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파동(6)
일반적으로 갓 생성된 진입로에선 침입자들이 순차적으로 넘어온다.
이를테면 청소부 군단이 먼저 진입하고, 그 뒤를 이어 공명수를 품은 농부들이 등장, 그러고 나서 3일 차의 침입자인 장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개판이군.’
정우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 진입로 안에서부터 침입자 세 종이 한데 섞여 나오는 것을 역겹다는 듯 쳐다봤다.
정확히는 고속으로 진입 중인 장어 떼가 나머지 2종을 몸으로 밀어내는 상황이었다.
끼르륵!
아무래도 현시점 최강의 포식자는 장어들인 듯.
청소부와 농부 군단은 놈들과 싸워 볼 생각조차 없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고, 어렵지 않게 진입로 일대를 장악한 장어 떼는 곧바로 정수를 찾아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이때 정우보다는 정체불명의 구원자가 진입로에 훨씬 근접해 있었고, 이내 수천 마리의 장어가 그리로 달려들었다.
투드드듯!
놈들의 탄력 있는 외피가 서로 부딪치자 마치 새 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
그리고 정우는 이 광경을 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몇 위쯤 되는 녀석이지? 저만 한 공격을 계속 버텨 낼 수 있나?’
구원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저자가 데려온 민간인 중 살려 둬야 할 인재가 있을까 우려하는 것이었을 뿐.
탓!
결국 정우는 방향을 틀어서 장어 떼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돔형 보호막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보호막 안쪽에서부터 정수 파동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 많은 장어 떼를 상대로 보호막을 유지하면서 반격까지 해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전투원이 하나가 아닌 것 같았다.
“……!”
정우는 잽싸게 근처 장어들을 정리하면서 상대편과의 거리를 좁혔다.
간단한 손짓 한 번에 수백 마리씩 증발.
푸아아악!
전장에 정우가 난입하자 사위를 까맣게 채우고 있던 장어들이 눈에 띄게 줄어 갔고, 이에 상대측에서도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끝내는 싸우길 완전히 멈춰 버렸다. 정우가 접근해 오는 방향에 시선이 닿은 탓이었다.
이때 마침 정우도 돔형 보호막 안쪽으로 보이는 실루엣들을 발견했기에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여덟……?’
생각보다 꽤 많은 숫자다.
이들을 어쩌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심지어 채널에서 그 난리가 난 걸 보고 오는 길일 텐데.
정우는 온몸에 보호막을 두른 채 상대편의 정수량을 읽어 낼 수 있는 거리까지 걸어 나갔다.
이에 널찍하게 전개되어 있던 상대측의 보호막이 움찔거렸다.
“뭡니까? 권능도 없는 것 같은데 진입로 앞에 있어 봐야…….”
정우가 이렇게 운을 떼는 사이 기척을 죽이고 있던 나머지 장어들이 그의 뒤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끼르룩!
기존의 수가 워낙 많았다 보니 ‘나머지’조차도 천여 마리 가까이 됐다.
주변이 순식간에 까만 그림자로 뒤덮였고, 거의 동시에 정우의 보호막에서부터 천여 개의 가시가 뿜어져 나갔다.
취르르릇!
이전보다 훨씬 정확한 요격.
‘이것도 숙련이 되는구나.’
정우는 그 많던 장어 중 단 한 마리도 접근하지 못한 걸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알게 모르게 가시를 활용하는 능력이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눈앞에서 보게 된 8인조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떴다.
“……다, 당신이군요.”
한 남자가 주춤거리며 정우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 아주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정수량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28만 개.’
정우는 중년 남자의 정수를 읽은 뒤 그의 뒤편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자들을 훑어봤다.
단연 눈에 띈 건 남자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성과 10대 후반 정도 될까 싶은 남녀였다.
‘……구원자 가족이군.’
정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묘하게 닮은 것도 그렇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만 봐도 이들의 유대 관계가 상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상당량의 정수를 지닌 것도 구원자를 포함한 저 네 사람이 전부였고 말이다.
28만 개를 쥐고 있는 가장을 제외한 나머지 셋의 평균 정수량은 무려 4만 개였다. 어느 정도 각자도생이 가능하도록 정수를 분배한 것이리라.
‘그럼 저쪽은 외부인 집합이겠네. 기술자일 확률이 높겠군.’
정우의 시선이 4인 가족을 떠나 다른 네 사람에게 닿았다. 이들은 본인의 신분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뒤로 두어 걸음 떨어진 채로 모여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여성 하나와 중년 남성 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한 남자 하나.
어찌 됐든 이들이 당장 큰 위협이 되지 않으리란 게 확인됐다.
정우는 사태 파악을 마치자마자 저 멀리 떠 있는 진입로를 향해 정수 창을 던졌다.
정수 밀도가 150만 개에 달하는 공격이었다.
콰아아앗!
그의 손에서 짙푸르다 못해 주변 공간이 일렁일 정도의 에너지가 발산되자 ‘외부인’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여태 자신들이 따르고 있던 자보다 훨씬 강한 자가 나타났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허공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정수 창은 곧 진입로 표면을 쑤시더니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엔 예의 그 과부하 현상.
정우로선 몇 번이나 본 장면이었기에 굳이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8인조는 진입로가 닫히는 걸 처음 보는 눈치였다.
“아…….”
중년의 구원자가 입을 쩍 벌리며 침음을 흘린다.
하지만 정우는 이러한 반응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쇄 권능자도 아니고 진입로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였냐는 거다.
자칫하면 총합 40만 개나 되는 정수를 장어 떼에게 빼앗길 뻔하지 않았나.
“진입로에 가까이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정우가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묻자 상대가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저대로 놔뒀다간 병원까지 갈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자기 딴엔 세브란스까지 가는 길을 뚫으려 했다는 의미.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상당량의 정수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콰득.
그사이 정우의 공격을 받아 낸 진입로가 분열하기 시작했고, 곧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여긴,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온 겁니까?”
정우가 바로 본론을 꺼내자 중년의 구원자가 뒤를 흘깃 돌아봤다.
“예, 다들 전투 경험도 있고…… 적어도 짐이 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정우의 생각은 좀 달랐다.
“차라리 모든 정수를 혼자 관리했다면 이미 폐쇄 권능을 손에 넣었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러고선 여길 찾아오지 않았겠죠.”
“예?”
남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으나 정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짓했다.
대신 뒤편으로 물러나 있는 네 사람을 가리켰다.
“저쪽은 뭡니까?”
마치 가게에 와서 물건을 둘러보는 듯한 몸짓에 장내의 모두가 일순 위화감을 느꼈다.
“저 사람…… 뭔가 이상해.”
구원자의 딸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아버지의 등 뒤로 숨는다.
이에 남자는 뒤로 손을 뻗어 딸을 꽉 붙들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정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 사연이 좀 긴데, 살려 둘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데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려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러니 정수를 이렇게나 많이 들고 있는 거겠지.’
정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구원자가 그렇듯 이 사내도 나름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가려 받고 있던 셈이다.
다만 이런 작업을 가족 단위로 해 왔다는 건 꽤 놀라웠다.
아내와 두 자녀도 이 사내의 학살을 용인…… 아니, 그걸 넘어서 동참했다는 뜻 아닌가? 각자 4만 개 수준의 정수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벅, 저벅.
이윽고 정우가 발을 뗐다. 4인의 외부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돔형으로 전개된 보호막이 정우를 감싼 다면체 보호막과 충돌했고, 얼마 가지 않아 한쪽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당연히 중년의 사내 쪽이었다.
“이게 무슨……!”
방어 수단을 송두리째 잃은 사내는 기겁하며 자신의 가족들을 뒤로 더 물렸다.
정우는 그새 외부인들에게 바짝 다가가 있었는데, 본래 아무런 힘이 없던 자들이어선지 겁을 먹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자신들에겐 생존권이 전무함을 깨달은 것이다.
초연하기까지 한 네 개의 얼굴 앞에서, 정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장기 생존을 위한 인재를 모으고 있습니다. 살고 싶다면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 밝혀 주십시오.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러곤 눈을 파랗게 빛내며 뒤를 돌아봤다.
“그쪽도 마찬가지고요. 만약 특별한 재주가 없다면 정수라도 되십시오.”
“저, 정수요……?”
사내는 상대의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설마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면 정우는 적어도 이 가족들만큼은 기술자가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손님일 테니까.
정수를 보유한 자들은 그대로 죽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든 거다.
이에 뒤편에서 자그마한 기척이 났다.
슥.
다시 뒤를 돌아보니 외부인 측의 노인이 손을 들고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면 말을 하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말이다.
“말해요.”
정우가 허락하자 그제야 노인이 입술을 실룩였다.
“정보도, 제 특기가 될 수 있습니까?”
“정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어차피 가만히 놔둬도 자연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늙은 남자였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이자의 입에서 무슨 정보가 나올지.
“음.”
노인이 입을 우물거린다.
그러더니 천천히 검지를 구부리면서 땅을 가리켰다.
“피난처 한 군데를…… 알고 있습니다. 여태 보신 것 중에 가장 클 겁니다. 장담하지요.”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직접 보고서도 ‘장담’ 같은 말을 꺼내다니. 노인의 근처에 있던 외부인들이 미쳤느냐는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나 정우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민간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하던 차다. 앞으로 인재를 들일 방법이라곤 다른 구원자에게 강탈하는 것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살려 드리죠.”
정우는 대번에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저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이라도 지키겠다고 수많은 사람을 먹이로 던져 버린 셈이다.
추악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한심한 선택이었지만 정우에겐 일개 인간을 심판하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재를 구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이 노인 덕분에 일부라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는 거지.’
노인의 말대로 그렇게나 큰 피난처라면 매일 소비하는 식량과 생필품의 양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장석표가 끝내 포기하고 만 거대 공동체처럼 말이다.
또한 2위나 3위 구원자가 그곳을 지키고 있으면 모를까 언제고 치안이 유지되지도 않을 터.
모두를 시한부 상태로 놔두느니 일부라도 건져서 미래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은가?
“다른 분들은 할 말 없으십니까? 저와 함께 성역으로 가거나 여기서 죽거나, 둘 중 하나뿐입니다.”
정우의 눈이 파랗게 물들자 그와 마주 서 있던 ‘구원자 가족’의 동공도 일제히 타올랐다.
본인들이야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고 있지만 내면을 여실히 반영하는 정수만큼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이들에겐 정우가 원하는 능력이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