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37
138화. 개미지옥(1)
수면 부족.
성역의 보안을 책임지는 선웅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의외로 수면이었다.
다른 주민들은 여럿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지만 외부자를 직접 처리해야 하는 선웅은 대체자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짧으면 수십 분, 길어야 한두 시간 만에 일어나서 살인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동이 트면 외근을 나가야 하는 민구에게 교대 근무를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
따라서 종일 피곤함에 시달려야 하는 게 그의 숙명이었고, 덕분에 편두통까지 달고 살게 됐다.
“…….”
여느 때처럼 반사적으로 잠에서 깨어난 선웅은 조용히 머리맡을 더듬었다. 시계를 보기 위해 손전등을 찾는 거였다.
그러자 그의 곁에서 대기 중이던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잠에 든 지 얼마 안 되셨습니다.”
다름 아닌 강성호였다. 투표권자 연임에 실패한 조선희의 남편이자 현재는 잡부에 가까운 비특기 인원.
그래도 방주에 탑승한 시점이 꽤 이른 편이었기에 비교적 신뢰도가 높다고 인정받아 대리자 전담 불침번 중 하나로 지정된 상태였다. 성역 내에서의 대리자 암살을 방지하는 역할 말이다.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가 않네요.”
선웅은 울적한 얼굴로 손전등을 집어 들면서 한숨을 쉬었다.
틱.
손전등의 전원을 켜자 비로소 손목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현재 시각, 오전 4시 12분.
동이 트기까지 대략 1시간 남은 시점이었다.
“그사이 한 명도 안 왔나요?”
자신이 자는 동안 외부자가 온 일이 없었냐는 물음이다.
이에 성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예,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밤이라 다들 쉬는 걸까요?”
“글쎄요.”
선웅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앞서 북에서 도망온 민간인을 여럿 만나 보지 않았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극도의 공포심에 꽉 붙들려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이동했을 터.
‘혹시 이곳에 닿기도 전에 다 죽은 게 아닐까?’
선웅의 시선이 북녘으로 향한다.
박민구의 말에 따르면 민간인뿐만 아니라 구원자들조차도 흉악한 북의 환경을 이겨 내지 못하고 남하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 북측 민간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달려 봐야 결국엔 구원자들에게 따라잡히게 되지 않았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지만 선웅은 왜인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좀 더 주무시죠. 내일…… 아니, 오늘도 보통 바쁜 게 아닐 것 같은데.”
성호는 이제 어두컴컴한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어제 저녁 박민구의 지휘 아래 설치된 조명들이 성역 경계부를 드문드문 비췄고, 그 밑으로 동초 근무 중인 주민들의 실루엣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예,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웅도 성호의 시선을 따라 성역을 둘러보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에 쉽게 들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런 기회가 또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강박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타앙!
커다란 쇳덩이를 맞부딪힌 것 같은 소리에 도로 눈을 번쩍 떴다.
“뭣……!”
선웅은 성역 보호막의 경고음인 줄 알고 튕기듯 몸을 일으켰으나, 그새 사위가 거짓말처럼 밝아져 있는 걸 보고서 뒤늦게 깨달았다.
‘맙소사.’
황급히 손목을 들어 보니 손전등 없이도 시계의 시침이 뚜렷하게 보였다.
오전 8시 정각.
장장 4시간 동안 아무 일 없이 밤이 지나간 것이다.
그가 고개를 움직여 바로 곁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성호였던 전담 불침번이 명일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명일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어오는 순간.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네 번째 날이 찾아왔습니다.」
문제의 그 문구가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무엇으로도 가리거나 지울 수 없는 절대적인 문자열.
이어서 지구가 브리핑에 앞서 운을 뗐다.
「먼저, 제가 통보받은 사안에 대해서 전달 드리겠습니다.」
“아.”
선웅은 문구를 눈앞에 붙인 채로 정우가 머물고 있는 의사당을 향해 달려갔다.
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이 브리핑에 대한 정우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강하게 이끌었다.
타탓!
더듬거리는 발걸음.
그사이 시작된 지구의 4일 차 브리핑.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이 한 단계 낮아졌습니다.
|지구의 정수 총량이 2% 감소했습니다.
|행성 폐쇄까지 39일 남았습니다.
‘2퍼센트……?’
선웅이 여기까지 들었을 즈음 의사당 입구에 닿았는데, 놀랍게도 이미 문이 열려 있었다.
일찌감치 중성이 먼저 들른 것이다.
“선웅 씨, 어서 오십시오.”
정우와 함께 테이블에 마주 앉은 중성이 문 쪽을 슬쩍 바라보며 목례했으나 선웅은 시야를 가린 문구 탓에 그걸 볼 수 없었다.
“다들 보고 계신 거지요? 이번엔 총량이 2%밖에 감소 안 했습니다.”
실내 분위기가 너무 태연한 탓에 선웅이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정우가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아요. 전 곧 투표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그러더니 지구의 정수 총량에 대한 의견을 덧붙였다.
“정수 유출량이 줄어든 건 좋은 소식입니다. 각성자들의 수준이 많이 올라서 괴물들에게서 정수를 잘 지키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는 건 민간인 숫자가 엄청나게 줄었다는 뜻도 되겠죠.”
즉, 구원자들이 길바닥에서 인재를 건질 수 있는 시기는 다 지나갔다는 거다.
이제 인재를 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구원자의 공동체를 습격하는 일이 됐다.
스으읏.
그사이 정우의 의식 속에서 평가관 다467이 몸을 일으켰다.
-곧 선두 특혜가 발동됩니다. 인간, 박정우 님께서는 현재 소속 지역 내 1위 구원자이므로 특혜 내용을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소속 지역 내 1위. 반가운 소리다.
정우는 평가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의식이 어딘가로 전이됐다.
목제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그의 몸이 사각형의 푸른 막에 가둬진 것도 이때였다.
팟.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보호 조치’ 방식에 선웅과 중성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러자 의사당 바깥에서부터 시끌벅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잠에서 깨어난 수십의 성역 주민이 몰려와 있었다.
이 나라 1위 구원자가 어떤 방식으로 ‘선두 특혜’에 참여하는지 보러 온 것이다.
* * *
한편 정우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문구를 침착하게 읽고 있었다.
|특혜 선택을 위해서, 박정우 님에 대한 보호 조치가 개시됐습니다.
|특혜 선택에는 10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내에 특혜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 특혜가 발동됩니다.
무려 세 번째 선두 특혜 참여.
그동안 단 한 번도 남에게 이 자리를 허락하지 않다니…… 용하다고 해야 할지 독하다고 해야 할지, 정우도 무어라 진단할 수 없었다.
그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달려왔을 뿐이다.
|공통 특혜부터 선택합니다.
|본 특혜는 행성 전체에 적용되며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1] 폐쇄 절차 기한 1일 감소. [2] 진입로 생성 속도 30% 증가. [3] 진입로 최대 개수 10% 증가. [4]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 1단계 하락. [5]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1명 희생.이윽고 시작됐다.
회랑에서 본 바에 따르면 지구는 ‘지역’을 총 74개로 분류해 놨다.
다시 말해서 선두 특혜의 유권자도 74개체라는 뜻. 그러니 한 표 차이로 결과가 달라지는 일도 충분히 현실성 있었다. 신중히 투표해야 하는 거다.
‘우선 3, 4번은 피하자. 5번도 제외. 그럼 남는 게…….’
항목이 다섯 개뿐이니 세 개를 제외하면 1번과 2번만 남는 셈이었다.
행성 폐쇄까지 남은 시간은 오늘을 포함해 39일.
여기에서 하루를 감소시켜 버린다고 해도 당장 큰 영향은 없겠으나…….
‘이제 4일 차야. 폐쇄 절차가 시작된 뒤로부터 매일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1번이야말로 가장 큰 손해 아닐까.’
끝내 정우의 시선이 2번에 닿았다. 다시 한번 진입로 생성을 가속하는 거다.
날짜가 바뀌었으니 그만큼 더 강한 놈들이 나오겠지만 각성자들의 평균 수준이 상당히 올랐으나 잘 버텨 줄 거란 기대가 있었다.
‘2번. 차라리 진입로를 전부 빨리 불러내서 1차 임무를 완료하는 게 낫다.’
틱.
정우는 최종 결정으로 다시 2번을 골랐다.
그러자 얼마 간의 대기 시간이 주어지더니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개별 특혜를 선택합니다.
|본 특혜는 선택자에게만 적용됩니다.
1. 확답
-현재 직접 폐쇄할 수 있는 진입로의 위치를 모두 표시합니다.
2. 강림
-지정한 대상과 함께 소속 지역 내 원하는 지점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3. 전시안
-원하는 조건에 맞는 존재를 총 2회 찾아냅니다.
4. 잠행
-침입자들에게 먼저 공격받지 않습니다.
5. 성역
-지정한 구역 내에서 외부인의 정수 사용을 금지합니다. 진입로를 직접 폐쇄한 구역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
정우는 고민할 것도 없이 결론을 내렸다.
‘개별 특혜로 강림을 선택하겠습니다.’
강림. ‘소속 지역 내’라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지금은 북의 구원자들이 남하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큰 단점이라고 볼 순 없었다.
언젠간 북의 1위도 이리로 내려올 테고, 여차하면 국내 2위를 저격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을 테니까.
더 나아가 불시에 또 다른 지역의 구원자가 침입해 올 경우에도 사용할 여지가 있었다.
스아앗.
얼마쯤 기다렸을까. 눈앞의 문구가 녹듯이 사라지더니 차단되어 있던 감각들이 하나씩 복구되기 시작했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 선택을 마쳤습니다.」
…….
「투표 결과에 따라, 지금부터 진입로 생성 속도가 30% 증가합니다.」
예상대로 각국의 구원자가 2번에 표를 몰았다.
정우도 덕분에 조금이나마 안심했지만 다음에 나타난 문구가 모든 걸 바꿔 버렸다.
「진입로 생성 속도가 임계점에 이르렀으므로 융합을 시작합니다.」
“뭐……?”
이때 정우는 특혜 선택을 마치고 보호 조치에서 풀려난 상태였기에 육성을 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문구에 놀란 건 의사당에 함께 있던 선웅과 중성도 마찬가지.
“유, 융합이라니요? 저게 뭐죠?”
선웅이 정우라면 알 것 같다는 듯 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저도 들은 바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사전에 아무런 경고 없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이것도 우주식 특혜란 말인가.
‘그럼 내일 또 2번을 고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임계점에 이르렀다면서.’
정우는 당혹감을 느꼈다.
2번 항목에 이런 ‘함정’이 숨겨져 있었다면 다른 항목에도 유사한 문제가 없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미칠 노릇이군.’
그가 테이블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 곧 바깥에서부터 박민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진입로가 어떻게 된다는 거냐?”
이에 정우가 민구를 흘깃 보고선 다시 바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는 발치의 패스파인더, 진입로 표식을 보고 있는 거였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아버지도 떠날 채비를 하세요. 바로 이동할 겁니다.”
“어디로?”
민구의 물음에 정우가 발치에 시선을 묶어 둔 채 손을 들어 북동쪽을 가리켰다.
“저쪽이면 철원쯤 아닌가요. 적어도 진입로가 하나는 있어요. 거기서 북쪽 구원자들을 불러 모을 겁니다. 놈들도 패스파인더가 있을 테니 찾아오기 쉬울 겁니다.”
139. 개미지옥(2)
오전 8시 16분, 남양주의 성역.
정우는 정말 바로 헬기를 띄웠다.
대동한 인원은 헬기 조종사인 용헌과 주치의 동훈, 북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알려 줄 민구까지 셋.
아침 식사는 헬기 안에서 해결하기로 했기에 성역에서 챙겨 준 식량 박스 하나만을 챙겼다.
두두두두…….
한편 성역의 주민들은 점점 멀어지는 백색 헬기를 멀거니 바라봤다.
일부는 아직도 1위 구원자를 목도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고, 또 일부는 오히려 안심하는 기색을 비쳤다.
박정우가 아무리 성역을 세운 존재라지만 셀 수도 없는 사람을 죽여 오지 않았는가. 기본적으로 그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또 일부는…….
“이제 저희는 어쩌죠?”
명일이 허공에 시선을 박아둔 채 곁에 선 중성에게 물었다.
이에 중성이 기계같이 또렷한 발음으로 준비해 놨던 대사를 읊었다.
“조례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졌습니다. 논의할 안건을 제안받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확정 지어야겠지요. 제가 생각해 둔 안건도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명일이 물은 건 그게 아니었다.
“음……. 그것도 그렇지만 당장 수색조를 보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버님이 정우 씨를 따라가 버리셨는데.”
이제 성역에서 ‘아버님’이란 박민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나 다름없었다.
단, 중성에게만큼은 예외. 그는 매번 민구를 남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불렀다.
“아, 그러네요. 당장 민구 씨를 대체할 사람이 없군요.”
그러면서 중성의 시선이 자연스레 저만치 떨어져 있는 이예나와 정한일에게 닿았다.
정우가 강남 세브란스에서 데려온 두 각성자. 각각 5만, 4만 개의 정수를 가지고 있다.
‘가까운 곳이야 조심히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먼 지역까지 보내기엔 좀 불안해. 좀 더 제대로 된 각성자가…….’
중성이 여기까지 생각하는 동안 멀찍이 떨어진 잿빛 천막이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
이어선 천막 표면이 불룩거렸는데, 실루엣만 봐도 인간의 덩치가 아니었다.
“어?”
끝내 중성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만 탄성.
여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20만 개가 넘는 정수를 보유한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는 걸.
“저거…… 아니, 저분?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중성이 뜬금없이 이름을 묻자 이때까지도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명일이 비로소 그를 쳐다봤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호랑이요.”
슥.
중성의 손가락이 이제 막 입구가 벌어지고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아, 맙소사.”
생각 없이 중성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명일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식육목 고양잇과의 맹수이자 구원자이기도 한 ‘냄새’가 천막 바깥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 * *
오전 8시 24분.
정우를 태운 헬기는 철원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나아갔다.
그사이 민구는 오묘한 표정으로 채널에 써 올릴 문구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를 본 정우가 짤막하게 조언해 줬다.
“괜히 사연이 있어 보이게 꾸미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살 겁니다. 간단하게 적으세요.”
“……예를 들면?”
“함께 남하할 사람을 구한다고 해요. 각자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같이 다니자고.”
“동료를 구한다는 말이지……? 정말 놈들이 그런 말을 듣고서 올지 모르겠구만.”
“어차피 17위면 그 채널 안에선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버지보다 더 강한 녀석들이 몰려오겠죠.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스스로 위치를 노출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
다시 말해서, 북의 상위권 구원자들이 보기엔 17위짜리 풋내기가 자살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일 거란 뜻이었다.
물론 철원 근처에 머물고 있는 20, 30위권 구원자들이 정말 협력하기 위해 모여들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그렇게까지 일이 진행된다면 정우로선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울 터였다.
“좋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민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채널로 신중하게 시선을 옮겼다.
아직 닉네임을 확정하지 않은 상태라 대화에 참여하려 하니 닉네임부터 정하란 문구가 나타났다.
이에 민구는 생각나는 대로 닉네임을 정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잠깐. 여긴 북한 채널이잖아. 북한어로 지어야 하지 않나?’
실제로 채널 내에 외래어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흑호’, ‘쾌’ 같은 한자어가 종종 보일 뿐. 심지어 실명을 그대로 쓴 것 같은 녀석도 여럿이었다.
“저기, 누구 북한어 좀 아는 사람 없습니까? 닉네임을 지어야 하는데 웬만하면 북한 사정에 맞게 짓는 게 좋지 않겠소?”
이 말에 각자 아침 식사 중이던 일행들이 그를 쳐다봤다.
“맞는 말이네요.”
정우가 동의했고, 동훈은 아쉬움을 표했다.
“성역에서 공모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탈북민 출신이 일부 있는 걸로 아는데.”
이것 역시 맞는 말.
반면 용헌은 아는 게 좀 있는지 조종간을 붙든 채로 뺨을 들썩였다.
“그…… 삼검불, 어떠십니까? 언젠가 소설에서 본 단어인데 북한어가 맞을 겁니다.”
“삼검불이요?”
생소한 단어에 민구가 되묻자 용헌이 뒤를 슬쩍 바라봤다.
“예, 단어 그대로입니다. 삼에서 떨어져 나온 검불이란 뜻인데 어감이 마음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더 없소?”
“예.”
대화는 여기에서 끝났고, 민구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닉네임을 입력했다.
그러자 대번에 승인이 떨어졌다.
| 확실합니까? 이후 닉네임 변경은 불가능합니다.
…….
| 닉네임이 확정됐습니다.
“바로 돼 버렸네.”
이제 남은 건 북의 구원자들에게 헛소리를 해서 철원으로 모이게 만드는 것.
민구는 몹시 긴장한 자세로 천천히 채팅을 했다.
[17] 삼검불 : 혹시 지금 남쪽으로 가는 분 계십니까? 괜찮다면 각자 지낼 곳을 찾을 때까지 함께 다녔으면 합니다.여태 북한 구원자들의 대화를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건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서로 은근히 정보를 공유하며 도움을 주는 분위기이긴 했으나 함께 움직이자는 이야길 노골적으로 하는 걸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첫 반응이 채널에 올라왔다.
[13] 서정규 : 어딥니까? 지금.정우의 예상처럼 순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총대를 멘 것일 뿐 여기에 답하는 순간 채널 내 모든 구원자가 민구의 위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17] 삼검불 : 철원 북단입니다. [13] 서정규 : 아, 이미 내려가셨구먼.13위는 아직 위쪽에 머물고 있는 듯.
민구가 채팅을 하느라 허공에 시선을 계속 두고 있자 정우가 넌지시 물어 왔다.
“어떻게 됐죠?”
“13위 녀석이 관심을 보이긴 하는데…… 당장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머지는 별말이 없는 상태고요?”
“어, 다른 대화도 다 끊겼다.”
“그럼 지금 전부 대화를 주시하고 있는 상태인 거예요. 다들 13위가 합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아마 15위 밑으론 오히려 철원을 피해서 지나갈 겁니다.”
정우는 그러면서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과 진입로 표식을 각각 살폈다.
우주에서 만들어 준 애드온이라 그런지 패스파인더의 추적 기능은 기대보다 섬세했다.
민구를 방주에 태우고 나서부턴 정수 표식이 더는 그를 추적하지 않은 것이다.
굳이 아군을 추적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일 터.
따라서 지금 정수 표식이 가리키고 있는 건…….
‘설마 진입로 근처인가? 완전히 같은 방향인데.’
정우는 두 가지 표식이 겹쳐 있는 것을 보면서 헬기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헌 씨, 지금 위치가 어디쯤이죠?”
“이미 철원 남단입니다. 진입로가 철원에 있다면 5분 이내에 육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헬기는 정우가 지시한 대로 북쪽을 향해 곧게 날아가고 있었다.
여태 보아 온 도시들과 달리 산지의 비율이 상당했고, 도로 근처엔 군용 차량과 탱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우가 서울 근교에서 구원자 1위로 발돋움하는 사이 철원에서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었던 거다.
“한때 군인들이 도시 수비를 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조종석의 용헌이 짤막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철원 군청이 있는 갈말읍 근처에 이르자 K4 유탄 기관총이 실린 트럭 따위가 사방에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 있는 군인은 없어 보였다. 다 죽었든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일찍부터 진입로가 생겨났던 것 같네요.”
정우는 휑한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이렇다 할 핏자국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저건 1일 차 침입자인 청소부의 특징.
대신 공명수까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진입로 자체는 이곳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즉, 진입로 일대를 초토화한 뒤 정수를 찾아 내려온 청소부들에게 도시가 함락당한 것이다.
“그럼 4일 내내 이곳의 진입로를 아무도 못 건드린…….”
전방을 살피던 용헌이 말을 끊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때 모두가 헬멧에 내장된 헤드셋을 차고 있었기에 그의 목이 긴장하는 소릴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뭡니까?”
묘한 기색을 알아챈 동훈이 조종석 쪽으로 상체를 움직였고, 동시에 용헌의 오른손이 북동쪽을 가리켰다.
“저게 설마 진입로입니까?”
“미친.”
용헌을 따라 고개를 돌린 동훈은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민구 역시 제자리에 뻣뻣이 굳은 채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리고 정우는.
“멈춰요! 철원 외곽으로 돌아가서 대기하세요. 만약 뭐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아예 성역으로 복귀하시고.”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친 뒤 헬기 출입문을 열면서 박민구의 왼쪽 어깨를 본인의 팔로 감쌌다.
“지금 무슨……?”
민구가 화들짝 놀라는 사이 정우는 그를 붙든 채 헬기 밖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홰액!
순식간에 두 사람이 사라졌고, 기내에 덩그러니 남게 된 동훈이 출입문을 도로 닫았다.
여전히 손끝이 떨리는 건 결코 봐선 안 될 것을 보아 버린 탓이었다.
두두두두…….
헬기는 이미 기수를 완전히 돌려서 오던 길을 되짚는 중이었고, 용헌은 강박적으로 정면에 시선을 꽂았다.
“대체 무슨 일이.”
용헌은 말을 잇다 말고 다시 힘겹게 침을 삼켰다.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건 동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시작인 느낌이군요. 만약 저런 게 다른 도시에도 있다면…….”
그렇다면 다 죽을 겁니다, 라는 뒷말이 생략됐다.
* * *
쿠우웅!
정우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착지했고, 곧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민구가 경황없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더니 저 멀리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헬기를 보고 나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어지간하구나. 저기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다니.”
“조종사를 잃을 순 없으니까요. 좀 불편하더라도 걸어서 가시죠.”
“너도 저런 건 처음 보나?”
“예.”
정우는 짤막하게 대답한 뒤 이곳 지상에서도 보일 정도로 큼지막하게 변해 버린 진입로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진입로를 중심으로 살이 붙고 있는 거였다. 마치 지점토를 덧붙여 무언가를 빚어 내듯 말이다.
이미 진입로는 벌집과 흡사한 형태로 몸을 불려가는 중이었고, 보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 같았다.
여기에 더해서.
“…….”
진입로의 바로 앞에 정우의 시선을 잡아끄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그가 용헌에게 황급히 피신을 명령한 이유이기도 했다.
‘관처럼 보이긴 하는데. 저게 4일 차 침입자인가?’
비대해진 진입로보다도 더 높이 솟은 관(棺) 형태의 구조물…… 내지는 생명체일지도 모르는 어떤 것.
눈대중으로 봐도 높이가 최소 40미터, 너비도 10미터 이상 됐다.
대낮의 환한 풍경과 극도로 대비되는 시커먼 표면은 이 존재가 지구에서 난 것이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 줬다.
“이대로 쭉 들어갈 거냐?”
민구 역시 정체불명의 초대형 관이 신경 쓰이는지 불안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이에 정우의 시선이 다시 발치로 향했다.
정수 표식은 여전히 진입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진입로의 맞은편에 있다는 뜻이다.
“그쪽 채널에선 아직 별 반응이 없죠?”
“아직은.”
“그럼 놈들이 올 때까지 다른 손님부터 만나 보죠. 저건 아직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그새 진입로가 한층 가까워졌기에 정우는 보호막을 더욱 두껍게 감았다.
어차피 오래 지나지 않아 북에서부터 구원자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굳이 이쪽에서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 않아도 저 관의 정체가 드러날 터.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하지 않았던가.
정우는 북의 구원자들을 선발대로 써먹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