을 띠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대한민국에 비해 색이 옅었다.
또한 저긴 넓은 면적과 어마어마한 인구만큼이나 진입로도 많지 않았겠는가?
그에 반해 한국은 땅덩어리가 좁음에도 짙은 회색이다.
만약 타국의 구원자가 한국으로 들어와 정수를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면 과연 그걸 막을 수 있을지…….
‘일단 북한은 전이하지 않고도 이리로 올 수 있으니 무조건 만나게 될 거라고 봐야 해. 문제는 다른 나라들의 구원자인데.’
북에서 내려온 자들과 싸우는 사이 후방에서 또 다른 강적이 나타난다면 아무리 정수를 불려 놨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선은 진척도를 최대한 빨리 올려서 이리로 파견 올 생각을 못하게 하는 거다.’
정우는 회랑을 채운 실루엣들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정우 혼자만 했을까?
그와 마찬가지로 진척도가 더딘 지역의 구원자가 여기에 와 있다면 똑같은 계획을 세우고 있을 터.
사실상 이건 또 다른 구원자 경쟁이나 다름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유력한 행성 구원자’를 배출하지 못한 지역들은 이런 상황조차 알 수 없다는 점.
그 누구에게도 조언을 듣지 못한 채 약자로 남아 있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타국의 구원자에게 정리당하는 것이다.
정우는 이 사실이 새삼 소름 끼쳤다.
‘더 달려야 해. 난 아직도 한참 부족했던 거다.’
약자도태, 적자생존.
이 세계는 정우에게 더욱 잔인해지길 강요하고 있었다.
* * *
오후 4시 21분.
준호와 경채는 소변을 20분씩이나 보고 복귀했다.
실은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박정우가 도주한 줄로 오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거다.
끼익.
살짝 닫아 뒀던 옥상 출입구를 조용히 열자 멀찍이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구원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옥상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츠츳.
신발 밑창이 콘크리트와 마찰하며 꽤 요란한 소리를 냈는데도 박정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
이를 이상하게 여긴 두 사내가 정우의 뒤편으로 다가갔고, 곧 이들도 정우와 같은 방향을 보게 됐다.
“어?”
“억, 씨발!”
이번 반응으로 배관공 서준호의 성격이 좀 더 걸걸하다는 게 드러났다.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우를 포함해 세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엔 진입로가 생성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맞은편 동네였다. 접시처럼 엎어진 채로 허공에 떠 있는 형태였고, 여느 진입로처럼 무언가를 열심히 토해 냈다.
‘방금 생긴 것 같은데,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정우가 턱을 긁적인다.
현재 그의 정수 총량은 약 350만 개. 정수 밀집 지역 위주로 생성되는 진입로의 특성상 정우 자체를 밀집 지역이라고 판단해 진입로가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었다.
단, 세브란스 일대는 진입로가 이미 폐쇄된 지역이라 재생성이 불가능하니 건너편 지역에 생긴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
‘맞습니까? 저 진입로가 저 때문에 생긴 건가요? 그런 거라면 일종의 오작동 아닌가.’
대놓고 평가관에게 질문했지만 왜인지 이에 대해선 답해 주지 않았다.
‘정수를 강탈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며. 그럼 이 시점엔 무조건 큰 정수를 쫓을 게 아니라 오히려 민간인들이 숨은 지역을 찾아가는 게 맞지 않나?’
정우는 새 진입로를 멀거니 바라봤다.
이유야 어쨌든 저 진입로는 이미 임무에 실패한 셈이다. 하필 지역 최강자 앞에 나타났으니.
“여기서 조용히 기다려요. 잠시 다녀올 테니까.”
정우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숨어 있으라는 말을 하자 수의사 김경채가 손가락을 들어 진입로 근처를 가리켰다.
“저건…… 사람 아닌가요?”
“……?”
정우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경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건물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돔형으로 전개해 둔 보호막.
누군가 민간인을 대동하고서 진입로로 접근 중이었던 거다.
정우는 잠시 얼이 빠진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내 급히 몸을 날렸다.
저자가 먼저 진입로를 닫아버리면 정우로선 방주 10석을 날리는 셈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