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개벽(6)
변질하다 못해 괴물이 돼 버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아들을 살해하길 권하는 한 구원자.
‘맙소사, 하나님…….’
세용은 목이 메는 듯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벽면에 걸린 십자가를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곳이 어디였는지를.
“다들 그만두십시오. 이건 신성 모독입니다!”
교회 지붕 아래에서 목사끼리, 그것도 자신의 혈육을 직접 죽이려 들다니…… 세용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우의 반응은 아주 싸늘했다.
“신성모독? 애초에 날 이리로 데려온 게 당신 아닙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더 모독될…… 아니, 애초에 이곳에 신성이란 게 존재는 했습니까?”
“……아.”
무어라 반박하려던 세용의 입이 끝내 도로 닫혔다.
이런 난장판까진 아니더라도 대량 살상이 벌어지리라는 건 각오를 하고 온 터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제길……!’
아직 정우처럼 많은 선을 넘어 보지 않은 세용으로선 머리와 마음이 계속해서 엇갈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우를 막을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용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활활 타오르는 속을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쪽은 마저 진행하지? 아니면 아들과 함께 나와 맞서 싸우던가.”
이윽고 정우가 장석주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후.”
날카로운 시선을 받게 된 석주가 깊은 날숨을 내쉰다.
그의 동공은 아까보다 더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살의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아…… 저자가 정말 아버지를 살려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죄하기 전에 우릴 시험하는 겁니다!”
아들, 장태호가 장석주와 박정우를 번갈아 보며 애타게 외쳤다.
‘순정품’이지만 여전히 구원자의 능력을 지닌 그이기에 정우의 정수량을 똑똑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397만 개. 이건 이 사내가 그간 마주친 모든 생명을 빨아들였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41만 개나 되는 정수를 지닌 아버지 역시 살려서 보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다른 방법이 있느냐?”
아들과 달리 이미 생각을 정리한 듯한 장석주.
그는 이미 아들을 향해 팔을 뻗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푸아아악!
정말로 정수를 뿜어냈다. 마치 아들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처리하겠다는 듯 성급한 느낌으로.
“……!”
세용은 물론 정우의 동공마저 순간적으로 확장됐고, 곧 장태호 목사가 있던 자리에서 시퍼런 구체 하나가 툭 튀어 올랐다.
“후우.”
친아들을 살해.
거사를 마친 장석주는 지친다는 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댔다.
보는 이로 하여금 ‘방금 정말 아들을 죽인 게 맞는가?’ 라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건조한 모습이었다.
세용도 허탈감을 느끼며 천천히 주저앉았고, 이 모든 걸 기척을 죽인 채 관람하던 소녀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정우는…….
‘포식자가 구원자를 죽였다. 그럼 이제 바로 역할이 바뀌는 건가?’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장석주의 머리 위에 붙은 문구를 바라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변화가 생겼다.
두드드드드…….
실내 공기가 통째로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의 묵직한 진동이 발생한 것이다.
진동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장석주의 머리 위.
‘포식자’라는 문구가 요동을 치며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엉?”
깜짝 놀란 석주가 상체를 급히 일으켜 세웠고, 이어서 그의 시야에 두 줄의 알림이 나타났다.
「구원자 역할을 승계하기 위해 기존 역할을 잃습니다.」
「정수량 변화에 따라 지위를 재설정합니다.」
단 한 번도 구원자로 존재한 적이 없던 석주는 두 번째 문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정우를 비롯한 수십 명의 구원자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상당량의 정수를 지닌 새 구원자가 최초의 채널에 난입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전까지는 사망자에 의해 모든 구원자의 순위가 하나씩 올라가거나, 정수 추월 등으로 일부 구간에서만 순위 변동이 일어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13] 악몽 : ……? [24] 빛 : 어? 뭐야? [30] 초심 : 헐. [8] 음양 : 뭐지? [43] 청해 : 와…….한 자리부터 40위권까지, 거의 모든 구원자의 순위가 한 단계씩 하락했다.
정원이 50에 불과한 채널에 상위권 구원자 하나가 더 생겨난 결과였다.
여기에 더해서.
| 사용자 하나가 채널에서 이탈되었습니다.
한동안 채팅만 올라오던 최초의 채널에 공식 알람이 나타났다.
[43] 청해 : 50위였던 분이 이탈됐다는 소리인 거죠? [46] 적안 : 어떻게 돼 가는 거지. [34] 기사도 : 아예 순위 밖에 있던 사람이 상위권으로 들어온 거 같은데요. 최소 8위 위쪽이라는 뜻 아닌가.그리고 이 채팅을 언젠가부터 석주도 보고 있었다.
물론, 아직 닉네임도 없고 시야를 마구 채우기 시작한 인터페이스조차 눈에 익히지 못한 상태라 채팅에 뛰어들 여력까진 없었다.
게다가.
“평가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아 버린 석주가 혼잣말처럼 ‘평가관’이란 단어를 흘렸고, 정우가 이를 바로 낚아챘다.
“바로 평가관을 배정해 주나? 지금 몇 위지?”
“유, 육…….”
‘낙하산’답게 석주가 본인의 순위를 생각 없이 밝혀 왔다. 그러다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일을 다물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41만 개가 6위? 그새 허들이 꽤 높아졌군.’
하지만 아직까진 낙관적이었다. 지금쯤 수원으로 돌아갔을 석표가 여전히 5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슥.
정우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인터넷 신호가 잡히는지 확인했다.
다행이 신사동 일대의 통신망은 살아 있었다.
투둑, 툭.
정우가 가나안을 통해 석표에게 6위의 정수량을 경고하고 있자, 장석주가 슬슬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이제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가 봐도 되겠지요?”
여태 나름대로 기세가 등등하던 석주가 정우를 극존대했다.
상대가 쥐고 있던 정수량을 비로소 보게 된 탓이다.
그리고 엄청난 강도의 경고를 받고 있기도 했다. 본인에게 배정된 평가관에게 말이다.
-시스템 연결로부터 24시간 동안은 담당 중인 구원자의 생명을 존속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임무를 임의로 부여하겠습니다.
[긴급] 대상에게서 즉시 이탈하십시오.대상, 그러니까 눈앞의 사내에게 시뻘건 표식이 찍힌 것은 덤.
‘미친, 이게 다 뭐야……?’
석주는 평가관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은 박정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기만한 것 자체에 대해선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번 기회에 알아내야 할 정보였거든요.”
말투 역시 이전과 다르게 매우 정중했고, 덕분에 석주의 얼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기만? 잠깐…… 이건 아니지요.”
“미안합니다. 지옥에서 봅시다.”
장석주의 정수 총량은 41만 개. 정우는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손을 뻗었다.
이에 반사적으로 석주가 전신에 보호막을 둘렀으나.
콰츠츠츳!
정우의 압도적인 화력이 보호막을 산산이 조각냈다.
“억!”
상상도 못한 전개에 세용이 튕기듯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고, 소녀도 소파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도망가다 옆으로 엎어졌다.
“아니,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은 그걸 믿고 자기 아들까지 죽였는데!”
세용이 치를 떨며 대들었으나 정우는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예. 실망한 건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로선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더군요.”
무려 두 가지 소득이 있었다. 41만 개의 정수와 포식자가 구원자를 승계하는 방식에 대한 정보.
이 두 가지와 ‘거짓말’이란 찝찝한 행위의 무게를 저울질하자 전자로 홱 기울었던 거다.
이곳이 성역이었다면 ‘실권’ 그 자체인 정우 자신의 일관성 확보를 위해 가급적 기만행위를 자제했겠지만, 여긴 성역이 아니라 전쟁터이지 않은가?
전쟁터에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게 더 옳다고, 정우는 생각했다.
“아아…….”
세용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거듭 한숨을 쉬며 손으로 벽을 짚었고, 그사이 정우는 일부러 남겨 둔 석주의 머리통을 집어 들었다.
쩌걱.
“……?”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가.
호흡을 가라앉히고 있던 세용과 소녀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정우는 왼손으로 장석주의 머리칼을 움켜쥔 채 질문을 던졌다.
“곧 예배 시작이지요? 몇 층으로 가면 됩니까?”
“예?”
* * *
같은 시각, 남양주의 제2청사 1층 로비.
민구, 중성, 성태, 성호까지 네 사람도 정우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청사 안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으음…….”
민구는 마치 은행 강도처럼 민원 접수처의 데스크 위에 우뚝 선 채, 장내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훑어봤다.
일부는 이곳으로 진입하며 동강 낸 공무원들의 가족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다산 신도시의 주민이었다.
즉, 이 안에서 외부인은 민구를 비롯한 네 사내가 전부인 셈이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이것도 어떻게 보면 ‘지연’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찾아오는 족족 전부 받아 줄 수는 없으니 그나마 공통점이 있는 같은 지역 사람들끼리 뭉치게 됐을 터.
관점에 따라선 이 지역의 공무원들이 일을 꽤 잘한 편이었다. 적어도 관할 구역의 주민만큼은 살 수 있게 하지 않았는가.
“어쩌실 겁니까?”
한동안 잠자코 있던 중성이 민구에게 결정을 내려 달라는 듯 물어 왔다.
청사 지하에 식량이 가득 쌓여 있는 건 이미 확인했고, 이제 남은 건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문제뿐이었으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묻습니까? 당신이 책임자 아니었소?”
“제가 특별히 직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장에선 실무를 전담하고 계신 민구 씨에겐 결정권이 있다고 봐야겠지요.”
“난 아직 성역 소속이 아니오. 이전에도 말했지만 도와주러 왔을 뿐이지. 힘만 빌려주는 거란 말입니다.”
“…….”
민구의 말에 중성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에도 묘하게 기시감을 느꼈다.
북악산 밑에서의 일 말이다. 스케일만 작을 뿐이지 여러모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확실히 정우 씨가 구원자로서 월등한 재목이었구나.’
중성은 박민구를 통해 박정우의 자질을 재차 확인했다.
그 어떤 인물도 박정우처럼 모든 상황에서 결단력을 보이진 못할 것이다.
민구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청사에 진입할 때만 해도 살인귀 같던 인물이 그새 또 ‘상식’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상식을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임에도.
“그럼 제가…… 아니, 저희가 결정을 내리면 거기에 무조건 따르실 겁니까? 말씀하신 대로 힘만 빌려주시면 되는 문제인데.”
생각을 정리한 중성이 덤덤한 말투로 제안하자, 민구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성역의 방식대로라면 보나마나 이들을 죽이자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잘해야 일종의 면접을 통해 두어 명 정도 건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많은 사람을 다 챙겨서 성역에 정착시키는 것도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시팔. 대충 이런 느낌이었군.’
민구는 비로소 깨달았다. 구원자 내지는 성역의 실무자가 매번 어떤 고민을 하게 되는지 말이다.
“사실 결정은 이미 내려진 상태 아니오?”
민구 역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상태에서 말을 꺼냈고, 이에 중성이 나머지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러곤 다시 민구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