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4
14화. 행운동 (2)
“……다녀왔습니다.”
정우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현관 안쪽으로 들어섰고, 선웅은 이 모습을 멍하니 봤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탁.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한 사내.
나이는 오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벌써 새하얗게 샌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선웅은 여전히 현관 바깥에 선 채로 이 어색한 만남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무시무시하던 눈빚과 달리 사내의 덩치는 상당히 작았다.
신장이 170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살집이 좀 있어 보였지만, 결코 골격이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손만큼은 선응이 아는 것 중 가장 거칠고 단단해 보였다.
굳어 버린 점토 같다고 해야 할까.
자신도 왜 험한 손을 가졌다고 여겨 왔지만, 저 손에 비하면 비단 수준…….
“정우 동료시죠? 불편해할 것 없어요. 들어와요.”
사내, 정우의 아버지가 선웅을 향해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이때만큼은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선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릴 뻔 했다.
“예,옙……감사합니다.”
그가 쭈뼜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서자 사내가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우리 처음 보지요? 정우 아비. 박민구라고 합니다.”
“아. 아…… 처음 됩겠습니다. ‘Watcher’ 사업부 팀장 조선웅입니다.”
그간 온갖 유형의 사람과 만남을 가져 왔지만, 이번처럼 떨리는 순간은 처음이다.
굳은 점토로 꿰맞춰진 것 같은 손 앞에서, 선웅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망설였 다.
그러다 너무 늦기 전에 얼른 그 손을 잡았다.
텁.
박민구의 두꺼운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간 선웅의 오른손이 가늘게 떨린다.
그는 이 ‘아버지’가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포식자네요?”
“예……예?”
별안간 날아든 질문.
선웅이 고개를 홱 들자 예의 그 섬뜩한 눈빛이 시야를 찔러왔다.
오른손은 아직도 민구에게 붙들린 상황.
꽈득.
신음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힘이 선웅의 손올 붙들었다.
선웅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민구가 놔주지 않았고, 낌새를 알아차린 정우가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에요?”
팍!
정우가 아버지의 어깨롤 거칠게 밀친다.
덕분에 선웅은 자신의 손을 빼낼 수 있었지만, 오히려 더 겁이 났다.
이번엔 민구와 정우가 싸우는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에게 뒤로 밀쳐진 민구는 선웅을 흘깃 보더니 식사하던 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짤그락.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좁은 마루를 휘감는다.
“……”
접이식 식탁에 올라 있는 밥 한 공기와 김치 한 접시.
정우가 그걸 빤히 보고 있자 민구가 왼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일이 터졌을 때, 식량부터 가지러 나갔다 왔다. 부엌 근처에 잔뜩 있으니까. 들고 걸을 수 있는 만큼 챙겨라. 더 필요한 것 있으면 알아서 가져가고. 이 동네에 오래 있지 마. 조짐이 좋지 않다.”
민구가 자리에 앉아 허공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선웅은 저게 원가 싶었지만, 이 집에서 함께 살아온 정우만큼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대충 찍어 준 것 같은 지점들은 이 집 안에 숨겨진 무기의 위치였으니까.
박민구, 59세.
신발장과 침대 밑, 책 더미 속에 온갖 흉기를 숨겨 두는 남자.
그가 무슨 특전사 출신이거나 전직 깡패인 건 아니다. 흔하다고 보기엔 조금 독특한, 모난 사람이었을 뿐.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남자아이.
민구라는 사내의 신원올 간단히 정의해 보면 저랬다.
이러한 유형의 삶에겐 일정 확률로 몇 가지 특질이 부여되는데. 하필이면 허풍과 고집이라는 두 가지가 민구에게 주어졌다.
아주 어릴 때는 그저 집이 잘사는 척하는 거짓말쟁이였고.
학교에 들어갈 때쯤엔 싸움을 잘하는 척하는 소년이었다.
그리고 사회에 편입할 때쯤엔…….
‘……사기꾼.’
정우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서 김치를 집어먹는 아버지를 내려다본다.
아주 먼 옛날, 아버지는 사기꾼이었다.
경제사범 정도나 돼서 큰돈을 해 먹은 것도 아니다.
그놈의 입버릇.
아니, 입버릇처럼 ‘거짓말’을 해 대던 게 문제였다.
원가 큰돈을 벌어 보겠답시고 은행 대출을 받아다가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는 데, 사업체가 좀 안정된다 싶으면 매번 엎어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돈을 더 끌어오기 위해 만난 투자자들을 거짓으로 구슬렸던 것이다.
성사가 불투명한 사업 진행 건에 대해서 미리 장담을 하거나 자신이 계획한 일 이 다 잘될 것이라 생각하고 조건부 투자를 너무 많이 받아 버렸다.
시쳇말로 ‘행복 회로’가 미친 듯이 돌아가는, 망상증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정우는, 어느 날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말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나도 처음엔 네 아빠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어. 적어도 아빠 자신은 진짜 그렇게 믿었던 거야. 자기 생각대로 모든 일이 풀릴 거라고. 하지만 남이 보기엔 그저 거짓말 아니었겠니. 그리고 그게 사실이고.’
그러더니 덧붙이셨다.
‘저건 정신병이야. 정신병. 저런 아버지를 두게 해서 미안하구나. 불행하게 해서 미안해…….’
어머니가 죽은 건 저 말을 남긴 뒤로부터 약 일 년 뒤였다.
자살은 아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인도로 돌진해 온 차량에 치여 죽었다.
음주운전이라나.
그럼에도 정우는 한동안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거라고 여겼다.
이때쯤 아버지의 마지막 사업이 처참하게 무너졌고 어머니가 예견한 ‘불행’이 시작됐다.
붉은 딱지와 성난 채권자.
그 외의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빌려 썼던 사채들이 시퍼런 위협으로 돌아왔 다.
정우는 사람이 모이면 얼마나 무서운 소리를 내는지 이때 처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빌려준 돈이 있다던 사설탐정이란 남자가 시커먼 덩치들과 함께 찾아왔다.
정우는 아버지의 머리가 변기 속으로 처박히는 걸 봤고, 그날 이후 박민구는 집을 세 번 옮겼다.
다음엔 집 전화를 없애고, 아들과의 통화 기록을 절대 남기지 않았다.
정우가 아버지의 휴대폰 번호를 모르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듬해 정우는 중학교 3학년이 됐고, 종종 사고를 쳤으며.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았다.
고된 역사를 공유하는 두 사람은 애증의 관계였다.
언젠가부터 정우는 아버지의 직업조차 알 수 없게 됐고, 박민구 역시 집에 들르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알 수 있던 社 날이 갈수록 그의 눈빚과 손발이 거칠어져 간다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지 집 안 이곳저곳에 무기를 숨겨 두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수천 개의 하루가 지나간 오늘, 난데없이 지구가 더 살고 싶다는 성명문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때가 마침 월요일.
정우와 민구가 매주 딱 한 번 마주치는 날이었다.
공교롭다.
아들 정우는 아버지가 가장 먼저 가리켰던 부엌으로 걸어갔다.
“……”
그곳엔 온갖 통조림과 건조식품이 가득했다.
리어카를 끌고 가서 담아 왔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물량.
일이 터지자마자 식량을 가지러 나갔다고 하기에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온 줄 알았더니…….
‘이건 마트를 혼자 턴 수준 아닌가?’
정우의 시선이 차곡차곡 쌓인 통조림 더미를 훑는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통조림 일부가 불그스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기가 흥건하기까지.
피가 묻어 있던 걸 닦아 낸 정황이다.
정우는 곧바로 뒤를 돌아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러곤 정수 보유량을 확인했다.
‘……칠십삼.’
달그락.
그가 불그스름한 통조림 몇 개를 집어 들자 민구가 부엌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우는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신 품에 통조림과 육포를 잔뜩 담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희 보내고 나면. 여기 혼자 남아서 육포나 뜯으시려고요?”
왜 퉁명스러운 말투지만. 실은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사다.
이에 민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이 망했다.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야. 연장이나 단단히 챙겨서 나가라. 서로 갈 길 가자. 그동안 고생 많았다.”
무미건조한 음성에 정우가 턱 근육을 실룩였다.
아직도 현관 근처에 서 있는 선옹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정우의 대사엔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구원자에요.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알고요.”
“……!”
확장되는 선응의 동공.
반면 민구의 얼굴엔 가느다란 떨림조차 없었다.
“난 구원 같은 거 필요 없다. 오히려 세상이 망해서 잘됐다고 생각하니까. 구하고 싶으면 나가서 실컷 구해. 내일 아침까진 여길 떠나 주면 좋겠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화장실 옆을 가리킨다.
그곳엔 가끔 인터넷 쇼핑몰에서나 보던 군용 배낭이 놓여 있었다.
“짐은 저기에 담아라. 나도 내일이면 여길 떠날 거다.”
“……”
하지만 정우의 눈에 아버지의 배낭은 보이지 않았다.
일이 터지자마자 마트에 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식량을 쓸어 왔을 정도면 당연히 자기 몫의 생필품도 다 챙겨 놨을 텐데.
‘설마.’
문득 어머니의 죽음이 떠오른다.
만약 아버지도 사라진다면, 그것 역시 비슷한 느낌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 짐은 어디 있어요?”
정우가 마루를 가로질러 군용 배낭을 집어 들자 민구가 안방 쪽으로 머리를 까닥였다.
“방안에.”
물론 안방 문은 닫혀 있었고. 정우는 그 문을 열어 보지 않았다.
“아, 그래요.”
음정이 묘하게 어긋난다.
정우가 일단 짐부터 챙기자는 신호를 보내자 선웅이 주춤거리면서 움직였다.
철그럭,투둑.
가방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가급적 건조식품 위주로 챙겼지만, 캔 황도 같은 건 일부러라도 몇 개 집었다.
생과일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보존에 용이하도록 가공된 과일도 영양소가 있다는 내용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엔 생수와 성냥, 라이터 같은 기초적인 생존 물품을 쟁기고, 이어서 무기 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스륵.
정우가 현관 바로 옆의 신발장과 벽면 사이에서 시퍼런 회칼을 뽑자 선응이 기겁했다.
마루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소형 매트 뒤에선 철제 야구 배트와 삼단봉이 나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삽과 밧줄 같은 것도 있었는데, 이를 본 정우가 잠시 고민하 더니 밧줄만 챙겼다.
“삽은 너무 무겁잖아요.”
“아, 예……그렇죠.”
선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마치 어느 소설에서 봤던 아이템 상점 같은 느낌이었다.
전혀 현실감이 없다……. 이런 삶이, 집 안이 실제로 존재했다니.
“여긴 자경단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던데,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정우가 기다란 송곳과 소형 칼을 배낭에 쑤셔 넣으며 묻자 식사를 마친 민구가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이 동네 지구대장이 결성한 모양이다. 옆 동네에선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다던데. 그래도 여긴 경찰들이 일찍 나서서 방향을 잡아준 셈이지.”
“경찰들이요……?”
“그래. 덕분에 여기선 살인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색출 작업이 시작되기도 했고.”
색출 작업.
민구가 더 부연을 하진 않았지만, 정우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찾고 있는 대상이 다름 아닌 아버지일 거라는 점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정수 보유량.
통조림에 남아 있는 핏자국.
분명하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대량 살상을 벌이고 온 상태인거다.
물론 이런 일이 전국 단위로 일어나고 있을 것이기에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이 동네엔 왜 의욕적인 자경단이 있고, 머릿수도 상당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인자를 찾아내려 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