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격변(3)
오후 8시 11분.
마침내 민구가 모두를 이끌고 성역으로 복귀했다.
커다란 수레에 다량의 음식과 밤을 버티게 해 줄 조명, 방충망, 변압기 등을 잔뜩 싣고 왔으니 금의환향이라 할 만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역 보호막의 알림을 받고 일찌감치 마중을 나온 선웅이 민구를 맞이했다.
이 대리자의 뒤론 가운 차림의 의사들이 일렬로 서 있었는데, 혹시 모를 응급 상황에 대비해 선웅을 따라 나온 것이었다.
즉, 이제 성역으로 환자가 급히 실려 와도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하다는 거다.
‘그새 제법 구색을 갖췄군…….’
민구는 경직된 모습의 의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왜인지 조련사를 떠올렸다.
냄새가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애를 쓰던 그 조련사 말이다.
저들을 처음 만났을 당시 민구가 내린 진단은 ‘살릴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구가 송두리째 곤두박질하는 이 시국에 119를 부른다고 구급차가 달려올 리 없고, 갑자기 의사를 만난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직접 보고 오는 길 아니던가.
남양주의 공무원들이 나름 큰 결심을 해서 유지 중이던 제2청사의 공동체도 결국은 일주일, 보름, 한 달…… 그러니까 오로지 지구 폐쇄 기간만이라도 살아 있어 보겠다는 생각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지구 폐쇄 이후, 그리고 단순히 먹고 자고 살해당하지 않는 문제 이상을 고려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물론 단 한 군데, 이곳만 제외하고.
“…….”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민구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의사들을 향해 물었다.
“냄새…… 아니, 그 호랑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에 세브란스 의료진의 리더인 윤재희 교수가 저 멀리 보이는 천막을 가리켰다.
“수술은 잘 끝났고, 지금은 회복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조만간 기본적인 활동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다행입니다. 큰 신세를 졌군요.”
민구가 고개를 꾸벅이며 악수를 청하자 윤 교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오른손 대신 왼손을 내밀었다.
“아.”
뒤늦게 윤 교수의 오른팔이 성하지 않음을 발견한 민구.
“사연이 깁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번만큼은 이쪽으로 하시지요.”
윤 교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고, 곧 민구가 왼손 악수에 응했다. 아주 힘차게.
탁!
“이곳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민구의 표정 역시 적잖이 복잡했지만 입술만큼은 애써 웃고 있었다.
한편 중성은 두 중년 사내의 힘찬 악수를 뒤로 한 채 성역 중심부를 유심히 살피느라 바빴다.
‘맙소사. 아직 일과가 끝난 게 아니었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는 뼛속까지 공무원이었다.
심지어 민구와 윤 교수가 악수를 하는 동안에도 내일 처리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오전 8시 10분에 조례 진행. 이번엔 어떤 안건부터 다룰 것인가?」
하루 사이에 온갖 직업군이 편입했고 북의 구원자 박민구라는 큰 변수도 생겼으니 정말 많은 것을 논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 중성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례는커녕 당장 처리해야 할 일만 해도 아직 산더미임을 일러줬다.
중심부 한쪽에 수백에 달하는 사람이 하나같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또 뭡니까? 설마 전부…….”
중성이 아니라고 믿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웅을 쳐다봤으나 이변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희끼리 판단하기엔 모호한 부분이 많더군요. 그나마 많이 걸러 내서 저 정도입니다.”
“…….”
답을 들은 중성은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멀찍이 도열한 군중을 응시했다.
저들이 전부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외부자였던 것이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던 겁니까?”
중성의 물음에 선웅이 손목시계를 봤다.
“가장 오래된 사람이 3시간쯤 됐을 겁니다.”
“음…….”
중성은 침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아무리 자신이 외근 중이었다고는 하나 저렇게 많은 사람을 3시간 가까이 세워 뒀다는 게 납득되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성역에 체류 중인 ‘투표권자’도 셋이나 되지 않던가?
명일, 태휘, 선희.
각각 성향마저 다른 인물이니 충분히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논의를 주도하지 않았던 거구나. 살인자가 되는 게 두려워서.’
비로소 중성은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그려 볼 수 있었다.
총살형을 집행할 때 어째서 사형수보다 더 많은 집행자를 들이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누가 쏜 총알에 사형수가 사망했는지 알기 어렵도록 해서 집행자의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역에서의 처형, 즉 선별이라는 것은 정반대다. 집행자보다 사형수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이렇다 보니 집행자인 투표권자들의 부담이 커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미루거나 피하기만 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돼. 자신이 책임에서 멀어졌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도 사력을 다하지 않게 될 테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중성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존속을 위한 선별의 특수성을 온몸으로 겪어 온 자들로 구성한 것이 바로 ‘최초의 의회’, 투표권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아직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봅시다. 그리고 투표권자도 다 불러 모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중성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선웅의 입술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 * *
오후 8시 14분.
중성의 부름에 따라 성역에 체류 중인 모든 투표권자와 주민들이 한데 모였다.
그것도 여전히 초조한 얼굴로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의 외부인 앞에 말이다.
두 그룹 사이의 거리는 약 12미터.
외부인들을 철조망 안에 가두거나 밧줄로 포박해 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성역의 모두가 이 자리를 매우 불편해했다.
사각 대형으로 열을 맞춘 외부인들의 모습이 마치 포로수용소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반면 소총으로 무장한 성역의 주민들은 누가 봐도 악랄한 가해자, 학살자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학살자였다. 성역의 대지 한쪽이 왜 유난히 울퉁불퉁하겠는가.
“…….”
중성은 잠잠한 모습으로 주민들을 둘러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부터 눈앞에 보이는 보류 인원, 216명 중 누구를 죽일지 논의하겠습니다.”
“……!”
매우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워딩. 좌중의 일부는 중성이 진노했음을 직감했다.
평소의 그라면 양측 모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부드러운 단어를 선택했을 테니까.
“무슨 일이죠?”
“우리를 다 모아서 진행할 필요까지 있나…….”
술렁이기 시작하는 성역의 주민들.
오히려 이 상황에서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 외부인들이었다.
지난 3시간 동안 나름대로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하고 납득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것이다.
또한 ‘나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희망이 그들을 붙들고 있기도 했다.
왜냐하면 앞서 사망한 외부인들도 적지 않아서였다.
무기를 숨기고 있다가 기습을 감행했거나 그 어떤 장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일찍이 처리됐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이 자리의 모두는 서류 전형을 통과한 구직자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우리끼리만 모여서 처리해도 될 것 같은데.”
태휘가 중성의 뒤편으로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중성이 전에 없이 무뚝뚝한 말투로 대사를 뱉었다.
“우리만으로 처리가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이러는 겁니다. 게다가 수색조 복귀가 더 늦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밤새 저 사람들을 세워 놨을 건가요? 그러다가 바깥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대거 몰려오면?”
“…….”
충분히 현실성 있는 이야기였기에 태휘는 무어라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중성의 말대로 신뢰가 쌓이지 않은 외부인을 수백씩이나 들여놓고 있는 건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태휘는 불안한 표정의 성역 주민들을 돌아봤다. 그는 중성이 일종의 충격 요법을 쓰려는 것 같다, 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 중성의 계획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있었다.
“자, 제가 안건 하나를 투표에 붙이겠습니다.”
“예?”
이 모든 상황을 노트에 기록 중이던 명일이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고, 나머지 투표권자인 태휘와 선희도 멍한 얼굴로 중성을 바라봤다.
“이 와중에 투표를 또 한다고요?”
태휘가 이렇게 되묻는 사이 중성이 명일에게 노트 한 페이지를 요청했다.
그러곤 건네받은 흰 종이 위에 무어라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
“무슨…….”
또다시 장내가 술렁였고, 성역의 주민뿐만 아니라 외부인들까지도 그의 행동에 시선을 모았다.
슥.
이윽고 메모를 마친 중성이 허공으로 종이를 들어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으실 겁니다. 직접 읽어드리겠습니다.”
「초대 투표권자」
|업무로 인한 투표 미참여자.
조선웅, 김용헌, 최동훈.
|현역 투표권자
강명일, 김중성, 박태휘, 조선희.
그가 모두의 앞에 공개한 이것은 성역 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투표권자 전원의 숫자와 이름이었다.
“정리해 드리면, 이곳에서의 생사여탈을 비롯한 대부분의 행정이 현역 투표권자 네 명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겁니다.”
중성이 이렇게 말했지만 이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성역의 주민 대다수가 저들에 의해 구제된 사람들이었으니까.
당연한 특권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일까. 중성의 다음 대사가 불러일으킨 여파는 엄청났다.
“적어도 제 생각엔 투표권자가 더 필요합니다. 다만 자신이 내린 판단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명확히 아는 사람들이 필요하죠. 언제든 본인 판단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건 물론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다분히 기존 투표권자들을 저격하기 위함이었다.
“…….”
방금 중성에 의해 언급된 현역 투표권자 3인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지금 중성이 정치적 싸움을 하자는 게 아님은 잘 알았다.
“그래서, 지금 올리고 싶으신 투표 안건이란 게.”
태휘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하다 입을 도로 닫았다. 마침 중성이 아까 그 종이에 뭔가를 더 적고 있어서였다.
스슥.
바쁘게 움직이는 중성의 펜이 새로 써낸 것은 바로.
「2대 투표권자」
“투표권자를 더 뽑읍시다. 물론 제게 누굴 임명할 권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우 씨께서 성역 운영에 한해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해 준다고 하셨죠. 그러니 우리가 투표를 통해 2대 투표권자 선출 여부를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초대 투표권자 중에 더는 이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분들은 이 기회에 자리를 내려놓으십시오. 이건 굳이 투표에 붙이지 않아도 되겠지요.”
“…….”
전후자 모두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럼…… 만약 2대 투표권자를 뽑기로 한다면, 누굴 기용할 건가요?”
이건 선희의 질문.
이에 중성이 너무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는 나머지 주민들을 눈으로 훑었다.
“이건 남이 시킨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출마하십시오. 대신, 오늘 투표권자로 뽑히신 분들은 이번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성이 말한 ‘이번 문제’란 보류 인원 216명의 생사 결정을 이르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련의 대화를 함께 들은 사람들 말이다.
“아…….”
논의가 여기까지 이르자 은근히 고무됐던 일부 주민의 기세가 확 사그라졌다.
뒤늦게 이번 안건의 무게와 엄중함을 깨달은 거다.
하지만 도리어 눈빛이 날카로워진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강남 세브란스 의료진의 우두머리인 윤재희 교수, 경기 북부 광역 수사대의 형사 출신인 이성태.
그리고.
“그 후보엔 정말 아무나 출마할 수 있는 겁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7위 구원자이자 대한민국 최상위 구원자 박정우의 아버지인 박민구.
“……?”
이 소리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중성만큼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대신 반드시 성역에 속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