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39
141화 개미지옥(4)
“지금뿐이야!”
끝내 여자가 무모한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정우가 진입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전력을 다해 신체 강화를 한 것이다.
그러곤 시퍼런 궤적을 그리며 반대편으로 냅다 뛰었다.
“…….”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따라 달리지 않았다.
대신 정우가 여자를 쫓기 시작할 때 몸을 던져 막아 내리라고 결심했다.
이미 일이 틀어진 현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시간을 벌어 주는 것.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람 하나 더 있는 거 안 보이나? 보자 보자 하니까.”
북의 17위 구원자인 박민구였다.
그는 여자가 몸을 튕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추격을 개시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허억!”
여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자, 남자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이 미친……!”
“이봐,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사람들이 숨은 곳이나 말해. 조금 있으면 이 일대에 생명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될 테니까.”
민구는 여자를 바닥에 붙들어 둔 채로 남자를 노려봤다.
정우만큼은 아니었지만, 민구 역시 두 사람을 간단히 제압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방금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
비로소 남자의 양손이 허공으로 향했다.
“…일단 대화부터 합시다. 어차피 저희가 직접 안내하지 않으면 절대 찾지 못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사람을 죽이면 전 절대 말을 안 할 겁니다.”
“흠.”
이번엔 민구의 시선이 정우에게 향했다. 어쩔 거냐는 물음이었다.
이에 정우가 세 사람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진입로를 응시한 그대로 입만 움직였다.
“지금은 민간인보다 저쪽이 더 급합니다. 누가 진입로를 건드렸어요.”
그러니 문제의 ‘관’이 반응한 것일 터.
“만에 하나 놈들이 진입로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침입자들이 그걸 주워 가기 전에 제가 정리를 해야 해요. 진입로 쪽으로 자리를 옮기죠.”
일반적인 각성자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대화 주제.
덕분에 사선을 넘나들던 남녀는 자신들의 처지도 잊고서 멍하니 정우를 바라봤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다른 구원자들이 저기에 와 있다고요?”
남자가 이렇게 물었고, 민구가 짤막하게 대답해 줬다.
“북에서 넘어온 구원자들이야. 수십 분 내로 몇 명이 더 올 테고. 그렇게 되면 이 일대는 그냥 개판이 되는 거지. 너희 같은 녀석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
이제 각성자 커플은 사고 회로가 마비된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놔두면 무조건 도망갈 테고. 우선 되는 데까지 끌고 가 보죠.”
이윽고 결단을 내린 정우가 민구를 향해 부탁하듯 말했다.
진입로의 어둠 속에서 이 남녀가 도륙당하지 않도록 재주껏 지켜 달라는 거다.
“뭐? 얘들을 끌고 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럼 여기 남아 계실래요? 다음에 이리로 오는 놈도 아버지보다 무조건 강할 텐데.”
정우의 이 말에 민구가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안쪽도 보통 난리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제가 눈치껏 도와 드릴 수는 있죠. 그런데 여기 남아 버리면 저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좋다. 어떻게든 해보지.”
결국, 두 부자가 일방적으로 각성자 남녀의 거취를 결정했다.
정우는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진입로를 향해 움직였고, 민구는 바닥에 주저앉은 두 사람을 향해 명령조로 일렀다.
“살고 싶으면 일어나. 저 안으로 들어갈 거다.”
* * *
대낮의 어둠.
안개 속으로 몸을 들이자, 각자 두른 보호막의 표면에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가각.
공명수의 어둠이 보호막을 갉아 대는 소리였다.
“으…….”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에 남자는 기가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반면 일찍이 정수 1만 개 시절부터 안개 속을 돌아다녀 본 정우로선 제집에 온 것처럼 평온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이제 다면체 형태를 띠게 된 그의 보호막에선 어둠이 침식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직접 들어와 보니 또 다르네. 정말로 세상이 망해 가는구나.”
민구도 지역 침식을 시작한 진입로에 접근해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안개에 노출된 것들은 진입로를 닫을 때 전부 사라져요. 생명체를 대상으론 실험해 보지 않았지만, 결코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겠죠.”
“……!”
정우의 말에 다들 또 한 번 기겁했다.
바깥에서와 달리 지금은 각자의 보호막으로만 신체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요. 다른 건 몰라도 보호막만큼은 반드시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우의 경고가 무색해질 정도의 광경이 네 사람의 시야를 붙들었다.
쿠웅!
묵직하다 못해 당황스러울 정도의 강한 진동.
정말이지 지축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네 사람 모두 이 진동의 정체가 어떤 존재의 발소리였다는 걸 깨달았을 땐.
“아아…….”
남자의 얼굴부터가 아주 험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성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가 감내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한계치가 박살 난 탓이었다.
하늘을 반쯤 가릴 정도로 커다랗지만, 분명히 직립 보행하는 어떤 존재가 수백 미터 앞에 서 있었으니까.
저 정도면 신장이 얼마나 되는 걸까? 30미터?
허리가 구부정한 걸 봐선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씨발, 저게 뭐야……? 거의 빌딩만 하잖아.”
민구가 본능적으로 안광을 흩뿌리는 사이, 정체불명의 거수(巨獸) 근처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누군가 이 안에서 정수를 사용하고 있는 거다.
“가 봐야겠어요. 웬만하면 놈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뭐……?”
정우는 민구의 되물음을 뒤로 한 채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타아앗!
530만 개나 되는 정수가 그의 몸을 고속으로 실어 날랐고, 이에 따라 점차 괴물의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저게 정말 4일 차 침입자라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놈의 존재감이 크게 불어났다.
고개를 바짝 들어야 놈의 가슴 언저리를 겨우 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쇄골의 윤곽이 눈에 띄었다.
흉부를 좌우에서 꽉 붙들고 있는 갈퀴 형태의 저것 역시 갈비뼈가 맞을 것이다.
외피가 검고 질겨 보인다는 점만 제외하면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머리. 머리가…….
‘헉.’
뒤늦게 놈의 머리를 발견한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진입 속도를 낮췄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육중한 촉수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는 한 15미터쯤 될까.
마치 긴 머리를 뒤로 넘기듯 뾰족한 끝이 바닥으로 향하도록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저게 언제고 휘둘러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놈이 선 자리의 바로 뒤쪽엔 아까 봤던 거대한 관이 활짝 열린 상태로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줄곧 저 안에 촉수로 된 머리를 가진 거인이 누군가 접근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문지기입니다. 진입로로 접근해 오는 존재를 사냥해서 정수를 수집합니다.
평가관 다467이 간만에 먼저 입을 열었다.
‘진입로를 사냥터로 쓴 다고요……? 그 말은 구원자들을 먹이로 삼는다는 거 아닌가?’
4일 차 진입로를 닫을 수 있을 정도의 존재.
즉, 최소 수십만 개의 정수를 보유한 구원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사냥을 하는 특성을 지녔다니… 이건 기존의 침입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란 뜻이었다.
‘미친. 4일 차에 저런 게 들어오면 내일은…….’
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나아가는 사이, 또다시 저 앞쪽에서부터 푸른빛이 번쩍였다.
팟, 파팟!
두세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빛.
‘이 안에 몇 명이나 들어와 있는 거지?’
이와 함께 드디어 ‘문지기’가 움직임을 보였다.
구부정하던 허리를 반대편으로 구부린다 싶더니.
드드득.
갑자기 상체를 측면으로 회전시켰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려 놨던 촉수를 크게 휘두르기 위해서였다. 마치 상모를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쐐애애액!
짤막한 놈의 움직임과 달리 기다란 촉수는 어마어마한 기세로 허공을 휩쓸었다.
그러더니 곧 어둠 저편에서부터 굉음이 났다.
타앙!
누군가의 보호막이 저 거대한 촉수와 부딪힌 것이다.
이어서는 문지기가 어딘가로 걸음을 내디뎠다.
쿵.
“……!”
정우는 그걸 보고서 직감했다. 놈이 바닥에 떨어진 정수를 흡수하기 위해 움직이는 거라는걸.
“어딜!”
더는 간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됐다.
4일 차 침입자가 진입로에서 구원자를 기다리는 존재란 걸 알게 된 이상, 이 안에 들어온 나머지 구원자를 다 죽이고 놈과 대결해야 했다.
츠아앗!
정우의 다면체 보호막이 시커먼 안개를 빠르게 갈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야에 희미한 불빛 4개가 들어왔다.
누군가 떨어뜨린 정수 구체였다.
‘여기까지 내려온 구원자가 일격에 죽었다고?’
정우는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북의 17위인 민구만 해도 정수 보유량이 58만 개다.
그러니 민구의 연합 제안에 응하러 온 자들 역시 최소 60만 개짜리 각성자들일 텐데.
후우욱!
정우가 구체에 제법 가까워지자 머리 위쪽 허공에서부터 거센 기척이 일었다.
“뭣.”
이에 고개를 든 정우의 눈에 들어온 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었다. 그가 구체를 빼가려는 걸 눈치챈 거다.
‘몸집에 비해 너무 빠른데.’
이미 사오 미터에 달하는 놈의 손바닥이 주변을 찍어 누르기 직전이었고, 정우는 어쩔 수 없이 보유한 모든 정수를 보호막에 쏟았다.
그리고 이내.
투아아앙!
깡마른 손가락과 넓적한 손바닥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덮었다.
“…….”
잠깐의 정적.
다음엔 한 줄기 빛이 문지기의 손등을 찢고 솟구쳤다.
다름 아닌 정우가 뽑아낸 정수 칼날이었다.
츠츠츠츳!
일반적으로 정수에 닿은 물체는 깔끔하게 소멸하거나 절단되기 마련인데, 문지기의 경우엔 칼날의 마찰 면을 통해 전해지는 저항력이 엄청났다.
마치 다른 각성자의 정수 보호막을 찌른 것 같았다.
탓.
끝내 놈의 손등을 찢고 몸을 빼내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결코 낙관적으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장어들하곤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괴물이야. 이러면 다른 순위권자들이 진입로를 닫기 어려울 텐데.’
언젠가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모든 게 인간의 상식을 따르는 게 아닌 우주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니, 하루아침에 생존 난이도가 수십, 수백 배 올라 버릴 수도 있다는 점 말이다.
스르륵.
정우가 정수를 뱉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반격까지 해 버리자, 문지기가 촉수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정우는 아까 봤던 정수 구체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흐릿한 푸른 점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
신장 30미터짜리 괴물 앞에서 고개를 갸웃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정우는 보호막을 한층 두껍게 두르며 미간을 찌푸렸고, 곧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웬 사내 하나가 바닥에 흩어진 정수 구체를 허겁지겁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뭔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고, 바로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
찰나의 정적.
주인을 잃은 정수들이니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겠으나, 사내는 떳떳한 표정을 짓고 있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정우가 문지기의 시선을 끄는 사이 정수만 들고 도망갈 생각이었으니까.
쉬이이이익!
그사이 아까부터 심상치 않은 기척을 내던 촉수가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정우를 통째로 분지를 기세였고, 이를 본 정수 도둑이 경악을 하며 몸을 날렸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에 촉수가 정우를 후려쳤다.
타아아앙!
“악!”
이건 공중으로 몸을 띄운 정수 도둑의 입에서 나온 비명이다.
타격 지점에서부터 발생한 충격파만으로도 문지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정작 놀라야 할 일은 따로 있었으니.
“……?”
문지기의 반대편으로 다시 도약할 준비를 하던 사내는 왜인지 위화감이 들어 멈칫했다. 그 커다란 촉수의 기척이 더는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슥.
결국,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뒤를 흘깃 봤고, 대번에 그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어?”
촉수가 토막 난 채로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육중한 살덩이 사이엔 아까 본 그 남자가 멀쩡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멍한 표정의 탈주자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가져와. 네가 들고 나가 봐야 쓸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