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격변(2)
* * *
“……괜찮으십니까?”
중성은 이렇게 물으면서도 민구에게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포식자’란 문구가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이 타이밍에 역할을 잃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는 건 외부 표기가 되지 않는 역할을 새로 부여받았다는 뜻이리라.
‘설마 구원자가…….’
중성은 당혹스럽다는 눈빛으로 민구를 바라봤다.
포식자는 물론 대리자도 머리 위의 문구를 통해 역할 표시가 된다.
그러니 신분이 감춰지는 직업은 구원자가 유일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보다 큰 변수일지도 모르겠는데.’
중성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지만 그조차도 결코 예상할 수 없던 변수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민구가 이 나라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점.
“…….”
민구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의 어딘가에 걸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 역시 현장에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평가관이란 녀석에게 몇 가지 현황을 전해 듣고 나니 이번엔 닉네임을 만들란 주문이 들어온 탓이었다.
| 채널에서 사용할 닉네임을 정해 주십시오. 이미 생성된 닉네임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닉네임을 정하라고?’
민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담당 평가관 ‘파319’가 부연을 해 줬다.
-채널에서 다른 구원자와 대화하기 위해선 반드시 닉네임을 생성해야 합니다.
‘아, 저걸 말하는 건가.’
비로소 민구의 시선이 시야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사각형에 닿았다.
[16] 쾌 : 오히려 가장 안전한 건 평양이 아닐까 싶은데. [14] 흑호 : 여기에서 언급된 이상 더는 안전하지 않게 된 거요. [22] 김동조 : 우리에게 안전한 곳이란 게 대체 어디 있습니까? 1위가 아닌 이상…….북의 구원자 상위 50인이 모인 ‘최초의 채널’.
그러나 신입 구원자인 민구에겐 자신이 속한 채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챌 정도의 통찰력까진 없었다.
대신 대화에 참여 중인 자들이 달고 있는 숫자의 의미는 바로 간파했다.
‘자신들의 순위를 드러내 놓고 대화를 하는 건가? 이 안에서조차 줄 세우기를 하는군.’
민구는 자신의 현황을 점검했다.
인간, 박민구.
소속 지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 내 구원자 중 17위.
즉, 방금 채널에서 본 16위, 쾌라는 인물이 이쪽의 바로 위에 버티고 있는 구원자인 것이다.
그것도 북쪽 어딘가에서 지내고 있을…….
‘…….’
민구는 소속 지역이라고 표기된 국가명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슥.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곁에 서 있는 중성에게 옮겨 갔다.
전직 외교부 차관보이자 남한의 1위 구원자 박정우를 보좌해 온 참모.
이 사내라면 갑작스러운 역할 변화가 중장기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 함께 고민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긴히 대화 좀 해야겠소.”
민구가 운을 떼자 중성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머리 위를 흘깃 봤다.
“예, 그렇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반면 민구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
“그쪽이 어디까지 짐작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더니 턱을 긁적이며 지금은 까맣게만 보이는 북녘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 북한 구원자가 돼 버렸소. 지금 놈들이 대화하는 것까지 보고 있는데.”
“……뭐, 뭘 보고 계시다고요?”
* * *
오후 7시 24분.
대치동과 일원동 사이로 새하얀 헬기가 날아들었다.
“전방 1시 방향입니다.”
진입로를 발견한 용헌이 정우에게 보고했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생성된 이번 진입로는 비교적 일반적인 형태였다.
거대한 터널처럼 세로로 세워져 있었는데, 이미 일대를 장악한 지 오래돼서 사방에 공명수와 시커먼 안개가 가득했다.
“아…… 저게 진입로입니까?”
도로 공사 출신의 남성, 한경래가 입을 쩍 벌리며 물었다.
그가 비록 반포에서 신사동까지 걸어서 이동해 봤다지만 진입로를 직접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저 안에서 어떤 것들이 나오는지 상상도 못할걸요.”
동훈이 정우를 대신해 경래에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맞은편의 소희를 흘깃 봤는데, 그녀 역시 진입로와 공명수 군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달싹거리는 입술과 크게 벌어진 콧구멍. 사람인 이상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용헌 씨, 저 앞에 큰 간판 달린 건물 보이십니까? 10층이 좀 안 되어 보이는데.”
이윽고 정우가 착륙 지점을 정해 주기 시작했다.
“예, 보고 있습니다. 일단 저리로 갈까요?”
“네, 옥상에 착륙해서 대기하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더니 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예나 씨가 헬기 좀 맡아 주세요.”
“예……? 제가요?”
예나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정우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정우가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충분할 겁니다.”
예나의 정수량을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5만 개 정도면 진입로가 완전히 닫힐 때까진 헬기를 지킬 수 있을 거란 뜻이다.
두두두두…….
그사이 헬기는 착륙 지점에 근접하고 있었고, 정우도 ‘낙하’를 위해 출입문 손잡이를 쥔 채로 몸을 틀었다.
“……?”
이에 용헌과 동훈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정우를 쳐다봤다.
지금 자세만 보면 당장이라도 맨몸으로 다이빙을 할 것 같았으니까.
“저기 정우 씨, 그럼 전 보호막만 두르…….”
뭔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한 예나가 정우에게 명확한 지침을 요청했으나 이미 출입문이 열린 뒤였다.
드르륵!
“헉!”
“미쳤……!”
정우는 기겁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서 헬기 바깥으로 튕기듯 도약했다.
그가 착륙지로 지정해 준 건물은 공명수 군락의 안개에서 불과 2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덕분에 실시간으로 안개가 다가오는 게 보일 정도였고, 이에 예나는 놀랄 겨를도 없이 보호막을 펼쳐야만 했다.
파아앗!
얼마나 기를 쓰고 있는지 꽉 물린 예나의 입술에서 핏물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오로지 헬기 바깥으로 쏠려 있었다.
정우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기 무섭게 맞은편의 안개 속에서부터 시커먼 장어 떼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끼르룩, 끼룩!
몸길이 3미터. 둘레도 웬만한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괴물이 천여 마리씩 뭉쳐서 솟아오르니 공간이 통째로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별 의미 없을 걸 알면서도 경래가 사색이 되어 헬기 출입문을 닫았고, 거의 동시에 정우가 두른 보호막에서 수천 개의 가시가 뿜어져 나왔다.
쉬이이잇!
“……!”
헬기 안의 동공들이 최대로 확장된 것도 이때.
여태 정우를 어디까지나 ‘인간’으로 인지하고 있던 외부인들의 머릿속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광경이었다.
구원자를 덮치려던 장어들은 난데없이 몸을 쑤시고 들어온 가시 세례에 산산이 찢겨 나갔고, 정우는 허공에 흩어진 체액 사이를 헤치며 빠르게 낙하했다.
그러곤.
쿠웅!
10층짜리 건물 옥상에서도 들릴 정도의 굉음을 내며 검은 안개 속에 착지했다.
“…….”
더는 시야에 정우의 모습을 담을 수 없게 된 헬기 내부엔 이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러자 진땀을 흘리며 보호막을 유지 중인 예나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듯 이야기했다.
“내가 저런 걸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거 같나요. 지금 2위니 3위니 하는 사람들도 저 정도까진 아닐 거예요.”
사실상 부기장 정소희를 저격하는 멘트였다. 저런 괴물의 비호를 받으며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행운이라는 거다.
“구원자들 사이에 순위 같은 게 있습니까……?”
먼저 흥미를 보여 오는 도로 공사 출신의 한경래.
그는 몇 차례 사선을 넘어 본 적이 있어서 ‘안전’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동훈이 해 줬다.
“상위 다섯 구원자만이 진입로를 닫을 수 있고, 그중에서도 1위만 성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역이라 하시면……?”
“안전지대죠. 저 괴물들이 못 들어옵니다.”
동훈이 아까 그 장어들을 떠올리면 된다며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물론 성역이라고 해서 완벽히 안전한 건 아니고, 1위 역시 언제든 바뀔 수가 있기에 성역이 언제고 유일한 안전지대일 거란 보장도 없다.
그러나 동훈으로선 현재 1위, 박정우가 유일무이한 대안임을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봐도 정소희는 살려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인 인물이었으니까.
‘아까 보니 꽤 긴장하는 것 같긴 해도 혼이 나가는 것 같지는 않던데.’
만약 소희가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박정우…… 또는 다른 성역의 인물들을 태우고 비행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
동훈이 미묘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자 그녀도 시선을 감지하고서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러다 자신이 뭐라도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느꼈는지 입술을 들썩거렸다.
“저 사람은 이미 충분히 강한 데다가 전용 파일럿도 갖췄으면서 왜 나까지 끌어들이려는 거죠?”
드디어 나온 소희의 첫 질문.
“아, 이건 동종 업자가 대답해 주는 게 더 와닿을 거 같은데요.”
동훈이 희미하게 웃으며 용헌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하지만 용헌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 누구의 예상보다도 훨씬 과격했다.
“당신이 대체 뭔데 계속 비싸게 구는 겁니까? 부기장이고 뭐고, 어차피 죽고 나면 아무 의미 없는 거 아닌가?”
“……?”
동훈조차 여기까진 생각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소희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용헌을 쳐다봤다.
“그렇게 고고하게 뒈지고 싶으면 당장 내려요. 어쨌든 정우 씨 덕에 여태 살아 있는 거 아닙니까? 빨리 죽어서 자리라도 만들어 주든가, 아니면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키십시오. 당신, 지금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는 거라고.”
다행히 기체가 완전히 착지한 상태라 그 누구도 용헌이 상체를 완전히 틀어 뒤를 보고 있는 것에 불만을 제기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대화가 이쯤 왔으면 어찌어찌 일이 잘 풀리더라도 ‘파일럿’ 간의 끈끈한 동조 따위는 기대할 수 없으리라.
“…….”
성난 용헌의 말에 소희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굳은 표정으로 기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육중한 울림이 싸늘해지기 시작한 기내 분위기를 한 차례 흔들었다.
쿠우우웅!
“아. 정우 씨군요.”
동훈이 과장된 몸짓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진입로가 있던 방향으로 눈을 돌렸고, 이어서 나머지 일행도 제각기 상체를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
검은 안개를 뚫고 쏘아지는 검푸른 섬광은 폐쇄 중인 진입로에서 나오는 것일 터.
곧 또 한 차례 진동이 발생하더니 일대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는…….
“어?”
헬기 안, 민간인들의 입에서 여느 때와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써 진입로를 지우면 그곳에 있던 모든 게 사라진다는 사실에 경악한 거다.
“잠깐…… 다 어디 갔나요?”
한경래, 전직 한국 도로 공사 건설 계획팀장.
그가 허망함 가득한 눈빛으로 허허벌판이 된 지역을 몇 번씩 훑고 있자 이를 본 동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게 앞으로 여러분이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