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격변(1)
오후 7시 8분, 남양주를 가로지르는 4차선 도로 위.
드디어 해가 저물었다.
적막한 도로 위에 보이는 거라곤 드문드문 나타나는 차량뿐이었는데, 이마저도 실루엣이 뭉개지면서 어둑한 배경 속에 스며들었다.
끼릭, 끼리릭.
민구가 홀로 끌고 있는 수레에서부터 제법 요란한 소리가 난다.
온갖 자원이 산더미처럼 쌓인 수레를 끌기 위해 민구는 자신이 가진 정수의 대부분을 신체 강화에 부어야만 했다.
덕분에 그의 피부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조명 하나 없는 이 도로에서 유일한 발광체가 됐다.
끼릭, 끼릭.
“…….”
민구의 뒤론 중성과 성호, 성태 그리고 남양주 제2청사에서 건져낸 부부 한 쌍과 토목기사 하나가 따라붙었다.
즉, 청사에서 만난 생존자 백여 명 중에서 세 사람만 살려낸 것이다.
이들은 마치 엄한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자식처럼 순종적이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띠며 걸었다.
주변은 너무 어두웠고, 수레 근처는 너무 밝았다.
바깥에서 보면 심해 속 초롱아귀를 보는 것 같을 것이다.
일방적인 기습을 당하기에 최적의 여건 아닌가?
하지만 이 그룹의 유일한 전력인 민구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모두가 그걸 잘 알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음…… 사람을 고르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이번 작전은 무사히 복귀하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야겠군.’
중성은 아까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 주변을 둘러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값진 소득이 있다면 민구가 성역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민구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방주 면접’을 수긍하고 생존자를 골라내지 않았는가?
또한 이 상황 역시 민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을 터였다.
왜 계속해서 강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 말이다.
자기 몸 하나를 건사하는 것과 또 다른 누군가를 함께 보호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장 민간인 여섯을 책임지는 것만 해도 이렇게 벅찬데 수십, 수백을 존속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하물며 성역과 체계를 유지하며 구원자 경쟁까지 해 나가야만 하는 박정우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지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다면, 결코 여길 떠날 수 없게 되겠지.’
중성은 수레를 끄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뒤편을 흘깃 보는 민구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
생존의 원리를 깨닫는 순간, 민구는 비로소 자신의 아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끼릭, 끼릭…… 끄륵!
갑자기 바뀐 수레 소리.
이건 민구의 동작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그러더니 곧 그가 수레 손잡이를 놓으며 제자리에 꼿꼿하게 섰다.
“무슨 일입니까?”
중성이 민간인을 대표해 묻자 민구가 뒤를 돌아봤다.
“헉……!”
이에 민구의 눈을 보게 된 나머지 일행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내의 동공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옵니다.”
민구는 짤막하게 말한 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도로의 정면 방향에서부터 뭔가 접근 중이었다. 포식자의 ‘육감’이 발동된 탓에 시야 위쪽이 빛나고 있었으니까.
“…….”
수레 소리조차 끊기자 일대는 그야말로 정적에 휩싸였고,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풀잎들이 몸을 비비는 소리만 들려왔다.
꿀꺽.
일행 중 하나가 침을 삼키다가 소리가 너무 큰 것에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디 숨어 있을 데도 없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민구는 근처 차량 옆으로 수레를 옮겨 놨다.
그러곤 신체 강화를 완전히 꺼 버린 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다들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민구를 바라보자 그가 여태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기서 최대한 멀리 가서 어디 차 안에라도 숨으십시오. 걸리적거리는 게 많으면 이길 싸움도 지게 될 거요.”
“아…….”
중성이 침음했고,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성태가 나머지 일행을 뒤로 물렸다.
“후우.”
그사이 민구는 깊은 호흡을 반복하며 체력을 최대한 회복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육감이 경고해 준 상대방의 색깔이 주황색이었던 것이다.
여태 초록, 노랑, 빨강만 봐 왔지 주황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최소한 비슷한 수준의 상대거나 좀 버거울 수도 있다는 의미겠지.’
그는 저 멀리 이동 중인 민간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도로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시거리가 워낙 짧아져서 육안으론 상대의 위치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대신에.
‘바로 코앞인가.’
주황빛으로 물든 민구의 시야 상단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구도 이에 맞춰 상대가 오는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차량 뒤편에 붙여둔 수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저 수레를 마저 끌고 가야 할 테니까.
저벅, 저벅.
민구는 온몸에 보호막을 두른 채 천천히 걸었다.
‘거의 개활지니까 속임수 같은 건 없을 테고. 순전히 힘 싸움이겠지.’
한때는 지하 주차장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자다가 기습을 받기도 했던 그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 봤기에 고작 정면 대결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츠즉.
마침내 맞은편에서부터 육감이 경고해 주던 상대방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고, 이와 동시에 ‘지진 않을 거다.’라던 민구의 생각이 말끔히 지워졌다.
‘맙소사.’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루한 행색의 사내.
신장은 175 정도로 평범한 편이었으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결코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다.
‘뭐하는 녀석이지?’
척.
민구가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으나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따라 쭉 걸어왔다.
그러다 뒤늦게 민구의 ‘포식자’란 문구를 봤는지 안면 근육을 꿈틀거렸다.
다만 저게 놀라는 표정을 지은 건지 그저 얼굴을 찡그린 건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온 얼굴에 피와 땟물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패거리가 더 있어 보이진 않는다는 거. 온전히 상대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
민구가 조심스레 주변을 훑어보고 있자 놈이 입을 열었다.
“아, 이미 임자가 있는 동네였구만. 길을 잘 들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러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마치 얇은 벽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감이 멀다고 해야 할까.
민구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게 정수의 언어 번역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자네, 목소리가 좀 이상한데.”
“아, 그렇습니까. 그게 사실…….”
민구의 말에 놈이 마치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듯 상체를 수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뭔가 싶어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민구는 놈이 이미 싸움을 시작했다는 걸 즉각 알아차렸다.
팍!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냄과 동시에 놈의 오른팔이 번쩍거리더니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민구를 향해 좁은 면적의 정수 파동을 뿜어낸 것이다.
피아아앗!
날카로운 파공음이 민구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갔고,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엔 깊숙한 홈이 남았다.
‘뭐가 이렇게 빨라?’
민구는 이렇게 자문하면서도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조금 전 본 그 푸른 팔. 파동을 보다 빠르게 뿜어내기 위해 신체의 일부만 강화해서 사용한 거다.
민구는 단 한 번도 저런 식으로 정수를 운용해 본 적이 없었고, 저게 가능하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츠아앗!
이번엔 놈이 칼날을 뽑아냈다. 민구가 만만치 않은 상대일 거란 걸 직감하고 근접전을 택한 거다.
방출보단 물체화가 정수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반면 민구의 입장은 달랐다.
실 형태의 정수 방출을 사용하는 그는 중거리 전투가 특기였다.
휙!
드디어 민구가 반격을 시도했고, 그의 팔이 휘둘러진 방향을 따라 시퍼런 정수가 사선을 만들어 냈다.
“……?”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던 사내도 이것만큼은 처음 본 듯 당황한 기색으로 칼날을 휘둘렀다.
정수 실을 잘라낼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민구의 정수 실은 보이는 것과 달리 물체화가 아니라 방출이었고, 이것이 승부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가름했다.
츳.
짤막한 파열음이 나며 정수 실의 중앙부가 사내의 칼날 너비만큼 사라졌다.
그리고 나머지 실은 본래 자신들이 향하던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름 아닌 사내의 상체를 가로지르는 형태로 말이다.
“어……?”
놈은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푸른 실이 자신의 상체를 파고드는 걸 봤다.
사앗.
칼날을 뽑아 올렸던 오른팔은 팔꿈치 위부터 잘려나갔고, 왼팔은 쇄골 바로 아래부터 깔끔히 썰렸다.
아마도 심장은 반 토막이 났을 것이다.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미끄러지듯 분할됐다.
스륵, 푸욱.
그러자 민구의 시야에 걸려 있던 주황빛이 일시에 사라졌고, 대신 푸른빛을 내는 구체 네 개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뭐, 뭐야…….”
최소 스무 합을 예상하고 있던 그였기에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손발이 뻣뻣했다.
대략 3초가 지나자 정수 실로 소모했던 정수가 도로 차올랐고, 비로소 민구의 긴장도 해소됐다.
‘뭐였지? 이 녀석.’
그는 토막 난 시체에 천천히 다가가 정수부터 흡수했다.
티틱, 츠아앗…….
엄청난 속도로 솟구치기 시작한 정수 총량.
“으억!”
27만 개였던 그의 정수가 순식간에 30만 개 후반에 이르더니 곧 40만 개를 돌파했다.
“크아악!”
이어서 전신을 감싸기 시작한 또 다른 통증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는지 저 멀리서 대기 중이던 중성과 나머지 일행이 달려올 정도였다.
“미, 민구 씨!”
중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지금 민구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어마어마한 밀도의 고통과 이 와중에도 의식 속에 새겨지고 있는 정수 총량만이 느껴졌을 뿐.
“이 씨발!”
급기야 민구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날숨을 쉬었을 땐 입김이 푸른색을 띠기까지 했다.
“워…….”
그를 부축하려던 사람들이 도로 물러서기 시작했고, 이때쯤 민구의 고통도 점차 멎었다.
“흐악.”
어느새 바닥에 엎어져 있던 민구는 양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머릿속의 숫자를 다시 읽었다.
「582,604」
58만 개.
하지만 이내 의식 속의 시야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숫자 말고도 또 다른 것이 어떤 정보를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원자 역할을 승계하기 위해 기존 역할을 잃습니다.」
「정수량 변화에 따라 지위를 재설정합니다.」
‘뭐……?’
구원자 역할 승계. 오랜 시간 포식자로 살아온 민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방금 죽인 그 사내가 구원자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놀라선 안 됐다.
민구가 두 줄의 문구를 읽어내자 숨어 있던 세 번째 문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역 정보 불일치. 역할 변경에 따라 소속 지역을 변경합니다.」
‘이건 무슨 소리야?’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임을 예감한 민구가 강하게 반발했으나 이미 뭔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그의 의식 속에 누군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뒤엔 온갖 숫자와 창틀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리고 웬 문자열이 쉬지 않고 올라오는 사각형이 시야에 나타났다.
“…….”
어안이 벙벙해진 민구가 눈앞의 것들을 바라보고만 있자 의식 속에 들어온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박민구 님에게 배정된 평가관 ‘파319’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