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개벽(1)
오후 4시 33분.
남양주의 남서부이자 구리시와 경계를 마주한 지역인 다산 신도시에 네 사람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성역의 수색조였다.
전직 외교부 차관보, 김중성.
조선희의 남편, 강성호.
경기 북부 광역 수사대 출신의 이성태.
그리고 박정우의 아버지이자 수색조 경호를 맡게 된 박민구.
일단 냄새가 회복할 때까지는 약속을 이행하기로 한 것이다.
철컥.
도시 입구에 이르러 성태가 권총을 장전하자 민구가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괜히 소리만 나고.”
총 따위 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성태가 떨떠름한 얼굴로 권총을 도로 집어넣었고, 성호도 미묘한 표정으로 소총 멜빵을 만지작거렸다.
이 와중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중성 하나뿐.
그가 태휘 대신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민구 때문이었다.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성역에선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민구를 통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일단 바깥으로 나오면 수색조로선 민구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말로, 진심으로라도 회유할 수 있게 중성 본인이 직접 나온 거다.
민구와 대립했던 장본인을 수색조에 편성시켜서 함께 내보내는 것. 이건 민구에 대한 성역의 입장 표명이자 일종의 구애였다.
당신에게 철저히 룰을 적용시켰으니 이쪽도 편법을 쓰지 않겠노라고.
드르륵, 그륵.
성호가 운반용으로 가져온 수레를 끌고 있는 탓에 계속해서 소리가 났다.
덕분에 도시 안에선 일방적으로 위치가 노출될 것이다.
이 때문에 민구를 데려온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천만한 작전이었다. 성역 밖에서 제법 오래 생존해 온 사내이긴 하나 그래 봐야 11만 개짜리 각성자 아닌가?
“벌써부터 겁먹을 건 없습니다. 당장 위험한 건 없어 보이니까.”
대번에 민구가 주춤거리는 수레 소리를 감지하고서 넌지시 일렀다.
그리고 이건 사실이었다. 그는 ‘육감’을 사용할 수 있는 포식자였기에, 주변에 어떤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붉은색만 없으면 된다.’
지금 민구의 시야는 후방을 제외하곤 온통 노란색이었다.
즉, 보기와는 다르게 도시 내부에 각성자들이 제법 들어차 있다는 의미인 거다.
성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나온 게 아님에도 ‘냄새’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안 좋은 징조였다. 육감의 유효거리가 상당히 짧다는 의미였으니까.
“위험 부담이 1에서 10까지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선 몇까지 감수할 생각입니까?”
민구가 뒤를 슬쩍 돌아보며 묻자 중성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전 6입니다. 다른 분들은?”
이에 성호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4라고 이야기했고, 성태는 중성에 맞춰 6이란 답변을 내놨다.
“좋습니다. 그럼 주택 단지까지 들어가 봅시다.”
민구가 걸음 속도를 한층 올리자 수레가 또다시 주춤했다.
* * *
오후 4시 47분.
중성은 약 14분 만에 민구가 수색조에 필수적인 인재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정확히 어떤 물자를 찾고 있느냐는 질문에 ‘가능하면 건설 자재부터 찾는 게 좋겠다.’라고 답변했더니 정말 금세 찾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공사장 같은 델 뒤진 게 아니고 그저 주택 단지 근방의 철물점에 방문한 것뿐이었다.
이런 동네 철물점은 사장이 화장실 보수나 차양 설치 같은 작업 출장을 다니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온갖 자재가 쌓여 있다는 게 민구의 설명.
“집이 전부 멀쩡한데 누가 철물점을 털고 있었겠소. 식량 챙기기도 바빴을 텐데.”
민구가 커다란 시멘트 포대를 수레 위에 얹으며 콧김을 세게 내뱉었다.
“그런데 정말 집을 지을 거면 이런 거론 안 되고…….”
민구의 손가락이 멀찍이 보이는 도로를 가리킨다.
“도로를 뚫어서 차로 옮겨야지. 지금 이 정도론 화장실이나 겨우 만들까 싶은데.”
“그렇군요.”
그의 말에 중성이 팔짱을 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않아도 강남 세브란스에서 의사들을 싣고 온 동훈이 이런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박정우가 성역에서부터 기존 도시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뚫어 준다면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겠느냐고.
‘운송 팀에 민구 씨가 참여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덜거덕.
그사이 성태와 성호가 철물점 안에서부터 공구 박스와 삽 따위를 들고 나타났다.
이에 민구가 계속 움직이라는 듯 손짓했다.
“저기 왼쪽에 밧줄같이 생긴 거 보입니까? 전부 전깃줄입니다. 다 가져와요. 그 뒤쪽에 전구들도 챙겨 오고. 변압기도 최소 두 개 챙기십시오.”
이어서는 모기장, 전기 파리채 같은 잡동사니까지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사실 말이 모기장이지 수십 겹 이상 돌돌 말린 걸 그대로 실어 보니 이것도 무시 못할 짐이었다.
“저건 왜……. 부피를 너무 차지하지 않습니까?”
중성이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묻자 민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외로 이쪽으론 문외한이구려. 성역의 2개 면이 산지던데, 그럼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지겠소?”
“아아.”
뒤늦게 민구의 의도를 파악한 중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찾아오자마자 엄청난 수의 모기들이 달려들 거란 의미였던 것이다.
또한 이미 임산부들을 들이고 있지 않은가? 훗날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방충 물자는 필수적이었다.
“다 됐습니다. 혹시 더 실을 게 있을까요?”
그새 짐을 다 옮긴 성호와 성태가 진땀을 흘리며 수레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민구가 하늘을 쳐다봤다.
벌써 오후 5시가 다 돼감에도 여전히 날이 밝았다. 여름이라 해가 늦게 떨어지는 탓이다.
‘대략 7시쯤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한다면…….’
이곳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건 앞으로 대략 2시간.
“더 찾아야 할 게 있습니까?”
민구의 질문에 중성이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약품은 세브란스 측이 가져온 걸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됐고, 지금 가장 급한 건 식량이었다. 방주 탑승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비축해 둔 식량의 소모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질 터였으니까.
“뭐가 됐든 먹을 걸 가져가야 합니다. 이미 비축량이 안전치 밑으로 내려간 상황입니다. 내일부터 농사 준비를 시작할 예정이지만 몇 차례 시행착오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도 첫 수확까지 적어도 1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는 바깥에서 식량을 조달해야 합니다.”
“으음.”
막힘없이 수색조를 리드해 오던 민구가 처음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이 사내가 드디어 깊은 고민에 빠진 줄 알았으나 잠시 뒤 날아든 질문은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대책 없는 사람들이었군. 벌써 식량 비축이 떨어져 가고 있다고? 내가 성역에 방문하지 않았다면 당신들끼리 여길 헤매고 다녔을 거란 이야기 아니오?”
이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흠.”
민구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허공 어딘가로 눈을 돌렸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나라 모든 인간이 식량을 1순위로 챙겨 두고 있소. 그러니까 지금 이런 방식으론 구할 수가 없는 자원이지.”
이런 방식.
도심지의 가게 따위를 살펴보고 다니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걸 거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중성이 조심스럽게 되묻자 민구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뿜어냈다. 흡사 박정우처럼.
“답은 한 가지 아니겠습니까? 남이 모아 둔 걸 빼앗는 수밖에.”
그러더니 민구가 성태더러 권총을 달라고 했다.
아까는 소리를 내선 안 되니 숨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 있습니다.”
성태가 불안한 얼굴로 권총을 건네기 무섭게 민구가 하늘을 향해 팔을 홱 들었다.
“……!”
그러곤.
타앙!
이 도시의 산 것은 모두 들으라는 듯, 총알을 쏘아 올렸다.
* * *
같은 시각, 강남 세브란스.
장석표는 수술을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옥상으로 달려갔다.
이쪽의 명줄을 쥐고 있는 1위 구원자에게 수술이 끝났음을 알리고 ‘품삯’을 받기 위해서였다.
수원으로 돌아가는 것 말이다.
홰액!
급하게 옥상 출입문을 밀어내자 세찬 바람이 몰아치면서 한 무리의 사람과 백색 헬기 등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박혀 들어온 것은.
‘맙소사…….’
「3,932,054」
박정우의 머리맡에 붙은 숫자였다.
수술을 진행하던 그 몇 시간 사이에 400만 개 수준의 각성자로 거듭난 것이다.
장석표 역시 최초의 채널을 계속 확인하고 있었기에 정우의 이번 성장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잘 알았다.
아마도 지금 정우의 주변에 서 있는 자들이 ‘정리’의 결과물이리라. 희생된 구원자들이 데리고 있던 인재들.
옥상에 들어선 석표가 멍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정우가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예…… 그것이, 일단 잘됐습니다. 한동안 거동이 쉽진 않겠지만 제가 보기에 세 달…….”
숨 가쁘게 보고하던 석표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백동우가 일상생활이 가능해질 정도로 기력을 되찾으려면 세 달 정도가 걸리는데, 현재 지구에 남은 시간은 40일이 채 안 됐기 때문이다.
물론 박정우가 본인의 임무를 끝까지 해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그럼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큰 쓸모가 없는 인물을 살려 놨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의식은 언제쯤 돌아오겠습니까?”
다행히 정우가 석표의 말을 건너뛰고서 다음 질문을 했다.
“늦어도 이틀 내로 깨어날 겁니다. 일주일 정도 쉬면 간단한 진찰은 할 수 있을 테고요.”
물론 백동우가 있는 곳으로 환자들이 직접 와 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석표의 등짝이 서서히 젖는다.
“좋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별다른 지적 없이 넘어간 정우가 손을 슬쩍 들었다.
“석표 씨, 지금도 4위입니까?”
“예……?”
난데없는 순위 확인.
이에 장석표의 시선이 허공으로 홀연히 움직였다.
“……!”
그러곤 본인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끝내 추월당하기 시작했군.’
정우는 재차 묻지 않아도 석표의 얼굴을 보고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권능은 가지고 있습니까?”
정우가 다시 질문했다. 5위까진 지키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예. 아직은, 다행히…….”
“그럼 됐습니다. 약속대로 수원까지 복귀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정우가 말을 끊더니 눈빛으로 남은 대사를 대신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당신이 더 잘 알 거라는 듯.
“……알겠습니다.”
허리까지 깊게 숙여 인사하는 장석표.
정우는 상대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용헌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고생스럽겠지만 수원을 한 번 더 다녀오셔야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용헌 씨를 해치진 못할 겁니다.”
이 말인즉슨 이번에도 정우가 헬기에 타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그럼 정우 씨는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전 이리로 바로 복귀하면 될까요?”
용헌이 다소 겁에 질린 얼굴로 묻자 정우가 옥상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노인을 흘깃 쳐다봤다.
“복귀했는데 제가 이곳에 없다면 전화를 하시고, 만에 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성역으로 가세요. 그럼 알아서 대응하겠습니다.”
그사이 층계를 통해 옥상으로 사람들이 더 쏟아져 들어왔다.
임무를 마친 아주대 병원 소속의 의사들과 수술에 참여했던 세브란스 측 간호사 이예나 등이었다.
“이, 이 사람들은 다 뭐예요……?”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예나가 당혹스럽다는 눈빛으로 낯선 사람들을 둘러봤고, 이에 정우가 담담한 어조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제 여길 떠날 겁니다. 사람 수에 맞춰서 챙길 수 있는 물건을 최대한 챙기고, 마음의 준비도 해 두시길 바랍니다. 썩 좋은 것들을 보게 되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