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31
131화. 개벽(8)
“……?”
소희의 답을 듣게 된 정우는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내가 왜요? 라니. 구원자 역할을 수행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죽을 겁니까?”
정우가 이렇게 다시 묻자 소희가 예배실 출구 쪽에 흩어진 시체들을 흘깃 봤다.
“…….”
본격적으로 죽음을 각오한 것까진 아니었던 거다.
다만 조금 전의 살육 장면을 보고서 정우에 대한 반감이 아주 강하게 솟아났을 뿐.
“나더러 당신 같은 괴물을 도우라고요? 내가 겨우 그따위 짓을 하자고 아득바득 살아온 줄 알아요?”
소희가 말한 ‘아득바득 살아온’이란 표현은 지구 폐쇄 이후의 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희귀종’이라고도 불리는 여성 파일럿이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세월을 말하는 거였다.
“…….”
하지만 구원자가 그런 것까지 전부 알아줘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내심이 빠르게 고갈되는 것을 느낀 정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진심이든 아니든 이쪽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명을 도륙한 걸 보고서도 저런 소리를 한다는 건…….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 그건 확실하다. 아직도 현실감각이 없거나, 자신이 정말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거나.’
상대가 웬만한 인재였다면 가차 없이 목을 꺾어 줬겠지만 이 여자는 자그마치 대형 항공사의 부기장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자원.
‘당장 북악산으로 가면 헬기를 하나 더 구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멀쩡한 공항을 찾을 수도 있을 거야. 만에 하나 경비행기라도 얻게 된다면 혁신 그 자체다.’
두 번째 조종사를 얻게 되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러나 인물 자체가 장애 요소로 작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차라리 냅다 주먹을 날려 오던 박태휘 같은 타입이었다면 상대하기 훨씬 쉬웠을 텐데.
‘일단 비행기 조종을 해야 하니까 양팔은 모두 멀쩡해야겠지? 하지만 손가락은…….’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희의 의지를 시험해 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신체를 절단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약지 하나 정돈 없어져도 금세 적응할 수 있겠지. 버튼 같은 건 검지나 중지 같은 걸로 눌러 왔을 테니까.’
아무리 현실감각이 없는 자라고 해도 실질적인 피해를 입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가 상당히 진지한 눈빛으로 소희의 손을 빤히 보고 있자 세용이 설마 하는 얼굴로 정우를 바라봤다.
그러곤 황급히 소희의 어깨를 붙들며 거칠게 흔들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진짜 이렇게 죽을 겁니까?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저 남자가 아니었어도 다 죽었을 겁니다. 오히려 이건 일부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라고요!”
“무, 무슨 미친 소리예요……?”
소희는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사이 정우는 시퍼런 칼날을 뽑아내고 있었다.
“비켜요. 정말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건지, 간단히 알아봅시다.”
정우가 눈을 파랗게 빛내며 말하자 뒤를 돌아본 세용이 경악했다.
“억……! 안 됩니다! 살려 둘 사람이라면 더욱요!”
홱!
심지어 그는 정우의 팔을 붙들며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저 사람은 바깥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없어서 저런 겁니다!”
“…….”
대체 뭔데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나오는가.
정우는 세용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대신 머리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했다.
원세용, 효은 교회의 부목사이자 올해로 71세가 된 노인.
오랜 세월 목회를 하며 쌓아 온 경험은 그를 제법 통찰력 있는 인물로 성장시켰을 것이다.
그런 그가 무릎까지 꿇어 가며 매달린다는 건 지금 이쪽이 벌이려는 일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는 의미이리라.
“그럼 대안이 있습니까?”
정우가 살기를 누그러뜨리며 다시 물으니 세용이 가쁜 호흡을 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우선 성역을 한번 보여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처분은 그다음에 다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나름의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신의 목숨이 달렸다 해도 이 자리에서 본 것만 가지고 정우 씨를 따르긴 쉽지 않을 테고요.”
세용은 은근히 소희를 비호하고 있었다.
박정우의 곁에 있어 본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내가 어떤 인물인지 말이다.
만약 이 자리에 인재가 단 한 명도 없다면 박정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이를 죽이고 여길 떠날 것이다.
그러니 정우를 직접 이리로 인도한 세용으로선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살리려고 애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죄의식이 그를 붙들고 있는 셈.
“흐음.”
세용의 말을 가만히 듣던 정우가 마침내 운을 떼기 시작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대신 성역에 도착할 때까진 묶어 둬야겠습니다. 언제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뭐라고요?”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대화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소희가 뒤늦게 반발했고, 이에 세용이 제발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본인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럼 남은 건…….”
정우가 객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감히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대기 중이던 나머지 신도들이 몸을 움찔했다.
* * *
오후 6시 57분.
효은 교회 바깥으로 나온 정우 일행은 이전보다 훨씬 몸집이 불어 있었다.
우선 정우가 일을 마칠 때까지 근처에 숨어 있던 사람들만 해도 넷이나 됐다.
정수 5만 개짜리 간호사인 이예나.
배관공 서준호와 수의사 김경채.
정우의 주치의 최동훈.
여기에 밧줄로 묶인 채 끌려 나온 정소희가 추가되어 다섯이 됐고, 그리고 가까스로 한 사람이 더해졌다.
그는 다름 아닌 53세 남성, 한경래였다.
한국 도로 공사의 건설 계획 팀장.
심지어 본래 이 근처에 살던 인물이 아니고, 주말에 건설처장의 집들이에 왔다가 지구 폐쇄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경우라 ‘바깥 생활’ 경험도 어느 정도 있었다.
집들이 장소가 반포동이었다고 하니 신사동까지 무려 네 개 지역을 거슬러 올라온 셈이다. 나름대로 사선을 넘나들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경래는 소희와 달리 줄에 묶이지 않았고, 지금은 위험을 무릅쓰고 흡연 기회를 요청해서 벌써 세 개비나 태우고 있었다.
“…….”
신입 중 하나는 줄에 묶여 있고 또 하나는 다짜고짜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묘한 풍경.
이젠 나름 고참이 된 최동훈은 미묘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봤다.
다만 굳이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다 이유가 있어서 데려온 사람들일 테니까.
한편 세용은 여전히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다.
그는 정우가 휴대폰을 꺼내 드는 걸 보자마자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바로 성역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러자 정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처의 진입로부터 전부 닫고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용헌이 헬기를 몰고 픽업해 준다는 전제하에서다.
다행히 이 지역에서는 통신 신호가 잡혔지만 용헌 쪽 사정이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효은 교회에서 접선이 가능하겠냐는 메시지를 보내 둔 상태였다.
‘내일은 진입로에서 또 뭐가 기어 나올지 알 수 없고, 폐쇄 조건이 더 높아질지도 몰라. 적어도 나만큼은 인접한 진입로를 전부 닫으면서 이동해야 한다.’
어느덧 정수가 440만 개에 달하게 된 그가 아직까지도 진입로의 폐쇄 조건을 우려하고 있는 건 다른 폐쇄 권능자들 때문이었다.
현재 5위 허들이 대략 43만 개 수준 아닌가?
즉, 내일 갑자기 모든 진입로의 폐쇄 조건이 폭등해 버리면 이 나라에서 진입로를 닫을 수 있는 사람이 한두 명에 불과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우에겐 진입로 폐쇄에도 시간을 할애해야 할 필요와 의무가 있었다.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경쟁의 목적은 제시간 안에 진입로를 전부 닫는 것이었으니까.
브우웅.
이윽고 정우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용케 용헌이 답장을 보내온 거다.
‘3분 뒤 도착……. 아직 이 근처에 있었군.’
강남 세브란스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슬슬 어둑해지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부터 헬기 특유의 비행음이 울려 퍼졌다.
“어……?”
역시 이 소리에 가장 놀란 건 침통한 표정으로 포박되어 있던 정소희.
경래도 필터까지 타기 시작한 담배 개비를 바닥에 내던지고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자 곧 대성 그룹에서 강탈한 02호 백색 의료 헬기가 군청색 하늘을 등지며 나타났다.
“……저런 걸 대체 어디서 구했죠?”
소희가 헬기를 멍하니 보며 묻는다.
정확히는 저런 의료 헬기와 조종사를 어떻게 구했냐는 물음이었을 거다.
이에 정우는 아주 짧게 요약했다.
“사연이 깁니다. 알아서 상상해요.”
* * *
“정우 씨!”
고작해야 두어 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건만 용헌은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한 얼굴로 헬기에서 내렸다.
무려 5위 구원자인 석표와 그의 일행을 혼자 실어 날라야 했으니 내심 두렵기도 했을 거다.
“수원에선 별문제 없었습니까?”
“아…….”
정우의 물음에 용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수원의 월드컵 경기장에서 본 건 바닥의 손가락 더미를 쓸어 담고 있는 생존자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석표의 요청에 따라 정우가 실행했던 ‘인구 감축’의 여파였다.
“예…….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긴 사람이 좀 늘어났군요?”
용헌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곧 특이 사항은 오히려 정우 쪽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저 사람은 왜 묶여 있는 겁니까?”
용헌이 소희를 곁눈질하며 나지막하게 묻는다.
“항공사 부기장이라고 하더군요. 고집이 센 편인 것 같아서 일단 묶어 놨습니다.”
“부기장이라고요……? 그런데 정우 씨를 돕지 않겠답니까?”
“예, 아직은. 하지만 진입로가 닫히는 걸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요.”
“그럼 지금 저희는…… 성역으로 바로 가는 게 아니군요.”
“예, 여기선 저것만 옮겨 싣고 진입로 쪽으로 갈 겁니다.”
정우가 턱을 까닥여서 교회 정문에 쌓아 둔 박스를 가리켰다.
교회 식당에서 빼내 온 요리 도구와 식자재들이었다.
하지만 용헌은 걱정이 앞섰다.
짐은 둘째치고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나까지 하면 아홉 명이나 돼. 보통 혼잡한 게 아닐 것 같은데.’
게다가 사람을 더 들일 자리도 없게 된다.
진입로 근처에 민간인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불안 요소였다.
“우선…… 알겠습니다. 저 짐도 어떻게든 실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좋습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주시했다.
진입로 추적 표식에 따르면 가장 인접한 진입로의 방향은 남동쪽.
개포나 대치동 부근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드르륵!
그사이 용헌이 헬기 출입부를 젖혔고, 난민 꼴을 한 일행들이 그리로 우르르 밀려 들어갔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
정소희만이 바깥에 우두커니 서서 벌써 자리가 빽빽해진 헬기 내부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헬기에서 도로 내리더니 그녀의 팔을 툭 잡아당겼다.
“뭐해요?”
꽤 호기로운 말투.
“예?”
얼이 빠져 있던 소희는 엉겁결에 대답한 뒤 상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보게 됐다. 무척 강단 있어 보이는 어떤 여자의 얼굴을.
바로 강남 세브란스의 간호사이자 정수 5만 개짜리 각성자인 이예나였다.
최근 전적은 내과의 백동우의 수술 참여.
그녀는 이미 박정우란 인물이 어떤 자인지 파악을 끝낸 상태였고, 그가 사람을 죽일 때만큼이나 사람을 살려야 할 때도 결단력이 있다는 걸 직접 본 사람 중 하나였다.
“태워 줄 때 그냥 타요. 여기 계속 서 있어도 누군갈 만나게 되긴 하겠지만 그 사람들은 당신이 비행기를 몰 줄 안다고 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써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저 남자밖에 없어요.”
예나는 헬기 안쪽에 몸을 묻은 정우를 슬쩍 가리키고선 대번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제 정말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건 정소희밖에 없게 됐다.
둑, 둑, 두둑, 두두둑.
급기야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한 프로펠러.
“…….”
소희는 입술에 힘을 꽉 준 채 점점 거칠어지는 프로펠러 바람을 몸으로 받아 냈다.
그러고는.
팍!
끝내 헬기를 향해 발을 딛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