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57
159화. 공직 윤리(1)
월권(越權).
사전적 의미는 ‘자기 권한 밖의 일에 관여함.’이다.
그리고 성태가 말한 월권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월권이요……?”
중성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자 성태가 말을 잇기 전에 명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리 시청에서 가족 하나를 살려 줬습니다. 부부 한 쌍에 아들 둘. 총 네 명이고, 정수로 치면 1천 개가 좀 안 될 겁니다.”
“살려 주다니? 이 자리엔 없지 않습니까?”
“예. 성역에 들일 수 있는 기술자는 아니었고, 그래서 도망가도록 했습니다.”
“아니, 왜…….”
중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명일을 쏘아보다가 뒤늦게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뭐, 새삼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가족을 이룬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중성이 명일의 사고 회로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점이 이 사내의 마음을 움직였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래 봐야 정수 천 개면 지금 별 손해가 아니지 않나요? 굳이 문제 삼을 것까진 없지 싶은데요.”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수의사 김경채가 명일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나 중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정수가 아닙니다. 명일 씨가 ‘살려야 할 사람’이 아니라 ‘살리고 싶은 사람’을 살렸다는 게 문제지요. 정 어떻게든 기회를 주고 싶었다면 성역으로 데려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더니 중성이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반드시 죽게 될 사람들이란 걸 알았으니까 그 자리에서 놓아 준 것이겠지요. 본인도 월권행위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
이에 명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야 할 자 대신 살리고 싶은 대상을 살린다.
이건 성역의 절대자인 정우조차도 감히 하지 않는 행위였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마저 죽일 생각을 하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정우에게 간택되어 연명하게 된 사람들이 제멋대로 누군가를 살려 준다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내 일어났군.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초대 투표권자에 의해서.’
중성은 착잡한 눈으로 명일을 바라봤다.
초대 투표권자, 아니 이젠 ‘의원’이라고 부른다. 의원들을 선출할 때엔 모든 주민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므로 ‘투표권자’라는 기존 명칭의 의미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이건 오늘인 4일 차 조례를 통해 정해졌고, 공교롭게도 이 안건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명일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겁니까, 아니면 너무 없었던 겁니까?”
중성의 물음에 명일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반면 경채는 아직도 이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그래 봐야 지금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우리뿐이잖아요? 조용히 덮고 지나가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러자 중성이 처음으로 역정을 냈다.
“미쳤습니까? 벌써부터 썩어 갈 생각을 하다니.”
문자 그대로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오른다.
누가 봐도 단순히 경채의 말 때문에 솟아오른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복잡하고 오래된 기원이 있어 보이는 감정이었다.
“의원들을 소집해요. 이 일을 공론화할 겁니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중성이 턱 근육을 실룩이며 ‘처벌’이란 단어를 입에 담자 모두의 동공이 커졌다.
* * *
오후 2시 31분, 성역의 중심부.
이제 이곳엔 높이 15센티에 너비 10미터짜리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실 단이라고 해 봐야 흙과 돌을 섞어 모양을 잡은 뒤 나무판자 따위로 보강한 수준이었지만 이래 봬도 성역의 건설 기술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었다.
단을 만든 이유는 조례 진행, 전체 투표 등의 중요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는데, 현 시간부로 새로운 용도가 하나 더 생겨 버렸다.
그건 다름 아닌…….
“지금부터 성역의 첫 번째 공판(公判)을 시작하겠습니다.”
중성의 말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판?”
“뭐……?”
“그러니까, 재판을 한다는 건가?”
주민들이 단에 올라 있는 인물들에게서 어떤 패턴을 찾아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전직 외교부 차관보 김중성.
수색조의 주력이자 절대자의 아버지인 박민구.
강남 세브란스의 심장 내과의, 윤재희.
굴삭기 기사이자 ‘하급 인력’의 대표자인 김용철.
여기까진 주민들이 직접 뽑은 의원들이었고, 이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건 바로 전직 성역의 초대 의원이자 서기 역할을 맡고 있는 강명일.
그리고 광수대 출신의 형사인 이성태.
이렇게까지 여섯 사람이 단에 직접 올랐고, 오늘 수색을 나갔던 나머지 조원은 단의 바로 아래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금일 수색 작전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해 주는 구성이었다.
이에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고, 법봉으로 쓸 게 없던 중성은 단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냄새에게 양해를 구해 목소리를 빌렸다.
크릉.
* 시끄러워.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장내가 고요해졌다.
비록 모두의 시선이 중성이 아닌 냄새에게 쏠렸지만 말이다.
“주목해 주십시오. 오늘 이 자리를 공판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여기서 ‘시비’를 가리진 않을 겁니다. 잘못된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판단하는 자리입니다.”
중성이 명일과 성태를 단 앞쪽으로 나오도록 하며 모두에게 일렀다.
그러곤 성태에게 고발 내용을 육하원칙에 따라 읊도록 했다.
수색조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했던 명일이 구리 시청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
일련의 이야기를 들은 주민 중 일부는 침음을 흘리며 시선을 땅바닥으로 깔았다.
이 경우는 직접적으로 박정우를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반면 대리자인 선웅이나 수색조에 의해 성역에 머물게 된 사람들은 전후 사정을 전해 듣고도 이것이 왜 그렇게 중대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을 괜히 풀어 줘서 그런 건가?”
이런 식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앞서 중성이 공표했다시피 이 자리는 시비를 가리기 위해 마련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머지 주민에게 본보기 삼는 자리에 가까웠다.
성역엔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으니, 잘 봐두라고.
슥.
중성은 명일의 ‘회의록’ 노트를 공판 동안 임시 서기를 맡기로 한 선웅에게 건넸다.
다음엔 목을 한차례 가다듬은 뒤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반은 정우 씨가 직접 골랐고, 나머지 반은 규칙에 의해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아무리 큰 과오를 범한다 해도 성역에서 ‘죽음’을 선고할 순 없을 겁니다.”
“……!”
중성의 발언에 사람들이 움찔하며 크게 놀랐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중성은 명일이 사형에 처해져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는 뜻이었으니까.
“우리의 판단으로 우리 중 하나를 죽일 수도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것 역시 월권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정우의 공식적인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어서 중성이 ‘이의가 있으시면 지금 말씀하십시오.’라고 덧붙였으나 주민 중 손을 드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
이윽고 중성이 자신의 뒤편에 도열한 의원들을 돌아봤다.
“강명일 씨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를 시작하죠. 첫 사례이니만큼 이번 판결은 중요한 선례가 될 겁니다.”
다각도로 검토해서 말을 뱉으란 이야기였다.
“어마어마하군요.”
심장 내과의 윤재희 교수가 목깃을 만지작거리며 심호흡을 한다.
노동자 대표인 김용철은 침착한 얼굴이었으나 두 손이 벌벌 떨리는 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반면 민구는.
“죽지 않을 정도로 팬 다음 의사들이 붙어서 회복시키면 안 됩니까?”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기 어려운 말을 툭 던질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공식적인…… 의견이십니까?”
“예.”
그는 중성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흠씬 패는 게 일관성 있고 깔끔하지 않나? 사형을 하지도 못하고 패지도 않을 거라면 대체 뭘로 처벌한다는 거요?”
“…….”
좀 과격하지만 듣다 보니 아주 틀리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
다들 은근히 그의 의견에 동조하려고 들 무렵, 의료진 대표 윤재희가 반론을 제기했다.
“말씀하신 건 일종의 태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저희는 ‘죽지 않을 만큼’이라는 절대조건을 붙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건 제대로 된 처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꺼려지긴 하지만 아주 두렵지도 않은 형벌이니까요. 월권의 대가치고는 강도가 낮습니다.”
그러면서 윤 교수는 굳이 태형을 도입한다면 폭행이나 절도 등의 범죄에 적용해야 할 거라고 덧붙였다.
“…….”
화제가 다방면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자 장내 분위기도 점차 엄숙해졌다.
생각해 보니 여태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지 않은가. 만약 성역 내에서 폭행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말이다.
더 나아가, 정말 만에 하나 살인이 벌어진다면…….
저마다 머릿속으로 대안을 떠올려 보는 사이 용철이 슬쩍 손을 들었다.
“예, 말씀하시죠.”
중성의 허락에 용철이 좌중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서 천천히 발언했다.
“정석적인 방법은 어떻습니까? 노역을 시킨다든지, 아니면 외진 곳으로 유배를 보낸다든지.”
정석적인 방법. 지구 폐쇄 이전의 세계를 살아 본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표현이었다.
“노역은 지금도 다들 돌아가며 하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처벌이 됩니까?”
이건 단 앞에 모인 주민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반론이었다.
그러자 용철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제안했다.
“단순히 짐을 옮기거나 건물을 짓는 건 그리 고된 일이 아니죠. 하지만…….”
그가 말을 잠시 멈추고 바라본 것은 다름 아닌 민구였다.
아니, 정확히는 수색조의 상징으로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수색조 임무 자체를 노역으로 보면 어떨까요? 아무도 수색조에 끼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니까. 죽음하고도 가장 가깝죠.”
그러더니 이번엔 명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이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성역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활용해야겠죠. 처벌의 일환이라면 더욱요. 그래서 저는 월권자의 수색조 영구 귀속을 제의합니다.”
“……!”
다시금 술렁이는 장내.
하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좀 달랐다. 의아함에 의한 동요가 아니라 제법 그럴싸한 의견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니까.
‘월권자를 수색조에 영구히 포함시키자고? 독특한 발상이군.’
중성도 내심 용철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 발생할 다른 범죄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범죄의 경중에 따라 수색조 귀속 기간에 차등을 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이러면 종래엔 수색조는 범법자들로만 이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덕분에 결코 잃어선 안 되는 희귀한 인재들은 보다 안전할 수 있을 테고.
문제는 특별히 죄를 지은 게 아니면서도 매번 수색조에 포함되어야 하는 자들이었다.
대표적으론 민구가 있다.
“…….”
중성이 조용히 민구를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그도 중성 쪽을 바라봤다.
우려와 달리 민구는 수색조에 누가 들어오든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차하면 버리고 가기도 좋고, 내가 보기엔 괜찮은 생각인 거 같소.”
중성의 고민을 읽어 낸 민구가 직접 공인까지 해 줬고, 이에 따라 서서히 여론이 형성되려는 찰나.
투두두두두……!
난데없이 프로펠러 회전음이 성역을 강타했다.
“정우 씨……?”
누군가 지나가듯 구원자의 이름을 발음했으나 곧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날아오고 있는 헬기의 색깔이 검은색이었던 것이다.
“뭐죠, 저건?”
전례 없는 외부 헬기 접근에 선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 준비를 했고, 그사이 빠른 속도로 금빛 보호막 앞까지 접근한 헬기에서부터 빨간 조명이 뿜어져 나왔다.
번쩍, 번쩍.
빠른 템포로 명멸하는 비상등.
“……도움 요청 신호예요.”
이를 본 외항기 부기장 정소희가 주민들 사이에서 조언을 던졌다.
“도움 요청이라고요……?”
그새 동공이 파랗게 채워진 선웅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이때.
투드드드드.
활공 중이던 헬기가 다시 성역 안쪽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곤 어떤 사내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상공을 가로질러 날아들었다.
「의사…… 의사가 있습니까? 긴급 환자 후송 중.」