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개벽(4)
가짜 구원자.
사실 이상할 건 없었다. 일찍이 청와대를 상대로 본인이 1위라고 주장하던 녀석도 있었으니까. 그만큼 배짱만 있으면 상대를 속이기 쉽다는 거다.
물론 진짜 1위…… 아니, 가짜보다 순위가 하나라도 더 높은 자가 나타나는 순간 끝날 연극이긴 했다.
그래서 끝내 청와대의 그 녀석이 죽었고, 이번엔 목사 놈도 죽게 될 것이다.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언젠간 박살이 났겠지.’
정우는 점점 가까워지는 효은 교회 건물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람이 그리도 많이 모였다면 어차피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자멸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외부인의 도전을 받게 됐을 거다. 누군가는 패스파인더를 따라 여기에 이르고 말았을 테니까.
저벅, 저벅.
이윽고 좁은 샛길이 끝나더니 작은 가게들로 이루어진 상가 지역이 나타났다.
이곳도 신사동 초입과 마찬가지로 약탈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너무 다르군.’
종로까지 떠올릴 것도 없이, 대성이 통제권을 쥐고 있던 강남만 해도 이 정도로 말끔하진 않았다.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빵집이나 편의점처럼 식량과 관련한 매장은 깔끔하게 비워져 있다는 정도였다.
“저건 교회에서 거둬 간 겁니까?”
정우가 휑한 편의점을 가리키며 묻자 세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징수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근방의 모든 물자는 지금 교회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효은 교회에는 그만한 물자를 보관할 공간이 충분했다.
‘설마 누군가 세계를 구원할 때까지 42일을 버텨 볼 생각이었던 건가.’
정우는 이마를 긁적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진입로에 대해 무지하고 패스파인더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든 버티자는 생각부터 드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저쪽이 입구입니다.”
마침내 세용이 손을 들어 전방에 보이는 조각상을 가리켰다.
십자가를 품은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상이었고, 그 뒤로는 교회 본관으로 향하는 오르막 계단이 있었다.
외벽이나 출입을 통제하는 게이트 같은 것은 따로 없는 듯. 대신 계단 근처에 정장 차림의 사내 몇 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피난처치고는 너무 개방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교회니까요.”
정우와 세용이 짤막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저쪽에서도 외부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직경 30미터짜리 보호막이 통째로 다가오는데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건 뭐죠? 경비대 같은 개념인가.”
“예, 실무자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숙청도 도맡아서 하는…….”
세용은 이 말을 하면서 몇 번이나 턱 근육을 실룩였다. 일단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교회에서 도망 나오던 기억이 떠오른 거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
세용은 분노를 넘어 살의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사내들을 쏘아봤다.
외부인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온 자들의 수는 무려 열하나.
정우는 빠르게 도열하기 시작한 사내들의 정수량을 확인했다.
‘평균 4천 개 정도네. 이걸로 신사동을 장악 중이었다고……?’
그럼에도 발치의 패스파인더는 여전히 교회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대든 진짜 실력자든 간에 무언가 더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긴 어떻게 오셨…….”
의례적으로 운을 떼던 교회 측 요원이 정우의 곁에 서 있는 세용을 발견하고서 눈을 껌뻑였다.
그러더니 이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목사님 아니십니까?”
“…….”
세용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요원의 동공이 짧게 흔들리다 정우에게 옮겨 갔다.
장내를 뒤덮은 보호막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 목사는 어디에 있나? 장로 회의를 요청하러 왔네.”
세용의 말에 요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실소했다.
이 노인은 담임 목사 장태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여론 장악에 실패해 야반도주한 작자였다.
그랬던 그가 난데없이 돌아와서는 이제야 장로 회의를 요청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게다가 장로 회의는 이미 한 차례 열린 상황이었다. 원세용이 도주한 직후에 말이다.
회의 결과도 아주 명확했다. 원세용 목사를 발견할 경우 즉결 처형.
이에 따라 교회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명 ‘효은회’ 요원들로선 지금 이 자리에서 원 목사를 죽이는 것이 옳았다.
다만 문제는.
“그런데 이분은……?”
드디어 팀장급 요원이 정우에 대해 물었다.
육중한 느낌마저 주는 보호막을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유지 중인 정체불명의 사내.
그럼에도 4천 개짜리 각성자의 식견으론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얼마나 월등한 경지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쪽보다 강하리란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이에 세용이 저만치 보이는 교회 본관의 십자가에 시선을 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분이 바로 구원자시네. 장 목사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산 증거이기도 하지. 회의를 열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야. 큰 화를 입기 전에 물러나는 게 좋을 걸세.”
슥.
세용이 본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 하자 요원들이 긴장한 몸짓으로 그를 막아섰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고, 일단 이런 식으론 안 됩니다. 잠시 기다리시는…….”
푸아악!
짤막한 파열음과 함께 요원의 대사가 끊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발목 위의 모든 걸 잃어서, 음성을 낼 재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
나머지 요원들이 방금 본 걸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이 정우의 팔이 또 한 차례 휘둘러졌다.
“억! 자, 잠깐!”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세용이 구원자를 만류하려 했으나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푸아아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렬로 서 있던 효은회 요원 대부분이 증발했고, 운 좋게 살아남은 두 명도 이미 제정신은 아니었다.
타탓!
사색이 된 하나는 네발로 기다시피 하며 계단을 뛰어올랐고, 또 다른 하나는 어디로 도망갈 생각조차 못한 채 제자리에 뻣뻣이 굳어 있었다.
홰액!
정우는 벌써 저만치 멀어진 탈주자를 향해 정수 창을 쏘아 보낸 뒤 여전히 소금 기둥 꼴을 한 사내에게 천천히 물었다.
“장 목사란 사람이 나처럼 직접 싸운 적이 있나?”
“……?”
아직 질문을 받아 낼 상태가 아니었는지 사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혀를 움직였다.
“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목사의 현재 위치는?”
정우가 눈을 파랗게 밝히며 묻자 사내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본관 꼭대기를 가리켰다.
부연은 세용이 직접 했고 말이다.
“담임 목사실을 말하는 걸 겁니다. 저녁 예배를 준비 중인가 보군요.”
“그 장로 회의라는 건 꼭 해야 하는 겁니까?”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적어도 신도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시비를 명확히…….”
“그럼 됐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굳이 안 해도 되는 겁니다.”
정우가 딱 잘라 말하자 세용이 반박해 왔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신의 뜻이 장 목사에게 내렸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우 씨가 단순히 힘으로 억누른다면 장 목사가 순교했다고 여길 겁니다.”
“순교?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어차피 목사가 순교했다고 여기는 자들도 나란히 저세상으로 갈 텐데.”
정우는 무심히 대답하면서도 세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 것 같았다.
교회의 명예만큼은 되찾아 달라는 것이다.
“기본적인 분별력도 없는 자들을 성역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습니다.”
척.
정우가 기세 좋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세용이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쫓으며 물었다.
“인재를 구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 구해야죠. 인재가 있다면.”
본관과 가까워질수록 건물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도 점점 커졌다.
“맙소사.”
이쯤 오자 세용은 교회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됐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17분. 저녁 예배 시작까지 대략 40분 남은 때였다.
수많은 신도가 예배실을 찾아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끼익.
이윽고 정우가 본관 로비로 이어지는 커다란 문을 열어젖혔고, 아니나 다를까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대부분 저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외부인이 온 줄도 몰랐지만 일부가 원세용을 알아보고서 슬그머니 다가왔다.
“목사님……?”
장 목사가 본 예배를 통해 세용을 이단으로 규정했기에 신도들도 그가 여기에 와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다만 적의를 보이던 효은회 요원들과 달리 신도들은 세용을 걱정하는 눈빛이 대다수였다.
“이쪽입니다.”
세용은 자신을 발견한 신도들에게 서둘러 묵례를 하며 정우를 층계로 안내했다.
로비 바로 우측에 대저택을 연상시키는 돌계단이 있었는데, 이게 바로 본관 중앙을 관통하는 주요 통로였다.
“보셨듯이 대부분 선한 사람입니다. 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장 목사의 주장에 반박할 근거가 없으니 불가피하게 여기 남아 있는 것뿐이지요. 대안이 없거든요.”
“…….”
그러나 지금 정우의 귀엔 세용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층계를 오름과 동시에 발치의 정수 표식이 미친 듯이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여기에 있구나. 아마 목사실이겠지.’
정우가 자신도 모르게 신체를 강화하자 금세 뒤처지기 시작한 세용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저, 정우 씨!”
타탓!
푸른 궤적을 남기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 1위 구원자.
이내 본관 꼭대기인 8층에 이르렀고, 층계 끄트머리를 지키고 있던 두 사내가 정우를 향해 손을 뻗으며 접근을 제지했다.
“여긴 출입 제한…… 헉!”
출입증을 보여 달라고 말하려던 사내가 입을 꾹 다문다.
삿.
방금 바로 옆자리의 보안 요원이 동강 난 탓이었다.
투둑, 툭, 푹.
어느 사내의 깔끔하게 잘린 상체는 층계를 따라 굴러가는가 싶더니 곧 벽면 앞에서 멈췄다.
“저 안엔 목사뿐인가?”
정우가 홀로 남은 요원의 뒤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다른 층과 달리 8층 입구는 커다란 문으로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담임 목사가 층 하나를 전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어…… 그것이…….”
여전히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내.
답답해진 정우가 그를 베려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8층 출입문이 슬쩍 열렸다.
끼릭.
“……?”
이에 막 8층에 도착한 세용이 걸음을 멈췄고, 보안 요원과 정우도 점점 벌어지는 문틈을 바라봤다.
“아.”
안쪽에서 흘러나온 얇은 음성.
착각한 게 아니라면 여성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 있나요?”
이어서 문이 도로 닫히려 하자 보안 요원이 엄청난 판단 능력을 발휘했다.
“아, 아닙니다. 어서 나와요, 지금.”
직감한 것이다. 정체불명의 사내가 저 안에 들어가고 나면 여자들도 살아 나오기 어려울 거란 걸.
끼리릭.
요원의 말에 문이 다시 벌어졌고, 그 안에서부터 일렬로 선 젊은 여자들이 줄지어 걸어 나왔다.
‘아…… 장 목사, 이건 아니잖나.’
세용은 여자들이 지나갈 수 있게 뒤로 비켜서면서 속으로 침음했다.
다들 짐짓 새침한 표정으로 무언가 숨기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학대를 당하거나 강압적인 분위기에 있다가 나온 기색은 전혀 없었다.
다소 묘한 분위기에서 유일무이한 구원자를 대면하고 왔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세용을 포함해 이 자리의 모두가 잘 알았다.
“언제부터인가?”
세용이 진노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보안 요원이 정우를 눈치를 보며 입을 뻥긋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대번에 세용의 몸에서 층계가 통째로 울릴 정도의 괴성이 뿜어져 나왔다.
“대답해, 이 새끼야!”
기세, 라는 게 아마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 것이다.
정우는 요원이 세용과 대치하도록 놔둔 채 아직 닫히지 않은 출입문 안쪽을 슬쩍 들여다봤다.
그러자 문 뒤로 쭉 이어진 복도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쏙 사라지는 게 보였다. 짐작건대 누군가의 머리.
“이만 들어갑시다. 덕분에 저쪽이 눈치를 챈 거 같은데.”
정우가 이렇게 말하자 세용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서 놀란 눈으로 출입문 방향을 바라봤다.
문을 열어 두고서 고함을 쳤으니 저 안에서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럴 것까진 없습니다. 당신 말대로 가짜라면 8층에서 뛰어내리진 못할 테고, 진짜라고 해도…….”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이쪽이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우는 뒷말을 생략하고선 문을 마저 열었다. 그러곤 뒤를 흘깃 보며 보안 요원에게 말했다.
“마저 대답 안 해 줄 겁니까? 매우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죠?”
“아…….”
정우의 오른팔에 여전히 칼날이 뻗어 나와 있음을 발견한 보안 요원.
그는 턱밑에 땀이 고이는 걸 느끼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어제저녁부터입니다.”
“예.”
답을 들은 정우는 망설임 없이 팔을 휘둘렀다.
투둑, 툭, 두둑.
사내의 머리통은 먼저 간 동료보다 더 멀리 굴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